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나날이 봄기운이 피부가까이 느껴지고 있는 요즘의 날씨처럼 영생의 하늘도 점점 더 우리에게로 내려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래 들어 천상의 음악소리가 뚜렷하게 들리고 있는 점을 볼 때 많은 이들이 천상과 맞닿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게 기쁜 일이 주어지다보니 나 홀로목사의 마음이 무척 바빠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인사말을 짧게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려합니다.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 곧바로 성경 속으로 뛰어들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눅9:28)
8이라는 숫자는 부활의 숫자입니다.
안식일후 첫째 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뜻하는 8은 또한 성령으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내기위해 누가가 의도적으로 쓴 숫자이기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기도했다고 한 것은 성령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이지요.
제자들 역시 성령과 하나 되어 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9)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눅9:30)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눅9:31)
Who appeared in glory, and spake of his decease which he should accomplish at Jerusalem.
성령이 드러난 사람을 알아보려면 영안(靈安)이 열려야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기록한 겁니다.(29절)
또한 시대를 달리한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를 등장시킨 것은 성령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30절)
성령과 하나 됨은 가장 큰 영광이라는 말이며 육신(에고)이 죽어져야 영적인 완성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예수의 죽음에 비유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처를 뜻하니 예수님의 육적사망은 영적완성을 뜻하지요.(his decease which he should accomplish at Jerusalem)(31절)
액면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예언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 내용은 누가가 예수님십자가 사건을 영적인 의미로 재조명 한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만약 이것을 예언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처럼 죽었다가 부활하지 못하면 영원한 안식(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지라 이렇게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거지요.
이런 식으로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죽은 후에도 영생을 얻지 못하고 특정한 곳에 가서 쉬다가 예수님이 육신으로 강림하실 때 부활하여 함께 들어 올림 받는다고 믿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믿음이며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만큼이라도 그러한 믿음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눅9:32)
But Peter and they that were with him were heavy with sleep: and when they were awake, they saw his glory, and the two men that stood with him.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이 몹시 졸렸다고 했는데(Peter and they that were with him were heavy with sleep) 이는 정말 잠이 왔다는 것이 아닙니다.
29절에서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했다는 사실을 볼 때 이것은 깊은 묵상(명상)을 했던 걸로 봐야합니다.
높은 의식의 세계에 올라갔음을 이렇게 표현했던 겁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들이 깨어났을 때(영안을 떴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영광 속에 머물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거지요.
다음내용은 하나님영광에 대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9:33)
And it came to pass, as they departed from him, Peter said unto Jesus, Master, it is good for us to be here: and let us make three tabernacles; one for thee, and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as: not knowing what he said.
본문내용에 나오는 초막은(tabernacle) 단순하게 집의 개념이 아니라 유대교회를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이 머무는 성소를 뜻합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말을 한 것이지요.
이것이 육적으로 해석될 것이 아닌지라 베드로가 자기가 한말을 자기가 알지 못했다고 한 겁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초막을 지어야겠다 말하는 이는 베드로의 영혼, 즉 나누어받은 성령이었고 자신의 말을 알지 못하는 이는 베드로의 육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육과 영이 분리되어봐야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니 아직 경험치 못한 분들은 그저 그런 일도 있겠거니 하고 다음내용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눅9:34)
While he thus spake, there came a cloud, and overshadowed them: and they feared as they entered into the cloud.
34절 내용은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구름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빛이 사라지게 되는 과정을 말해줍니다.
높은(산) 인식(기도)속에서는 성령과 하나 되는 영광을 누리다가 묵상에서 깨어날 때가 되어 빛이 사라지자(overshadowed them) 두려움이 생기게 된 겁니다.
영의 세계에서 육의 세계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거지요.
이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음 내용이 말해줍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눅9:35)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눅9:36)
구름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과 제자들이 분리되어있다는 것을 35절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난 것은 빛의 세계에 머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택함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이가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36절에 소리가 그치자 예수만이 보였다는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영적수준 차이를 말해줍니다.
제자들은 기도할 때만 영적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에 기도(묵상)에서 깨어났을 때는 예수님과 달랐다는 거지요.
또한 이 내용은 모세와 엘리야는 이미 영의 세계로 돌아가 버린 영적스승이었지만 예수님은 육화된 (그 당시)스승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화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봅시다.
