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누가복음15.

배가번드 2021. 3. 4.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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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축복이 봄 햇살처럼 따사롭게 내려오는 날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시간에 오신여러분 환영합니다.

변함없이 참석하시는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 가족들에게는 평화가 함께 하길 기원하며 누가복음 10장의 문을 엽니다.

급하게 진행되는 성경강해인지라 내용이 부실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만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나 홀로목사 입을 통해 말씀하시고 여러분 귀를 통해 듣게 만들 것인지라 믿음으로 걱정을 극복하고 굳건하게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시작에 앞서 오늘은 여러분께 성경에 나오는 숫자의 뜻에 대해 말씀 드릴까 합니다.

본문을 통해 가끔씩 언급하고는 있습니다만 간혹 오해하시는 분들을 위해 또 아시는 분들은 한 번 더 되새기자는 의미입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1은 절대자 하나님이자 성부를 가리킵니다.

2는 하나님의 대상이자 증인인 성자,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는 숫자이자 성부이신 하나님이 성자의 몸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입니다.

또한 3은 육신이 죽어진 후 성령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4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담고 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1+3=4)

5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사람(4)에게 더해지는(+1) 책임과 의무를 나타내는 숫자이며 6은 사람의 숫자로서 하나님이 6일째 만들어낸 피조물이자 삼위일체(3) 하나님을 담은 사람이 부활(3)을 통해 거듭남을 의미하지요.

7은 완전한 숫자로서 삼위일체(3) 하나님과 사람(4)이 합을 이룬 상태에서 절대 나누어지지 않는 불가분의 관계를 뜻합니다.

8은 예수님이 안식일 이후 부활하셨음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9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한(3×3) 숫자로서 영혼의 무결함과 성령의 완전함을 말해줍니다.

10은 십진법에 의한 꽉 찬 숫자로서 인간의 완전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10은 고대 유대사회에 전해 내려오는 비밀교의인 카발라에 의거한 숫자로서 인간완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간단하게나마 성경에 인용된 숫자의 뜻을 알아보았는데 나 홀로목사가 이렇게 숫자의 뜻을 말하게 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더욱 크게 가지시라는 뜻에서입니다.

여러분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삶에서 마주하는 숫자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담겨있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믿음과 직접적인 연관 있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만 이미 성경으로 하나 된 우리들인지라 성경속의 숫자는 우리에게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같은 점을 깨닫고 성령과 하나 됨의 영광을 하루빨리 얻으시길 바라며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10:1)

After these things the LORD appointed other seventy also, and sent them two and two before his face into every city and place, whither he himself would come.

칠십인에서의 칠은 창조의 한주기를 나타내는 숫자이며 십은(10) 완성된 인간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 완성된 인간, 즉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복음을 전파하러 나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의 위치라기보다 하나님자신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완전히 드러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 된 분인지라 성령이라 해도 맞고 하나님이라고 해도 맞으며 성자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다만 이 내용은 누가가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 되는 가르침을 주고자한 것이므로 하나님으로 봐야한다는 거지요.

예수님이 가시려는 곳으로 둘씩 보낸다는 것은 하나님(성령)이 임하시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성부이신 하나님(1)이 성자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임하시는 것으로 볼 때 둘(2) = 1(성자로서의 구도자의 몸)+1(성령을 갈망하는 마음이자 작은 성령의 불씨)입니다.

하나님(1)+구도자(2)=3(삼위일체 하나님)

이제 예수님께서 칠십 명을 보낸 것이 아님을 아셨으리라 믿고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10:2)

Therefore said he unto them, The harvest truly is great, but the labourers are few: pray ye therefore the Lord of the harvest, that he would send forth labourers into his harvest.

 

추수할 것이 많다고 했지만 직역해보면 진정한 수확물이 많다 입니다.(The harvest truly is great)

사람들마다 성령을 담고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하나 됨을 얻을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지요.

그들이 진정 원하기만 하면 거두어들여야 할 수확물과 마찬가지인데 막상 그러한 일을 하려면 자신이 먼저 성령을 깨달아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하나 된 이들이 적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제자들이(2) 기도를 통해 하나님(1)의 역사하심이 이루어지길 원하라는 말씀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2+1=3)

이러한 까닭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10:3)

 

아직은 완전치 못한 제자들인지라 이렇게 부탁하신 것 같은데 구도의 길(성직자의길)을 걸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는지 보도록 하지요.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10:4)

Carry neither purse, nor scrip, nor shoes: and salute no man by the way.

 

이 비슷한 말씀을 9(1~6)에서 보았는데 이번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길에서 만난 누구에게도 인사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salute no man by the way)이 말씀은 하나님말씀을 전하는 이는 하나님의 대변인인지라 누구에게 함부로 고개를 숙여 절을(salute) 하거나 굽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일은 이 말이 육신적으로 누구에게도 인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뒤에 by the way라는 단서를 넣어놓은 것은 도의 길에서 만난 이에게 함부로 절을 하지 말라는 뜻이라는 거지요.

달리 표현하자면 복음을 전파하러 나선이상 이들은 이제 육신이 아니라 성령의 입장에서 행동해야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한 이유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10:5)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 오리라(10:6)

And if the son of peace be there, your peace shall rest upon it: if not, it shall turn to you again.

