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에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지도 20년이 다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을 명상을 해왔는지라 처음에는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졸았던 적이 몇 번 있었지요.
하지만 졸음이 온 것이 아니라 속으로는 명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옆에서 보기에는 내가 조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사실은 마음속으로 오불을 외우고 있었으며 영혼에 집중이 되고 있었기에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과 영이 분리가 되다보니 이런 일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97년 무렵 호주에 살 때 통역을 위해 외사촌동생을 데리고 영업을 나간 적이 있었지요.
한참을 눈을 감고 명상 중에 있었는데 동생이 깨우기에 놀라 일어났더니 내가 코를 심하게 곤다는 겁니다.
운전하는 사람을 생각해야지 왜 자는 거냐는 말이었는데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내가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동생하고 말을 할 것도 없어 평상시처럼 명상을 했던 것인데 나도 모르게 육과영의 분리현상이 일어난 거지요.
이때만 하더라도 하루에 잠을 한두 시간밖에 자지 않을 때인지라 눈만 감으면 육과 영의 분리가 일어났던 것이며 틈만 나면 오불을 외우고 다녔으니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던 겁니다.
사정을 모르는 동생은 나를 나무랐지만 나로서는 정신이 깨어나 있었는지라 잠을 잔 것이 아니었으니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요즘 지인을 통해 또다시 확인하곤 합니다.
나를 찾아오는 방문객 중에 한분이 과거에 나와 같은 현상을 겪고 있으며 나에게 내 과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80중반을 넘긴 노인장이 내 집을 방문하면 꼭 하룻밤을 주무시고 가는데 항상 말씀하시기를 밤새한숨도 자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분명히 내가 일어날 때마다 코를 골며 잠자는 것을 확인을 했는데 밤새도록 자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노인장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이는 육과 영이 분리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과거에 내가 호주에서 경험한 일과 교회에서 경험한 일을 지금 겪고 있는 거지요.
사실 이러한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서 이것이 수행의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육신과는 별개의 존재인 내가 있고 그것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자체만으로도 절반은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의 한 꺼풀이 벗겨진 것일 뿐 모두는 아닙니다.
육신을 일곱 바디(body)로 나누기도 하는지라 이것은 시작단계로 볼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나면 또다시 영체가 한 단계 상승하는 경험이 주어집니다.
이런 일을 일러 꿈속에서 꿈을 꾼다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잠을 잘 때 자연스럽게 꿈을 꿉니다.
이때 잠을 자는 나와 꿈을 꾸는 나는 첫 번째 분리가 일어난 거지요.
일반인들의 경우 꿈을 꾸는 것을 두뇌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보고 육신과 별개의 일로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꿈은 의식의 일종으로서 육신이 잠을 잘 때 일어납니다.
이러한 인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로인해 예지몽을 말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시작일 뿐 또다시 꿈속에서 꿈을 꾸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잠을 자는 나와 꿈을 꾸는 나, 그리고 꿈속에서 또 꿈을 꾸는 내가 있게 되는 거지요.
장자가 말한 호접몽(胡蝶夢)이 이래서 생겨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꿈속에서 꿈을 꾸는 나는 또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또다시 한걸음 나아가게 되면 꿈속에서 꿈을 꾸는 나를 인식하는 나는 또 누구일까라는 물음도 생겨납니다.
이렇듯 의식의 세계에서는 분리는 다양한 상태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이러한 경험을 모두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첫걸음은 육신과 영혼의 분리가 먼저 일어나야합니다.
이러한 여러 인식상태를 경험했을 때 몰아일체를 말하고 만물동일체를 말하게 되는 것이며 제대로 된 영의 세계를 안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에 성경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와 닿게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마24:15)
When ye therefore shall see the abomination of desolation, spoken of by Daniel the prophet, stand in the holy place, (whoso readeth, let him understand:)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마24:16)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마24:17)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마24:18)
Neither let him which is in the field return back to take his clothes.
영적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읽는 자는 깨달을 것이라는 전제조건을 말해놓은 겁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이 드러난 사람이라면 성전에 성령이 우뚝 선 것을(stand in the holy place) 뜻한다는 사실을 알아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체험이 없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두뇌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음으로 역사적 사실에서 이 내용을 해석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만 바벨로니아로 끌려간 이스라엘사람들을 말하게 되거나 로마침략을 말하는 거지요.
만약 이런 식의 해석일 것 같으면 가족들을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지붕위에 있고 들이나 밭에 있다고 잡혀가지 않겠는지요.
이 내용은 그런 뜻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며 높은 곳에서 내려오신다는 말입니다.
산이나 지붕은 모두 꼭대기를 의미하며 의식의 최고봉에 머물라는 뜻인 겁니다.
그리고 들이나 밭은 폭넓은 인식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말로서 경계의 벽이 허물어져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를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이미 영적인 성장을 하여 타인에게 가르침을 줄 정도(복음전파, 영적수확을 의미)의 인식이라면 외형적인 것들에 치중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18절에서 말하는 겉옷(his clothes)이란 세상적인 것들을 비유한 것으로 권력이나 명예를 뜻하는 거지요.
이렇게 보게 되면 영적인 길을 걷다 성령이 임하심을 어쩌다 발견해서 목회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 삿된 길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경종의 뜻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교회를 마치 자신의 소유재산정도로 여기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조심해야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어떤 경지에 가있는지도 모른 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지요.
내가 모르는 것을 말한다고 해서 마치 그 사람이 나보다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게 되면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여앉아 자신들만의 것을 공유하다보면 그것만이 진리인양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러한 인식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게 되며 그 세계에 매이게 되는 겁니다.
내가 오늘 새삼스럽게 옛날 일을 떠올렸던 것은 과거에 졸았던 일에 대해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에도 지금도 성경말씀의 속뜻을 헤아리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기 위해서입니다.
설사 내가 잠을 잤다하더라도 말씀도중 잠을 안잔 사람보다 영적으로 볼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진리의 말씀인줄 안다면 아는 것도 아니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해답은 자신 안에 있으며 그것만이 진리입니다.
자신 안에서 찾은 이들만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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