이튿날 산에서 내려 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쌔(눅9:37)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눅9:38)
And, behold, a man of the company cried out, saying, Master, I beseech thee, look upon my son: for he is mine only child.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눅9:39)
And, lo, a spirit taketh him, and he suddenly crieth out; and it teareth him that he foameth again, and bruising him hardly departeth from him.
37절 내용은 높은 인식의 세계에서 물질세상으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38절은 조금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할 것 같습니다.
무리중의 한사람에 해당하는 영어 a man of the company를 보게 되면 뭔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왜 people 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굳이 company를 썼을까하는 것과 외아들(he is mine only child)이라는 말을 구태여 해놓았을까 입니다.
그래서 깊이 상고해본결과 동료와 단체를 뜻하는 company라는 단어를 쓴 것은 물질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영적수준이 동일하다는 뜻에서 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태초에 심어놓은 창조력을 발휘해서 아들을 낳는다 할지라도 귀신들린 자식을 낳을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기위해 외아들이라 했다는 것도 알았지요.
이런 상황을 좀 더 리얼하게 설명하기 위해 아들에게 들린 영이(a spirit taketh him) 육신을 심하게 망가트리고서야 떠난다했습니다.(39절)
이것이 바로 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영(깨끗지 못한 영)이라도 제대로 된 영(성령)이 아닌 경우에는 이렇게 귀신들림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한 해결책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눅9: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눅9:41)
And Jesus answering said, O faithless and perverse generation, how long shall I be with you, and suffer you? Bring thy son hither.
귀신들림 현상을 예수님제자들은 고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40절)
그이유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번역은 본문 내용에 심각한 오류를 발생 시킬 수 있으므로 지적을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패역에 해당하는 perverse 는 비뚤어진, 왜곡된 등의 뜻이 있으므로 비뚤어진 세대라고 해야 옳은 번역입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뚤고 왜곡되게 받아들였다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꾸짖기를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어야하며 너희를 참아야하는가를 말씀하신 겁니다.
어찌 보면 예수께서 육신으로 함께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좀 더 숙고 해보면 성령의 입장에서 말씀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마다 태초부터 심어진 성령이 함께 하고 있으나 그들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가르침을 받아들였는지라 귀신들림 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야하기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눅9:42)
And as he was yet a coming, the devil threw him down, and tare him. And Jesus rebuked the unclean spirit, and healed the child, and delivered him again to his father.
예수님께 오는 중에(as he was yet a coming) 귀신이 넘어트리고 경련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영적스승인 예수님(성령)을 만나기(깨닫기)까지 귀신이 (영적으로)넘어지게 만들고 (정신이)찢어지게(혼란스럽게, 분열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의 제대로 된 가르침(꾸짖음)을 받게 되자 낫게 되었다는 거지요.
이 같은 일이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앞서 예수님께서 비뚤어진(왜곡된) 세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42절 서두에 악마와 귀신을 뜻하는 the devil 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뒤에는 깨끗지 못한 영이라는 unclean spirit를 썼던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볼 점은 예수께서 아들을 치유해서 아비에게 돌려준 대목입니다.
이 또한 비유의 말씀으로 육신적으로 보자면 치유된 아들이 아비에게 돌아간 것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 품에 안긴 것으로 해석됩니다.(delivered him again to his father)
완전하게 된 영이 돌아갈 곳은 아버지가 계신 하나님왕국이지요.
달리표현하자면 예수님처럼 성령이 드러난 분의 가르침을 받으면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다음구절이 증명해줍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눅9:43)
예수님이 하신일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말이지요.
이런 능력을 가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셨다고 하니 들어보겠습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눅9:44)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눅9:45)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마17:23)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막9:3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제자들이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실 것을 알고 있었지요.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비밀로 붙여졌기에 되물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아마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제자들과 예수님사이에 있었던 것 같은바 언젠가는 이러한 비밀을 우리도 알 때가 올 거라 생각하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눅9:46)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눅9:47)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9:48)
이 또한 성령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육신에 초점이 맞춰진 상태에서는 높낮이가 있지만 영에 초점이 맞춰지면 높낮이나 크기의 차이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지요.
어린아이를 세운 것은 키가 작아야한다는 것을 말하고자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한다는 말이며 작은이가 크다 한 것은 육신의 보잘것없음을 알아야 영의 세계(무한대)를 깨닫게 됨을 비유한 겁니다.
정말 기가 막힌 비유의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가르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눅9:49)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눅9:50)
And Jesus said unto him, Forbid him not: for he that is not against us is for us.
