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배가번드 2023. 8. 8.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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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을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 혼란을 겪게 되고 성경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가끔씩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면 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접하게 되지요.

최근에 내가 만난 인터넷서퍼의 질문은 우리가 성경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자신의 마누라가 같은 교회에 다니는 형제와 바람이 났는데도 용서해야하는가 이었는데 이 같은 질문의 배경은 성경의 다음말씀에 근거한 겁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Then came Peter to him, and said, Lord, how oft shall my brother sin against me, and I forgive him? till seven times?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2)

Jesus saith unto him, I say not unto thee,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눈여겨 봐야할 점은 형제라는 단어입니다.

21절에 나오는 형제는 혈육 간의 형제가 아니라 영적인 형제, 즉 하나님의 다 같은 형제를 뜻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깨어난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과 연결된 형제와 같기에 이런 표현을 한 겁니다.

언뜻 생각해보면 이 내용은 상당히 불합리한 말씀이며 실생활에서 적용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성령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이며 당연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것은 진정 성령이 깨어나거나 성령에 대해 알고 있다면 형제의 마누라와 바람피우지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며 성령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하지만 성령에 대해 알고 있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바람을 피운 형제나 마누라의 내면에도 하나님이신 성령이 있음을 압니다.

다만 그들이 아직 성령이 깨어나지 못해서 육적인 인식에 머물고 있음을 알기에 괘씸하게 여기기보다 불쌍하게 여깁니다.

아직은 영생을 얻기가 어렵고 세상경험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점을 알기에 놓아주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아마 어떤 이들은 용서한다면 다시 데리고 살아야지 헤어져서는 안 된다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실수라는 것은 한두 번으로 끝나야지 거듭된다면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행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이신 성령에 대해 모를 뿐 아니라 상대방의 내면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네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행동을 용서해야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만드는 거지요.

이런 식이 아니라면 회개하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짚어 봐야할 것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지요.

성경에 기록된 숫자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으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7이라는 숫자의 뜻을 알아야합니다.

7은 완성의 숫자이자 창조의 한주기를 뜻하며 창조의 역사를 끝마친 하나님의 안식일을 가리킵니다.

또한 삼위일체(3)하나님이 인간(4=사람을 가리키는 숫자)과 합하여져(3+4=7) 완전해진 상태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진정 성령과 하나 되었다면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진정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맞기는 하지만 과연 용서의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는지요.

용서의 사전적 의미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해 벌하거나 꾸짖지 않고 덮어준다고 하는데 어째서 바람난 배우자와 다시 살아야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건지 의아하다는 말입니다.

잘못을 묻지 않고 서로 따로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일인데 어째서 용서를 증명하기위해 함께 살아야하는 건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배우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함께 살기를 원하고 나또한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재결합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둘 중에 어느 한사람이라도 원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함께 살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에는 용서와 사랑을 구분지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용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사랑은 억지로 할 수 없다는 거지요.

상대방의 잘못을 묻지 않고 덮어주는 것이 쉬운 이유는 상대방의 잘못까지도 내 잘못으로 여기는지라 새삼스럽게 용서를 들먹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반복된 잘못으로 인해 식어버린 사랑은 다시 불붙이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이것은 육신적인 사랑으로 신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어서 함께 살고 떨어져 사는 것을 구분 짓지 않지요.

함께 살면 함께 사는 대로 그러한 법도에 맞게 처신해야하며 혼자 살면 혼자 사는 대로 그 법도에 맞게 살아가면 됩니다.

결혼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배우자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하며 혼자 살면 배우자가 바람날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배우자에 대한 책임과 의무감을 다하지 못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이지만 사랑까지 강요할 권리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배우자의 바람을 묵인하고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깨어나야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용서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람에게는 용서할 권리가 있지 않으며 심판할 권리조차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내가 말로서 나에게 죄지은 이에게 용서한다고 말해주어도 상대방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는 이상 죗값은 반드시 치르게 되어있다는 말이지요.

진정으로 용서가 이루어지려면 육신의 말로서 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용서가 이루어져야하는 겁니다.

이렇기 때문에 회개와 용서는 짝을 이루는 것이며 참회가 없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잠시 접어둔 장부책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고 상대방에게 사과를 했다면 용서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용서를 받고 난후 같은 잘못을 또다시 저지른다면 앞서 용서받은 것은 무효가 됩니다.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를 했다면 똑같은 잘못을 또다시 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누군가는 똑같은 사람에게 같은 잘못을 한 것이 아니므로 앞의 용서는 유효해야한다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타인을 용서해야한다는 주기도문을 볼 때 동일한 사람을 상대로 거듭 죄를 범하지 않더라도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은 죄에다 죄를 더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제대로 주고받으려면 성령이 깨어나야 합니다.

 

용서해주고 받아본 이들은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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