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욕심을 버리려면 죽어야 가능하다.

배가번드 2023. 10. 1.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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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욕심(慾心)을 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들 욕심을 버려야한다 말하지만 욕심을 버리는 것은 죽는 만큼이나 힘든 일입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죽어야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욕심은 달리표현하면 욕구이며 욕구(慾求)는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당연하게 심어져있는 본능이기 때문에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은 욕심과 욕구, 욕망(慾望)을 달리 보지만 영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말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되며 육신의 한계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말장난에 불과하게 여겨집니다.

만남을 운명이라 말하고 헤어짐을 숙명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걸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오래살고자하는 마음도 하나의 욕심이고 남들보다 잘살고자하는 마음도 일종의 욕심인데 이러한 욕심을 완전히 없애버리면 살수가 없습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탐진치(貪瞋癡)를 없애야한다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욕심을 버리라는 말과 같은 겁니다.

탐하는 마음과 노여워하는 마음, 어리석음은 그 뿌리가 욕심에 있으므로 사실 세 가지는 하나로 귀결됩니다.

욕심이 있기에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고 무엇인가를 쟁취하지 못하기에 노여워하며 욕심에 눈이 멀어 진위파악이 어려워져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에 이 모두는 욕심에서 비롯된 걸로 봐야합니다.

이처럼 욕심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으로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예로부터 성인들은 욕심을 없애야한다 말했을까요.

이 같은 말을 한 이유를 알기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경전들이 주장하는 근본가르침의 핵심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세상의 덧없음을 깨닫게 만들고 자신의 영혼을 되살리는데 그 목적이 있지요.

사람을 잘 먹고 잘살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본연의 모습은 고귀한 빛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데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점을 알게 되면 욕심을 버리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육신을 버리라는 말과 연계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경전의 목적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점을 알라는데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볼 점은 우리의 진정한 영혼이 깨어났다 해도 처음에는 여전히 욕심이 있다는 겁니다.

영혼이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육의 속성 중에 하나인 욕심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으며 다만 지켜볼 수는 있습니다.

습관에 물든 육신이 욕심을 부릴 때마다 지켜보는 것으로 육신의 나와 분리가 되어 점점 더 영체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신의 주인이 되며 이 같은 일을 영적부활이라 말할 수 있지요.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For whosoever will save his life shall lose it: but 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the same shall save it.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9:25)

For what is a man advantaged, if he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mself, or be cast away?

 

23절에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육신의 예수가 아니라 성령이신 예수를 따르라는 말입니다.

육신예수가 아닌 빛이신 성령은 우리의 몸 안에도 들어있으므로 자기부정을(육신을 부정) 통한 영적부활을 실현시키라는 뜻이며 날마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성령과 하나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4절에 제 목숨을 구하고자하면 그것을 잃어버릴 거라 했고 예수를 위하여 육신의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구하게 될 것이라 한 겁니다.(whosoever will lose his life for my sake, the same shall save it)

여기에서 그것은 성령으로 우리의 진정한 영혼인 진아(眞我)이지요.

그리고 25절에서 온 세상을 얻고서도 자신을 잃거나 버리게 되면 무슨 이득이 있겠냐고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세상 전체를 얻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진정한 영혼인 성령을 잃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물질이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는 것이라 성령만이 영원합니다.

그런데 25절에 빼앗긴다고 번역한 cast away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더 곱씹어 봐야할 것 같습니다.

cast away의 뜻은“물리치다, 제거하다, 버리다, 낭비하다, 난파하다”등인데 우리가 himself를 성령으로 인식하게 되면 25절의 내용은 그야말로 느낌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세상 것들을 탐하게 되면 성령을 물리치거나 제거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시간낭비를 하게 되며 난파당한 배와 같은 신세에 처해진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이러한 점을 보게 되면 물질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욕심은 성령의 입장에서는 무익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 욕심내지 않고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이러한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며 신이 심어놓은 품성과도 같은 겁니다.

이러한 점은 노자의 도덕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무욕이관기묘(常無欲以觀其妙), 상유욕이관기교(常有欲以觀其巧)

(욕구가 없이 늘 그러한 까닭에 묘함을 보게 됨이요,

항상 욕구가 있는 까닭에 기묘하니라.)

 

욕구가 없이 늘 그러하다는 말은 영원의 세계에서 빛으로 존재하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항상 욕구가 있다고 한 것도 태초부터 존재하는 빛을 뜻합니다.

태초에 시작된 일점의 의식이 분열을 일으킬 때 스스로를 느끼기 위한 욕구에 의해서이기에 욕구가 항상 있다고 하는 겁니다.

유일한 창조의 근원의식이 자신을 느끼기 위한 욕구로 인해 상대를 만들어 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창조의 영역에 도달한 영적인 시각으로 두뇌차원의 인식은 아닙니다.

그래서 빛이신 성령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욕심은 태초부터 있어온 것으로 영원하며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고 육신적인 인식의 범주에 속한 인간들의 욕심은 제한적일뿐만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성령을 깨달은 사람은 욕심을 부리되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며 만족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깨닫지 못한 인생들은 먹어도 만족이 없고 항상 허기와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비록 육신이 배부르고 목마르지 않을지라도 뭔가 모를 허전함이 늘 함께 한다는 거지요.

스스로 생각할 때 사나 죽으나 만족하며 걱정근심이 없다하면 할 말은 없으나 인생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죽음과 함께 욕심으로서 이루어놓은 모든 것들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영원한 성령을 욕심낸 자들은 영생의 하늘에 오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