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에 지루해하던 전업주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아들딸 남편과 함께 4식구가 돼지갈비 집에 갔다가 놀라고 말았지요.
갈비 구워 주는 아줌마가 자신의 여고 동창이었던 겁니다.
본인이 겨우 돼지 갈비 집에 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 갈비 구워주는 여고동창생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자 갑자기 우월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일진이던 동창녀가 갈비 집에서 자신을 위해 갈비를 굽는 현실 앞에 부끄러움보다 앞섰던 것은 알 수 없는 승리감이었던 거지요.
학창시절 내도록 억눌러 지내야했던 굴욕감이 한꺼번에 해소되었던 셈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비록 보잘 것 없고 하찮아 보이는 내 삶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삶이 될 수도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도자로서 내가 보는 관점은 약간 달랐지요.
평범한 주부가 자신보다 못한 동창생의 모습을 통해 만족을 얻었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겠지만 여전히 그 마음에는 만족이 없다는 겁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은 동창생을 만나게 된다면 어김없이 굴욕감을 느껴야 할 거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은 육신을 가진 채 물질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욕망과 욕심 때문이지요.
물질적으로 만족이 오면 또다시 외모에 대한 만족을 찾게 되고 외모를 만족시키게 되면 또 다시 명예를 추구하고 권력을 탐하게 됩니다.
끝도 없는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되면 또다시 반복된 과정을 겪기 위해 윤회를 합니다.
그래서 돈을 종교단체에 바쳐가며 해탈과 영생을 꿈꾸지만 본인스스로의 내재한 영혼을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영생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에 심취해있는 분들은 제각기 아니라고 말하며 본인들은 영원한 해탈과 영생을 얻었다 말할 겁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하지요.
자신이 영생을 얻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말인데 이 시간 본인 스스로 예수님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고 말하고 예수님처럼 되었다 말할 때 박수쳐 줄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도들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누군가 부처를 이루었다 말할 때 맞다고 말해줄 수 있는지, 아니면 부처 아닌 사람이 없다 말할 수 있는지요.
부처 눈에 부처만 보인다 했던 만큼 이런 말은 영원한 해탈을 얻었다면 누구나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러한 일이 안된다면 아직은 영생과는 길이 먼 것이며 영원한 해탈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도 없지요.
일단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이상 가능성은 열려있으며 육신을 버리는 날 홀연히 들어 올림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겸손 된 마음가짐을 갖추고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일은 말아야 할 겁니다.
앞서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보았듯이 신은 우리에게 언제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네가 처해있는 상황을 통해 보라는 듯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지요.
단편적인 면만을 보게 되면 학창시절에 당해야만 했던 굴욕을 복수하게 만든 셈인 동시에 타인에게 억압과 폭력을 휘둘렀던 자신의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지만 속 깊은 내용은 따로 있었습니다.
관조자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두 사람 모두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연극하는 배우인겁니다.
한사람은 평범한 주부로서의 역할을 맡은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갈비 집에 종사하는 여종업원 역을 맡은 것뿐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얻어야하는 교훈들이 각자의 몫이듯이 영화를 통해 얻어야하는 것도 관객들의 몫이지요.
비록 일진이었다 하여도 모두가 갈비를 굽는 신세가 되지는 않으며 물질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수도 있을 것이고 평범한 학생으로 졸업했다 해서 평범하게 살라는 법은 없습니다.
멀쩡하게 잘살아가던 주부가 하루아침에 타락한 인생을 살수도 있으며 가난한 삶이 어느 날 풍족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모두가 해피엔딩이지는 않으며 영생과 진정한 해탈과는 거리가 멉니다.
갈비 집에서 갈비를 굽는 일을 할지라도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만족한 마음이 올 것이고 일시적으로 만족한 마음이 들었다 할지라도 내일 불만족 한다면 또다시 불행해질 겁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는 거지요.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매일같이 돌이킬 수는 있습니다.
자신의 내재한 신의 품성을 깨닫고 나면 순간순간 돌이킬 수 있으며 그 순간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질적으로 자그마한 성과만 있어도 마치 자신이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좋아하다가 어려움이 닥치고 사업이 망하거나 육신이 병들면 세상불행을 모두가진 것처럼 실망하며 자신을 의식의 바닥으로 처박아 버립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지요.
이모두가 가치관이 물질적이기 때문이며 영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혜안이 열리면 앉은자리가 천국이며 조건에 관계없이 만족하게 된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본인의 영적수준은 본인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아직도 누군가의 인가가 필요하다 생각한다면 인가를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깨닫지 못한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라 할 것은 제자의 간절한 소망에 스승이 답해줄 때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만족을 찾지 못한 사람만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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