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시간에 참석하신여러분 축하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이곳을 탈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비처럼 내리는 것을 보았는지라 인사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몇몇 분은 성령의 존재를 확실히 느끼고 있으며 나 홀로목사와 내면적으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자신들이 문득 나 홀로목사를 떠올릴 때 저 역시 그분들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연유입니다.
구태여 만나지 않더라도 이 같은 일이 가능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갈망하는가에 대한 문제이지요.
비록 육신을 달리하고 있지만 내면으로는 성령으로서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성경을 통해 이 같은 일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눅9:1)
Then he called his twelve disciples together, and gave them power and authority over all devils, and to cure diseases.
over all devils에 대한 해석은 귀신을 제어한다는 것보다 귀신을 극복하거나 넘어선다는 표현이 더나을듯합니다.
지난시간 보았듯이 우리들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잘못된 인식들을 귀신들린 것이라 생각하게 되면 그런 상태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 옳은 해석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병을 고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할 정도(12제자)의 인식에 도달한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거지요.
다음구절을 보면 나 홀로목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눅9:2)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9:3)
And he said unto them, Take nothing for your journey, neither staves, nor scrip, neither bread, neither money; neither have two coats apiece.
지난시간 보았던 혈루병(성령을 갈망하는 자)환자나 딸(성령)이 병들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러(낫게 하려) 12제자들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예수님 제자 중 연합된(12)이들이 하나님(예수님)으로부터 천국복음을 전해줄(성령을 깨닫게 해 줄, 병을 치료할)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하셨습니다.(Take nothing for your journey)
지팡이나 주머니는 물론이고 심지어 빵과 돈, 두벌 옷도 가지지 마라셨지요.
아무래도 이 내용은 뭔가 특별한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하려면 지팡이나 가방은 필수품이며 여분의 돈과 옷은 있어야 할 텐데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은 뭔가 심오한 뜻이 담겨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는 이 내용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보았습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막6:8)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10:10)
Nor scrip for your journey, neither two coats, neither shoes, nor yet staves: for the workman is worthy of his meat.
먼저 마가는 지팡이만 가지고 다른 것은 가지지 말라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다른 것은 물론 지팡이조차도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여행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야하는 이유가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적인 일을 물질적으로 해석하다보니 일어난 오류로서 meat를 고기로 해석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문맥의 흐름상 meat는 고기보다는 골자, 알맹이라는 뜻을 적용시켜야 마땅합니다.
이런 뜻을 적용시키게 되면 일꾼(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은 그의 알맹이(내면, 영 혼)가 값어치 있기 때문에(for the workman is worthy of his meat)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가복음에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 어떤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며 심판을 상징하는데 하나님 일을 하러(복음전파) 떠나는 이가 하나님의 권능(성령)외에 무엇이 필요한가입니다.
따라서 누가가 두벌 옷을 가지지 말라 기록한 것도 영적인 비유의 말씀으로 성령을 깨달은 사람은 의(義)의 옷 한 벌만 필요하고 세상의 의복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겁니다.
이제 이해가 되셨으리라 생각하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눅9:4)
이 또한 영적인 말씀으로서 성령의 입장에서 말씀하신내용입니다.
여기에서의 집은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는 사람의 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말씀(천국복음)을 전해주는 것을 성령을 임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의식으로 볼 때 사람(집)에게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다가(유하다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성령이 심어지지 않으면, 영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떠나라는 거지요.
여러분이 이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다음구절을 보면 이해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눅9:5)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눅9:6)
하나님(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의 일깨움을 전수받은(나누어받음) 제자들 역시 성령을 나누어줄 능력을 가졌기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연히 돌아서야겠지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으라 했을까요.
