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누가복음의 준비.

배가번드 2019. 9. 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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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예수관련 영화를 본 것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잘사는 외삼촌 덕에 눈 호강을 했었는데 제목도 모르고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요한이 감옥에 갇혀있는 장면과 집집마다 아이를 찾느라 분주해하던 로마병사의 모습이 기억의 저편에 자리하고 있다.

뜻도 모르는 영화를 왜 내가 그렇게 열심히 봐야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 와서 처음 접해보는 TV인지라 신기한 면도 있었던 것 같고 뭔가 알 수 없는 내면의 이끌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386세대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초등학교 3학년 때 빵을 얻어먹기 위해 교회를 다녔다.

수요일마다 빵을 주는지라 교리를 열심히 들어야만했다.

교회를 다니던 중 언젠가 일요일은 왜 빵을 주지 않는가를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교리 반을 맡고 있던 전도사님께서 수요일 교리를 들어야 준다고 했기에 열심히 공부를 했던 거다.

그런데 어린나이에도 궁금했던 것은 왜 전도사님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 하셨는데 일요일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고계신다고 하나였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어째서 예수님이 하나님이기도 하다고 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고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기도하다면 어째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하나님이 왜 또 부활을 해야만 하는지 궁금했다.

여기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전도사님은 크면 알게 된다는 말로 즉답을 회피하셨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그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으며 고등학교 때 YMCA회원이 될 때까지 교회와는 거리를 두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만큼은 늘 가까이에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도 기독교재단의 학교였고 고등학교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억지로라도 성경공부를 해야만 했다.

중학교 때 무엇 때문이었는지 성경시험도 봐야만했는데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문제하나가 있었다.

장래 배우자는 같은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것과 타종교인을 결혼 후 개종시킨다는 두가지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었는데 정답이 앞의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가하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날들이 필요했던 것 같다.

분명히 두뇌적인 판단으로는 결혼 후 개종시키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실제로 살아보니 아니더라는 거다.

종교가 같지 않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믿음의 정도에 따라 아주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의 믿음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정말 마음 안에 하나님이 살게 될 경우 문제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물론 두 사람의 인식정도가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해있다면 종교의 벽이 허물어져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어느 한쪽이 그렇지 못할 경우 마찰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된다.

이미 육신은 성전이요 성전 안에 하나님이 거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사람에게 너는 미쳤거나 귀신이 들린 것 이니 용한 목사님에게 가자고 손을 잡아끈다면 어찌 평화로울 수가 있겠는가.

또는 예수의 귀신이 들린 모양이니 신통방통한 스님에게 가자고 하거나 깨달음을 얻은 법사님의 제자가 되라고 하면 어찌 조용하게 넘어갈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이모두가 내 인생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지금도 세상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하다.

가끔씩 교회에 다니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혼자 사는 나를 위해 교회에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길 바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안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내가 몸으로 느끼고 체험한 성경교리가 같지 않은데 어떻게 함께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 싶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고 성경을 벗어난 삶의 형태라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대상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없으니 이래저래 성경을 믿는 사람 중에 배우자를 만난다는 것은 힘든 일인 것 같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내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절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거나 부족한 교리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가족이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 곁을 내가 떠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밝혀놓았다시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성경이 내주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록 내 삶이 도덕적이거나 성경적이지 못하고 영적으로 타락에 가까운 삶을 살았을지라도 성경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적은 없었다.

불교에 가까운 명상을 시작한 이후로도 성경은 내게서 멀어진 적이 없었는데 내 가족들 대부분이 크리스천들이기 때문이었다.

명상을 시작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97, 호주로 갔을 때도 장로님이신 외삼촌의 영향으로 가끔씩 교회를 가야만했었고 사업실패의 후유증으로 감방에 들어앉아 있을 때도 동생이 들여보내준 성경책을 건성으로나마 읽어야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사업차 중국에 들어가 컴퓨터를 배운 후에야 제대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으니 인생길의 굴곡이 지금의 성경연구를 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지금은 안다.

만약 내가 중국을 가지 않았고 사업이 망하지 않았더라면 동생이 다니는 교회를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고 성경연구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생이야말로 오늘날 나 홀로목사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동생으로서는 오빠라는 작자가 사이비에 빠져 가산(家産)을 탕진하는 것도 모자라 이역만리타국에서 고생을 사서 하는지라 파탄지경에 빠진 오빠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로 끌고 갔을 것이 분명하다.

공장세 3백에다 공장구입비25백까지 주면서까지 나를 교회로 끌고 갔던 것은 아무리 살펴봐도 내가 사이비에 빠진 것이 틀림없는 것 같고 그 나중은 지옥행이라는 것이 훤히 보이는지라 그렇게 해서라도 내 영혼을 구해야겠다는 구국(救國)의 마음으로 충정심(忠情心)을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동생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갔을 때 느낀 점은 그들이야말로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반적인 교리자체는 일반적인 성경해석과 별다른바 없었지만 영생에 대한부분과 예수님 부활에 관한 것들은 잘못이해하고 있음이 보였다.

처음 내가 동생에게 이러한 부분을 설명하였을 때 동생의 반응은 그야말로 실망스러운 것이었는데 도무지 내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 정신상태가 이상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동생이 이러한 반응을 보이게 된 동기는 내가 제공한 셈이었는데 좀 더 상세하게 성경에 기록된 부활과 영생에 대해 설명하려고 영적인 체험까지 드러낸 탓이었다.

내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을 직접 보았노라 했으니 동생의 그런 반응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내가 성경공부를 해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거다.

그러나 막상 성경을 파고들고 보니 동생을 일깨워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이 잘못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한 나 자신조차 잘못알고 있었던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육신과 영의 상관관계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모든 비밀들이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했는데 오랫동안 지속하여왔던 명상법인 관음법문의 정수가 성경에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약의 난해한 내용을 접하게 되었을 때 깊은 명상을 통해 숨겨진 뜻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내가 처음 경험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춤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와 같은 일은 마가복음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졌는데 그 정도가 점점 더 깊어져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할 때마다 비밀스런 뜻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물론 명상법을 가르쳐주신 스승님께도 감사했다.

사실 내가 성경을 세밀하게 연구하는 이유는 동생의 잘못된 종교관을 바로잡아 주려는 것뿐만이 아니라 함께 오랫동안 관음법문을 수행해 나오는 동료수행자들의 잘못된 수행 관을 고쳐주려는 목적도 있다.

아직은 동생이 내가 속해있는 관음법문에 대해 긍정적이지도 못하고 타종교를 인정하지는 않고 있고 동료수행자들 역시 성경말씀에 대해 올곧게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많은 진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를 읽어본 분들이라면 이렇지 않을 도리가 없다.

특히 나 홀로목사와 가끔씩 만나는 분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경지를 넘어서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틀린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 홀로목사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믿음이 그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벌써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통해 제대로 된 믿음의 길로 접어든 이들이 적지 않은 만큼 앞으로 누가복음에서도 하나님께서 지혜의 눈을 열어주시어 담겨진 뜻을 알게 하시고 더 많은 이들이 영생과를 얻게 허락하실 것이라 확신을 하며 누가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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