이 가르침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배워야할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종파가 아니면 이단 취급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질 거라는 사실을 아신 예수님께서 미래를 예측하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위 내용은 예수라는 이름이 귀신을 내쫒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깨닫게 만들어줌으로서 잘못된 인식이 고쳐진다는 거지요.
이스라엘 사회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숱하게 많다는 사실을 볼 때 구태여 예수라는 이름에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50절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he that is not against us is for us)
비록 육신예수를 따르지 않더라도 성령을 가르친다면(귀신을 쫒는다면)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말씀이지요.
오늘날 많은 종류의 종교인들이 궁극의 목적지인 유일한 신(성령, 영생, 해탈)을 알고서 믿는다면 이름에 집착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령에 대해 알게 되면 이렇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말씀드리며 다음구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9:51)
And it came to pass, when the time was come that he should be received up, he stedfastly set his face to go to Jerusalem,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눅9:52)
And sent messengers before his face: and they went, and entered into a village of the Samaritans, to make ready for him.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눅9:53)
And they did not receive him, because his face was as though he would go to Jerusalem.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통해 누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51절을 면밀히 살펴보면 성령이 드러난 예수님 같은 분은 이미 성전에 오르기로 약정이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the time was come that he should be received up)
그래서 오로지 성전을 향해 진행해 나간다고 했지요.(he stedfastly set his face to go to Jerusalem)(51절)
그분의 목적은 오로지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깨닫게 하는데(to make ready for him) 있기에 제자들을 미리 보낸다는 말입니다.(sent messengers before his face)(52절)
하지만 성전을 향해 가고 있는 (his face was as though he would go to Jerusalem) 깨달은 예수님과는 달리 성령을 모르는 이방인(사마리아인)들은 두려움에 거부를 한다는 겁니다. (they did not receive him)(53절)
요약해서 말하자면 제자들이(messengers) 이방인들에게(사마리아인) 예수님(성령)을 받아들이게(깨닫게) 하기위해(to make ready for him) 복음을 전파하자 거부했다는 말입니다.(they did not receive him)
정말 어리석은 이들이지만 우리역시 과거에는 이러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면 예수님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까요.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
54절 내용은 엘리야가 거짓선지자를 가리기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여 불로 응답받은 내용을 비유한 겁니다.(왕상18:19~40)
하지만 이것은 제자들이 아직까지 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눅9:55)
But he turned, and rebuked them, and said, Ye know not what manner of spirit ye are of.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9:56)
For the Son of man is not come to destroy men's lives, but to save them. And they went to another village.
이 내용은 단순하게 꾸짖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영의세계를 모른다고 말한 겁니다.(55절)(Ye know not what manner of spirit ye are of)
그리고 56절은 인자가 온 것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해 주기위해 왔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영의 세계를 물질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지적한 겁니다.
사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만 아쉽게도 지면관계상 다음기회로 미루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눅9:57)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8)
누군가가 예수님을 따르겠다 말하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셨는데 이는 영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기위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어떤 이가 육신예수를 따르겠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자신의 진면목은 육신과는 별개라는 것을 말씀하신거지요.
여기에 대한 보충설명이 다음내용에 이어집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눅9:59)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60)
Jesus said unto him, Let the dead bury their dead: but go thou and preach the kingdom of God.
육신적으로 보자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사를 지내야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이를 장사케 하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라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지요.
먼저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영혼, 즉 성령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그런지라 영혼이 죽은 이들의 죽음은 똑같이 영혼이죽은 이들이 장사지내야하는 것이며 성령을 아는 이는(성령이 드러난 예수님을 따르는 이) 천국복음을 전파해야한다는 겁니다.(preach the kingdom of God.)
이 제자는 그래도 영의 세계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제자는 어떤지 보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눅9:61)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이 내용도 액면 적으로 보자면 무척 인정머리 없게 보입니다.
그래도 가족들은 피를 나눈 사이일진데 작별인사조차 못하게 만드니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닌 걸로 보이지요.(61절)
그러나 이 내용을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에수)을 따르는 사람이(영생이 목표인 사람이) 육적이고 물질적인일(집과 가족)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본다는 것은 영생이라는 목적(쟁기)을 향해 가는 이가 세상일에 미련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못 된다는 겁니다.
이미 이런 내용은 앞선 시간에도 수차례 있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물질보다 영을 더 많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디 여러분은 이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헛되게 만들지 말길 바라며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