먼지를 턴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도 없고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지도 않는 말을 왜 했을 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내용은 비유의 말씀으로 성령은 먼지하나 묻지 않는 순수하고 깨끗함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나타내보이기위해 기록된 것이 맞는 겁니다.(5절)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나누어받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칠 수 있었던 거지요.(6절)
이렇게 사람들에게 영적인 치유(가르침)를 통해 성령을 되살리는 임무를 행하자 소식이 널리 퍼져나갔던가 봅니다.
누군가 이 소식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눅9:7)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눅9:8)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눅9:9)
예문과 동일한 내용을 마태복음 22편과 마가복음 8편에서 다루었습니다.
누가와는 달리 마태오도 마가도 이 내용을 길게 기록하고 있지요.
헤롯과 요한에 얽힌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통해 충분히 했던 만큼 그곳을 방문하여 알아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누가의 의도만 살펴보겠습니다.
6절까지의 내용을 보게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나누어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7~9절까지의 내용도 그 연장선상에 놓인 이야기로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먼저 7절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한 것은 영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말로서 영을 모르는 사람(영이 죽은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 성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영이 되살아나는(요한이 되살아남) 것을 비유한 거지요.
이는 영의 세계가 너와나의 경계를 벗어나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8절에 엘리야가 등장하고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되살아난 것으로 묘사한 겁니다.
그리고 마가는 9절에서 헤롯의 입을 통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요한(육신)을 자신이 목을 베어죽였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느냐는 말을 함으로서 성령이 육신과는 완전히 별개라는 사실을 말해놓은 거지요.(육신은 죽어도 영은 죽지 않는다는 점)
또한 성령이 드러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나누어줄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한다는 사실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헤롯(영웅의 아들)조차 예수님을 갈망했다고 기록한 겁니다.
정말 너무나 기쁜 소식이지 않습니까.
성령이 드러난 사람을 만나면 성령을 나누어 받을 수(되살릴 수) 있다고 하니까요.
그러면 성경 속으로 들어가 성령이 완전히 드러난 예수님을 만나보겠습니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눅9:10)
And the apostles, when they were returned, told him all that they had done. And he took them, and went aside privately into a desert place belonging to the city called Bethsaida.
액면으로 보면 성령을 나누어받은 사도들이 그들의 업적을 예수님께 고하자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간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사도들을 따로 은밀하게 데리고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he took them, and went aside privately)
이렇게 은밀하게 따로 간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장소일 것이니 뒤에 a desert place가 단순하게 사막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렇다면 desert는 사막이 아니라 공과, 공적, 상 받을 만한자격 등으로 해석되어야합니다.
뱃새다가 “고기잡이의집, 사냥꾼의 집”이라는 뜻임을 볼 때 예수님께서 사도(성령을 나누어받은)들을 물질세계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영적인 그물로 잡아들일 자격(상)을 주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할 내용이 이어지고 있으니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눅9:11)
비밀리에 몇 사람(사도들)에게만 성령을 나누어주었으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일에(성령을 나누어주는, 깨달음을 주는) 대해 알고서 따라왔다고 했지요.
사도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따랐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했으며 그들에게도 천국에 대해 말해주고 잘못된 인식들을 고쳐주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요즘으로 말하면 대집회를 열었던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나 홀로목사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날이 저물어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눅9:12)
And when the day began to wear away, then came the twelve, and said unto him, Send the multitude away, that they may go into the towns and country round about, and lodge, and get victuals: for we are here in a desert place.
12절에도 12라는 숫자가 나오고 있는데 이들이 성령을 나누어받은 제자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말하길 무리를 돌려보낼 것을 권했는데(said unto him, Send the multitude away) 그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자신들이(하나님과 연합된 제자) 있는 곳이 상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머무는 곳이기에(for we are here in a desert place) 일반인들이 올수 없다는 거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눅9:13)
예수께서 모여든 무리들이 자격을 갖추게 너희들(제자들)이 성령(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했는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7이라는 숫자를 나타내기위한 설정된 문장입니다.
