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생각나는 것은 먹어야 살 수 있기에 음식이 중요하고 물이 중요하며 숨을 쉬어야하는지라 공기가 중요합니다.
이세가지는 육신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기본요소로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며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살수가 없지요.
이것은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하고 값진 것이며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에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것들을 만든 이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을 만든 조물주(造物主)가 있겠거니 하거나 누군가는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며 살아갑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이런 사실을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지만 때로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인식 속에 가두고 있는지라 진정으로 창조주를 믿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을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양 여기는 행태가 못마땅할 때가 있다는 거지요.
우리가 목격하듯이 창조주는 만인에게 평등하며 공정하며 정의롭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만 위하지 않으며 부처를 믿는 사람에게도 알라신을 믿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만든 것들을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줍니다.
이러한 점을 보게 되면 세상을 만든 존재는 특정한 이름에 속한분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이 편리에 따라 이름을 지었을 뿐 그 이름이 창조주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하늘에 계신 존재라는 뜻에서 하느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최고의 정점에 거하시는 단한분의 절대자라는 뜻에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그 이름이 창조주의 진면목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 기록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불러야한다 하느님이라 불러야한다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해볼 문제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자신들의 신이 최고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은 단 하나뿐인 절대자를 믿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에는 종교전쟁이 일어났음이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론도 얻지 못한 채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일에 대한 해답을 노자의 도덕경은 제시하고 있지요.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
무명(無名) 천지지시(天地之始) 유명(有名) 만물지모(萬物之母)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직역해보면 도를 옳다고 하는 도는 늘 있는 도가 아니다 이며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을 직역하면 이름 붙여진 것들이 그 이름이라 말하면 늘 있는 이름의 것이 아니다 입니다.
정리를 하게 되면 “도라고 말하는 순간 더 이상 도가 아니고 이름 붙여진 모든 것들은 원래의 이름이 아니다”가 됩니다.
그리고 무명(無名) 천지지시(天地之始) 유명(有名) 만물지모(萬物之母)를 직역하면 이름이 없을 때 천지가 시작되었고 이름이 생기면서 만물이 만들어졌다 입니다.
정리를 하게 되면 “천지가 시작될 때는 이름이 없었으나 만물이 탄생되면서 이름이 지어졌다”가 되지요.
태초에는 이름 따위는 없었다는 말이며 사람들이 사물에다 이름을 붙였다는 겁니다.
이 같은 일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19)
아담의 뜻은 “사람”이니 사람이 만물에 이름을 붙였음을 모세는 기막힌 비유로서 말해놓았습니다.
이 내용 자체만 보더라도 사람이 이름을 지었을 뿐 하나님은 이름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이 사물에 대한 이름을 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은 도덕경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됩니다.
인간들이 하늘의 해를 보고 처음에 달이라고 이름 지었더라면 지금의 해와 달은 그 이름이 바뀌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름이 바뀐다 할지라도 해의 특성이 없어지거나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저 부르는 방식이 바뀌는 것뿐입니다.
여호와라 해도 하나님이고 엘로힘이라 불러도 하나님이며 알라신이라 칭하고 시바신이라 칭해도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거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자신들이 참된 진리의 길을 가르쳐준다고 말하며 그 길만이 유일하게 영생을 얻는 길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노자는 그렇지 않다 말하고 있으며 진정한 진리의 길은 규정되어질 수 없다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점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성경속의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
Whither shall I go from thy spirit? or whither shall I flee from thy presence?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139:8)
If I ascend up into heaven, thou art there: if I make my bed in hell, behold, thou art there.
여호와의 영을 떠나 어디를 가며(Whither shall I go from thy spirit?) 당신이라는 존재로부터 어떻게 피할 수 있느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whither shall I flee from thy presence?)
천국에도 지옥에도 여호와가 계신다고 말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에 동시에 존재하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이래서 하나님을 무소부재하고 편재하시는 존재라 말하는 겁니다.
이러한 점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말하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참모습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생각 속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며 어떤 곳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며 인간의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내말을 오해하겠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바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전2:4)
Who will have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un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전2:5)
For there is one God, and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 Christ Jesus;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로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하나님은 한분인데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개인이(중보)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액면대로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 이렇게 두 분인데 기독교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하나 된 분으로 하나님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이것은 분명 심각한 모순이라 할 수 있지만 빛이신 성령을 깨닫게 되면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시편에서도 말했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본모습은 빛이신 성령이며 그러한 빛의 존재는 시공간이 무너진 영역에 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도 거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의 인식의 폭이 시공간의 영역을 초월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범사(凡事)에 감사할 줄 아는 이들만 들으시오.
'짧은생각 긴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꿀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 (2) | 2023.10.04 |
---|---|
어떤길도 길이지만 빠른 길은 있다. (0) | 2023.10.03 |
욕심을 버리려면 죽어야 가능하다. (0) | 2023.10.01 |
기본소양은 갖추고 살자. (2) | 2023.09.30 |
우리 모두는 지구과학의 노예들. (0) | 2023.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