짧은생각 긴여운

축복과 재앙은 내재한 신이주신다.

배가번드 2023. 2. 16.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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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의 제자 혜가는 원래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수나라의 양무제가 불사를 위해 노력해온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공덕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달마대사가 남기고 떠나자 괘씸하게 여긴 양무제가 목을 잘라오라 보낸 이가 혜가라고 하지요.

출가 전에는 신광이라는 장군이었는데 팔 하나를 잘라 달마대사에게 바치고 혜가라는 이름을 받아 출가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흰 눈이 붉게 변한다면 제자로 받겠다는 달마의 말에 팔을 잘랐다고 하는데 실지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다만 출가 전 장군이었다는 말은 맞는 것 같으며 전장에서 팔을 잃은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리라봅니다.

그런데 달마와 혜가사이에 있었다는 선문답에 대한 이야기는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달마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혜가에게 달마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를 물었지요.

그러자 혜가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고자 한다 말했고 그 말에 달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없애주겠노라.

 

이 말에 확철대오를 했다고 하지요.

일설에는 장군이었던 혜가가 좌선만하면 피를 보는지라 고통스러워했다고 하며 자신의 살생업을 없애주기를 바랐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 잘못된 행동을 스스로가 용서하기가 어려운 것은 분명하고 그로인해 혼란스러운 마음이 드는것일 텐데 마음의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고 해서 그 당장 혼란스러운 마음을 없앤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자칫 이 말을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의 과거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는 꼴이 되어 철면피나 인면수심의 인간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고 어제같이 죄를 물마시듯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의 실체가 없음을 말하며 나는 죄지은바가 없노라 말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일쑤이며 당장 쇠고랑을 찰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문답에 대한 일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두들 알다시피 혜가는 세상의 즐거움을 등지고 출가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평생을 법륜의 바퀴를 굴리며 살았고 승찬, 도신, 홍인, 혜능으로 이어지는 달마선불교의 법맥을 있는 불교계의 거목이 되었지요.

보시 중에 가장 큰 보시인 법보시를 몸소 실천하며 평생을 살았던 겁니다.

내면적으로는 육신과는 별개의 부처를 이루었고 외형적으로는 회개와 참회의 마음으로 육신으로 지은 죄를 평생에 걸쳐 갚았다고 봐야합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육신과는 별개의 성령을 깨달은 후에 평생을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매진하며 일생을 마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일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까요.

깨달음을 위해 출가를 하거나 성직자의 길을 걸어가는 길도 있긴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으므로 재가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할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개인의 생각으로는 각자가 속한 종교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아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합니다.

혜가가 달마의 입적(入寂) 전까지 시봉을 들며 헌신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성직자들의 목회 일을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며 종교단체에 속해 단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봉사하며 지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수 있지요.

어떻게 살아가던지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됩니다.

심어놓은 것은 언젠가는 돌아오기 마련이며 수행이 깊어질수록 인과는 더욱 빨리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12:6)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 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12:7)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8)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12:9)

Furthermore we have had fathers of our flesh which corrected us, and we gave them reverence: shall we not much rather be in subjection unto the Father of spirits, and live?

 

수행을 하고 안하고를 떠나 인생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과 곤란지경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일반인들은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과 환란은 누군가 나에게 심어준거라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영적인 길에 접어든 사람은 무조건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깨닫게 만들기 위해 바울이 이런 말을 남긴 겁니다.

만약 이 세상에 심지 않은 것이 저절로 싹이 나오는 일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모든 재앙의 원인제공자는 본인이 맞습니다.

아마도 누군가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이만큼 큰 형벌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다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 역시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닌지라 너무나 잘 압니다.

35살 무렵 입문을 해서 무려26년을 참회하며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심정으로 살았으니 난들 그런 생각을 안 해봤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번생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되면 생각이 바뀝니다.

불구의 몸을 갖게 만든 이도 나를 심판하시는 성령이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렇게 만든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지요.

불구의 몸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러 넣어준 많은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사자(使者)들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며 가난한 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문으로 올린 히브리서 중에 가장 핵심적인 말씀은 9절로서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라는 내용입니다.(be in subjection unto the Father of spirits, and live?)

삼라만상을 운행하시는 이는 성령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지요.

가끔씩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는 사람을 볼 때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하나님을 믿다가 형편이 나빠지면 왜 불신하는 마음을 가지는지 그 이유를 묻고자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 믿는 마음이 조석으로 바뀌면서 축복이 늘 오기만을 바란다면 그자체로 벌을 받아 마땅한 겁니다.

본인의 신에 대한 믿음이 갈팡질팡하는데 신인들 혼란스럽지 않겠냐는 말이지요.

오늘 조금만 좋으면 신을 믿는다는 말은 물론 신과 하나 된 듯이 기뻐하다가 조금만 형편이 어려워지면 신은 어디로 벗어던지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가련한 중생이 되어 신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굽니다.

이런 식의 믿음이라면 도대체 그 마음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는 것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은 마귀가 주는 겁니까.

아니면 부처는 좋은 것만 주고 하나님은 형벌만 내리는지요.

이런 사람들은 입으로는 모든 종교가 하나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편리한데로 종교를 바꾼 것에 불과한 겁니다.

부처가 자비롭게 느껴질 때는 부처를 믿는다고 하다가 조금만 힘든 상황이 오면 하나님을 믿는다며 하나님께로 피신합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곤란지경에 처해지면 하나님을 불신하며 부처를 찾습니다.

이렇게 되면 도대체 이 사람의 영혼은 어디로 가야하는 겁니까.

이렇게 되는 이유는 평상시 말을 함부로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진정 모든 종교가 하나라고 말을 하려면 본인스스로가 증득이 되어야하는 겁니다.

이론상으로 안다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런 거지요.

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책임이 따르며 시험이 옵니다.

정말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듯이 상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합니다.

따라서 재앙이 주어지는 것은 부처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 때문도 아니며 자신의 세치 혀가 불러들인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또 다른 나에게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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