7은 인간의 숫자4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는 숫자3이 합하여진 수로서 창조의 일주기(일주일 만에 우주만물을 창조)를 나타내며 일시적으로 완전한 숫자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창조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집회(모임)에 참석한 이들을 위해 하나님과의 연합되는 의식(거듭남)이 행해졌음을 이렇게 비유한 겁니다.
그러면 나 홀로목사 말이 맞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봅시다.
이는 남자가 한 오천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명씩 앉히라 하시니(눅9:14)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눅9:15)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눅9:16)
Then he took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es, and looking up to heaven, he blessed them, and brake, and gave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multitude.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두니라(눅9:17)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된 예수님이 이 의식(3위 일체 하나님+사람4=새로운 창조7)을 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looking up to heaven, he blessed them)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나누어받은 제자들 역시 권능의 힘을 부여받았기에 무리에게 성령을 나누어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gave to the disciples to set before the multitude)
그렇기 때문에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의식을 행할 수 있었으며 완전히 연합된 사람들을(12광주리) 거두어들일 수 있었던 겁니다.
동일한 내용을 마태복음 22편과 마가복음9편에서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해석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나 홀로목사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때는 그만큼 열어주시고 이번에는 이만큼 지혜를 열어주신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일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의 수준에 의한 것이기도 한데 자신들이 소화 시킬 만큼 주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의 영적수준이 업그레이드된 탓인가 봅니다.
어찌되었건 여러분 덕에 나 홀로목사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가라사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눅9:18)
And it came to pass, as he was alone praying, his disciples were with him: and he asked them, saying, Whom say the people that I am?
대답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눅9: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눅9:20)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눅9:21)
18절은 조금 이상합니다.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as he was alone praying) 해놓고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고(his disciples were with him) 했지요.
그저 처음부터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라고 해버리면 간단할 것을 왜 이렇게 했겠냐는 겁니다.
그이유가 19절에 나옵니다.
예수님더러 요한이라는 사람도 있고 엘리야라는 사람도 있으며 더러는 선지자중에 하나가 되살아났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 것은 성령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7~9절에서 설명을 했듯이 성령은 빛의 세계에 속해있음으로 육과 달리 제한받지 않는다는 거지요.
요한은 예수님과 동시대인물이고 엘리야는 구약속의 선지자임으로 육적으로 보자면 엄연히 다른 사람입니다.
하지만 빛의 세계에서는 하나이지요.
이런 이유로 누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고 기록했던 겁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인지라 육신으로는 따로 있어도 영적으로는 함께 있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20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말했던 거지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메시아를 뜻합니다.
21절에 예수가 메시아라는 베드로의 말에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 한 것은 18~21절 내용전체를 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그만큼 이 내용이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막연하게 성령을 나누어준다 말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야겠지요.
예수님이 해주시는 말씀 속에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되니 경청해보겠습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눅9:22)
Saying,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of the elders and chief priests and scribes, and be slain, and be raised the third day.
시작부분에 인자라고 쓴 것은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자를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다르지는 않지만 그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과 마찬가지인지라 고통과는 무관한 존재이지만 인간의 몸 안에 거하게 되면 고통 받는다는 것을 말하기위해 사람의 아들, 즉 인자(The Son of man)라는 문장을 쓴 겁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령은 고통 받지 않지만 육신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고난과 고통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내용은 누가가 과거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에게 성령을 깨닫는 방법에 대해 말해주고자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가 성경을 기록할 시점으로 보자면 십자가사건은 미래예언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거지요.
따라서 삼일 만에 부활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우리 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되살아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삼일은 3이라는 숫자를 말하기위해 언급이 된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나님(성부)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과 연합된 이들(자격을 갖춘 이)의 몸(성자)을 통해 성령(성신)으로 임하시게 되는 과정을 비유한 거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과정일 뿐 세부적인 방법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다음내용에는 좀 더 상세한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실 것 같습니다.
