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이상했던 것은 성경말씀을 공부한다면서 어째서 하나님과 하나 된 이가 하나도 없나 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지가 수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말은 하면서도 성령과 하나 됨을 경험한 이가 없더라는 말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과 하나 되었다는 말이고 영생을 얻었다는 말인데 누군가 빛이신 성령을 보았다는 말에 귀신들린 사람 취급을 하며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 도대체 그들이 받았다는 구원은 어디에 있는 건지요.
이러한 점을 볼 때 구원이란 밖에서 누군가 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내면에 자리하는 성령이 깨어나야 함을 알게 됩니다.
빛은 곧 생명이고 생명은 곧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이니 성령이 빛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성경은 무척 자주 언급하고 있으며 바올은 살아생전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를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행9:3)
And as he journeyed, he came near Damascus: and suddenly there shined round about him a light from heaven: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9:4)
And he fell to the earth, and heard a voice saying unto him, Saul, Saul, why persecutest thou me?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5)
And he said, Who art thou, Lord? And the Lord said, I am Jesus whom thou persecutest: it is hard for thee to kick against the pricks.
액면대로 보자면 바울의 이름이 사울이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가운데 일어난 일로 보이지만 이것은 바울이 깊은 묵상 중에 일어난 영적체험입니다.
사울의 히브리어 뜻은“하나님께 구했다, 희망”이고 바울은 “작은 자”이며 다메섹은 시리아어 다마수크(다마스쿠스)라는 지명으로 “물이 풍부한 거주지”를 뜻합니다.
이러한 히브리어를 대비하여 보면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하던 사울이 자신을 낮추어 바울이 되자 생명이 가득한 곳에서 빛이신 성령을 보았다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빛이신 성령을 본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한거지요.
액면대로 보면 예수님이 나타나 바울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의 육신 안에 내재한 성령이 나타나서(드러나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5절을 보게 되면 예수께서 바울이 차고 대항하여 찌르기 때문에 힘들다고 기록하고 있는데(it is hard for thee to kick against the pricks) 이 말씀은 바울이 성령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믿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따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때껏 바울이 물질적인 판단 하에 하나님을 믿고 있었으므로 성령을 드러낼 수 없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바울이 빛이신 성령을 보게 되었으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 된 인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을 통해 확인한바가 있지요.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막9:2)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막9:3)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막9:4)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눅9:28)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9)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눅9:30)
빛(성령)의 몸으로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는 엿새 후라고 기록했으나 누가는 팔일쯤이라고 기록해 놓았지요.
이렇게 차이가 나게 기록된 이유는 이 장면을 액면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깊은 묵상 중에 영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본 것도 깊은 기도 중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바울의 내면에서 일어난 영적체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여기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행9:10)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행9:11)
And the Lord said unto him, Arise, and go into the street which is called Straight, and enquire in the house of Judas for one called Saul, of Tarsus: for, behold, he prayeth,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행9:12)
아나니아의 뜻은 야훼는 은혜로우시다', '야훼께서 나타나심', '야훼께서 보호하심'입니다.
11절에 나오는 직가는 곧은길로서(the street which is called Straight) 내면으로 직통하는 길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유대인들 중에 다소사람 사울에게 야훼가 나타나셨다는 말이 됩니다.
아마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내말을 믿지 않을 것이며 액면대로 받아들여 아나니아라는 예수님 제자가 성령이신 예수를 보고난 후 눈이 멀게 된 바울을 안수 끝에 눈을 보게 만들었다 말할 겁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얼마든지 자유로우나 다만 한 가지는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 바울이 본 것이 내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액면대로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목회자들 및 크리스천들은 영생을 얻을 사람이 단한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는 거지요.
바울과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신 예수가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본인들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거나 예수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였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빛이고 성령이신 예수님을 본이들은 많지만 본인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함부로 심판한 까닭이라는 사실만 말해두겠습니다.
나라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이켜 좀 더 겸손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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