 

5절을 보시다시피 성령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지요.

평안할지어다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령의 입장에서 사람들(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으로 그들이 축복(평안=복음=성령)을 받아들인다면 축복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6절 서두에 만약 평안의 아들이 그곳에 있으면(if the son of peace be there)이라고 한 것은 사람에게 심어져있는 기본적인 영혼(성령)이 깨어난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평안은 성령으로 바뀌어도 되고 하나님으로 바뀌어도 무방합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 내면에서 반응을 하기 때문이지요.

내면은 이미 성령으로 통해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한 형제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해주십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10:7)

And in the same house remain, eating and drinking such things as they give: for the labourer is worthy of his hire. Go not from house to house.

 

같은 집에 머물라는 말은 평안의 아들의 집과 같은 집이라는 뜻이지요.(in the same house remain)

이런 사람은 성령을 나누어받은 형제인지라 물질적으로 신세를 진다해서 안 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알고 보면 하나님이 이들을 깨닫게 만들어주기 위해 고용한 것이나 다름없음으로 그들의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라는 겁니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집이 아니라 평안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기위해 일부러 삽입된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비유의 말씀임을 알라는 뜻이지요.

다음내용을 보게 되면 여기에 대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10:8)

And into whatsoever city ye enter, and they receive you, eat such things as are set before you: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10:9)

And heal the sick that are therein, and say unto them, The kingdom of God is come nigh unto you.

 

7절에서 집이 금방 동네로 바뀌어있지요.

말씀드린 데로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증거로서 동네라는 단어가 쓰인 것이며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이 제공하는 무엇이든지 취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8)

다만 단서가 달린 것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너희를 영접하거든(they receive you) 이지요.

그들이 믿음을 가졌거든 복음을 전하여 잘못된 인식을 고쳐주고(heal the sick that are therein) 하나님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이 지혜롭다 생각되는 것은 믿지도 않는 사람에게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도 없을뿐더러 부작용만 심할 것임으로 자질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만 말씀을 전하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무작정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당기는 일은 그렇게 권장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만드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또 어떤 가르침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10:10)

But into whatsoever city ye enter, and they receive you not, go your ways out into the streets of the same, and say,

 

이 내용은 참 재미있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글성경은 육신적인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직역을 해보면 이 같은 일은 명확해집니다.

go your ways out은 가라 너의 길을 벗어나서, into the streets of the same은 들어갔던 같은 거리이지요.

합쳐보면 네가 들어갔던 그 길을 벗어나서 말하라가 됩니다.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갔는데 받아들이지 않거든 그길(복음의 길, 영생의 길)을 벗어나서 외치라는 말이지요.

다음내용을 보게 되면 좀 더 가슴에 와 닿는 무엇인가가 있을 겁니다.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줄을 알라 하라(10:11)

 

성령이 깨어난 사람들은 세상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달리말해서 당신들은(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성령과 어떤 인연도 가지지 못했음을 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눈앞에 성령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놓쳐 버린 줄 알라는 뜻으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했습니다.

비록 당신들이 기회를 발로 차버려서 성령을 깨달을 수는 없지만 성령은 당신 안에서 잠자고 있다는 뜻이지요.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이렇게까지 말하라 했을까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0:12)

 

저 날이란 멸망의 날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람이 죽음에 임하였을 때입니다.

소돔은 다들 아시다시피 유황과 불로서 심판받은 도시이지요.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격인 소돔의 뜻은 에워싸인 곳입니다.

동성애를 뜻하는 소도미의 어원이기도한 소돔은 물질 세상에 둘러싸인 사람의 마음이자 영혼을 뜻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돔을 막연하게 타락한 도시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소돔의 멸망보다 자신들의 영혼을 걱정하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하라 했던 거지요.

성경에 기록된 소돔이라는 도시의 일보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죽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라는 말입니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자신이 죽어버리면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특히 영혼의 죽음이란 영원한 멸망이기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덧붙여서 말하라고 시킵니다.

 

화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10:13)

Woe unto thee, Chorazin! woe unto thee, Bethsaida! for if the mighty works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which have been done in you, they had a great while ago repented, sitting in sackcloth and ashes.

 

13절에 두로와 시돈은 이방을 대표하는 곳으로 지중해연안에 위치한 이방의 도시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손길이(the mighty works had been done)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데 불구하고 천국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만약 도로와 시돈에서(이방인에게) 그런 기적을 행사했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했을 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마지막 부분은 약간의 수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다는 말은 액면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화장당한 영혼이 자신의 주검위에 앉은 것으로 해석해야합니다.

시체를 삼베로 둘러싸서 화장을 했기에 이렇게 묘사한 거지요.(in sackcloth and ashes)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볼 때 회개의 중요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죽음에는 화가 미친다고 합니다.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0:14)

But it sha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at the judgment, than for you.