함께 보시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예상대로 방법을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이라 한 것은 하나님(예수님)과 하나 되는 법을 알려거든 이라는 말이며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육신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들을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하나님이 주시는 임무)로 여기라는 것이며 나를 좇으라는 말은 육신의 예수가 아니라 성령을 따르라는 겁니다.
다음구절에 여기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으니 확인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For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the same shall save it.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9:25)
For what is a man advantaged, if he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mself, or be cast away?
직역을 해보면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구하고자하면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고(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나를 위하는 것 때문에 삶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the same shall save it)
그러면 여기에서 그것은(it) 무엇일까요?(24절)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예수님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야한다 말하기도하며 실지로 죽음을 불사하여 전쟁에 나서기도하지요.
또한 일부종교에서는 자신들의 교주라고 말하기도 하는가 하면 특정종파에서는 자신들 교회목사님이 재림예수라며 몸과 돈을 모두 바쳐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모두가 성경을 잘못해석한데서 오는 오류들입니다.
이러한 세간의 잘못된 믿음을 경계하기위해 누가는 25절을 기록해놓은 겁니다.
25절을 직역해보면 그가 만일 천하를 얻고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뺏기게 되면(if he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mself, or be cast away) 그 사람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이냐 입니다.(what is a man advantaged)
24절에 그것이(it) 만약 육신의 예수님일 것 같으면 예수님을 위해 죽어버릴 경우 25절에 그 사람에게 이익 될 일이 없다고 말한 내용에 相衝(상충)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라고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이라고 봐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대비해보면 어떻게 해석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육신)을 구하고자하면 (성령을) 잃을것이요 누구든지 나(성령으로서의 예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성령을) 얻을 것이다(save it).(24절)
사람(육신의 자아)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진아, 성령을)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정도로 말해주는데도 깨닫지 못하면 노답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며 다음구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9:26)
For whosoever shall be ashamed of me and of my words, of him shall the Son of man be ashamed, when he shall come in his own glory, and in his Father's, and of the holy angels.(KJV)
자!
여러분!
이 내용은 너무나 중요함으로 세밀하게 분석해봐야 합니다.
처음 도입부분에 누구든지 내말(예수님)을 부끄러워하면 까지는 틀린바가 없는데 그다음부터는 조금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직역을 해보면 인자의 부끄러움이 주어진다고 했고(of him shall the Son of man be ashamed) 그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이 그자신의 영광으로 올 때라고 했습니다.(when he shall come in his own glory, and in his Father's, and of the holy angels)
얼핏 보면 본문내용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가 누구냐는 겁니다.
그는 바로 인자를 말하는데 여기에서의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 즉 육신을 가지고 성령을 깨닫게 되길 원하는 구도자 모두를 지칭하는 거지요.
그리고 뒷부분에 아버지는 성부, 거룩한 천사들은 성령, 그자신은 성자로 해석되어야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를 적용하여 해석을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예수님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거부하면) 인자(구도자)도 자기(성자)와 아버지(성부)와 거룩한 천사들(성신)의 영광으로 올 때에(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성령)을 부끄러워하리라(거부하리라)
하나님(성부)이 사람(성자)의 몸 안에 성령(성신)으로 임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 이 내용을 깨닫는 것이 워낙 중요함으로 누가는 이렇게나 복잡하게 꼬아놓았습니다.
아마도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 가운데는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껏 교회에서는 인자를 예수님이라고만 가르쳐 왔으니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해보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눅9:27)
But I tell you of a truth, there be some standing here, which shall not taste of death, till they see the kingdom of God.
예수님께서 유일한 인자라고 할 경우에는 이 같은 말은 성립이 되지 않지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자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되는데 뭣 하러 또다시 하나님나라를 볼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독생자이라면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필요가 없지요.
성경을 통해 예수님가르침을 배우는 이유는 예수를 숭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우리 몸 안에 성령으로 되살아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르침은 이러한 목적 외에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고 제한된 지면이 모두 찬 것 같으니 여기에서 오늘의 강해를 마치고 다음시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