 

비록 자신들이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민족(고라신, 벳새다)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두로와 시돈(이방인)보다 더욱 심한 죽음(심판 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분들은 이 내용을 두고 비합리적이고 공평하지 못함을 지적할지 모르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합리적이고 공평한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체 죽음을 맞이하는지라 육신이 화장당할 때 영혼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겠지만(육은 땅으로 혼백은 공중에 흩어짐)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죽음과 함께 영혼이 심판의 하늘에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10:15)

And thou, Capernaum, which art exalted to heaven, shalt be thrust down to hell.

 

가버나움은 알려진 대로 나훔의 마을입니다.

나훔의 뜻이 위로, 동정이라는 사실을 볼 때 가버나움은 예로부터 영적인 고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데로 고라신과 벳새다처럼 가버나움도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자부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늘에 닿지 못하고 음부에까지 낮아질 수도 있다(shalt be thrust down to hell) 하신 것은 그들이 그동안 잘못된 믿음아래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이 주어지기(위로, 동정) 마련이고 그로인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이 생기는지라 이를 경계하라는 거지요.

자부심은 종종 자만심으로 바뀌어 엄청난 에고를 발휘하여 제대로 된 가르침조차 거부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그야말로 중요합니다.

다음말씀을 들어보면 왜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무서운 저주의 말씀까지 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0:16)

He that heareth you heareth me; and he that despiseth you despiseth me; and he that despiseth me despiseth him that sent me.

 

성령을 나누어받은 제자들 말을 듣는 이는 성령이신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제자들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시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16절 마지막부분에 사용된 단어 despiseth에 대해서는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문에는 올리지 않았지만 한글성경은 NIV를 번역한 탓에 이렇게 해석된 겁니다.

그러나 원문에 가까운 KJV은 경멸과 멸시, 무시, 업신여김을 뜻하는 despiseth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의미로 재탄생된 번역문을 나 홀로목사가 말해보겠습니다.

너희(성령을 나누어받은)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성령)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무시하는 자는 곧 나를 무시하는 것이요 나를 무시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하나님, 성령)를 무시하는 것이라 하시니라

무시라는 단어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 의미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한글성경을 보면 제자들 말이나 예수님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치 지옥에 갈 것처럼 여기게 되지요.

하지만 무시라는 단어를 적용한 내용을 보게 되면 성령을 나누어받은 제자들이나 예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하나님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15절 내용도 음부에까지 낮아질 거라는 저주의 말이 아니라 경고의 말씀이 되는 거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성령에 대해 깨닫게 되면 하늘에 닿을 것이요 그렇지 못할 경우 잘못하면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메시지로 여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할지라도 성령을 깨닫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왜 이렇게 중요한지 예수님 제자들의 입을 통해 들어봅시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0:17)

And the seventy returned again with joy, saying, Lord, even the devils are subject unto us through thy name.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0:18)

And he said unto them, I beheld Satan as lightning fall from heaven.

 

17절에 귀신들도 항복했다는(the devils are subject unto us) 말은 종속된 것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18절에 예수님께서 사단(귀신)의 실체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천국으로부터 번개처럼 떨어진 존재라는(Satan as lightning fall from heaven) 말은 원래 사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사람의 잘못된 인식 속으로 들어가 귀신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사람이 성령(하나님)에 대해 잘못알고 왜곡된 가르침을 받아들인 탓에 자신의 영혼을 성령으로 되살리지(부활) 못하고 귀신으로 만들어놓았다는 말이지요.

이런 상태에(귀신들린) 놓인 사람들에게(귀신들린) 성령을 나누어받은 제자들이 제대로 된 가르침을 전하자 많은 이들이 성령과 하나 되는 영광을 누렸다는 것을 항복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나 홀로목사는 종속되었다고 해야 옳은 해석이다 주장하는 거지요.

이해가 가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엄청난 비밀이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해가 가든 안 가든 진도는 나가야겠기에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10:19)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10:20)

Notwithstanding in this rejoice not, that the spirits are subject unto you; but rather rejoice, because your names are written in heaven.

 

그런데 몇 가지 단서가 붙었습니다.

성령을 나누어주는 예수님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에게는 권세가 주어지는데 뱀과 전갈을 밟아도 괜찮고 원수의 능력도 넘어서는 힘이 주어지며 누구도 해칠 수 없다고 했지요.

바꾸어 말하자면 이런 능력이 없다면 성령을 나누어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몇몇 분은 19절 말씀에 실망을 했을 겁니다.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없으면 성령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으니 누구도 감히 이렇다고 장담하지 못할 것인지라 실망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20절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Notwithstanding)라는 단어를 통하여 반전이 일어납니다.

앞 구절에서 말한 모든 능력이 생겨도 기뻐할 것이 아니라 천국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했습니다.

이 말씀인즉 성령은 육신적인 일과는 전혀 무관한 존재라는 말이며 육적이고 물질적인 능력 따위는 천국 가는데(영생을 얻는데, 성령을 깨닫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성령을 깨닫거나 성령을 깨달은 이를 만나 성령을 나누어받을 경우 천국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지요.

여러분이 이 말씀을 얼마나 제대로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나 홀로목사는 춤을 추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찮은 내 인생에서 이런 큰 기쁨을 맛보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어찌 찬송하지 않을 수 있으며 춤을 추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달렸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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