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듯이 나 역시 내가 마음먹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재한 신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사가 흘러가지는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질세상의 어느 것 하나라도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는 않으며 가끔씩은 내가 체험한 것이 정말 신이었을 까라는 의심을 할 때조차 생깁니다.
현실이 웬만하면 이런 마음까지는 먹지 않을 것인데 되는 일이라고는 없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수행초기에는 이런 생각이 불현 듯 들곤 했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 역시 많이 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하니라(욘4:5)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욘4:6)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욘4:7)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욘4:8)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욘4: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욘4:10)
Then said the LORD, Thou hast had pity on the gourd, for the which thou hast not laboured, neither madest it grow; which came up in a night, and perished in a night: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4:11)
And should not I spare Nineveh, that great city, wherein are more then sixscore thousand persons that cannot discern between their right hand and their left hand; and also much cattle?
5절에 요나가 성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생의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왔음을 뜻합니다.
즉, 성령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거지요.
동편에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지 본다는 것은 영적인 길을 걷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반인들 역시 성령이 내재한 채 육신을 입고 살아가지만 해가 뜨는 동쪽이란 빛을 본다는 의미인지라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초막은 육신을 뜻하고 그늘은 빛(성령)이 가려져 있음을 비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약 이것이 액면대로 그늘일 것 같으며 6절에서 여호와께서 박 넝쿨로 초막 속에 있는 요나의 머리 위를 가려줄 필요가 없지요.
그러므로 박 넝쿨로 요나의 괴로움을 면케 해준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가호(加護)를 뜻하며 구도자의 초발심 때 일어나는 일을 뜻한다고 봐야합니다.
어린 아기를 부모가 보호하듯이 처음 영적인 길에 들어선 구도자의 앞날은 하나님이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기에 요나는 심히 기뻐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가호는 결코 오래가지 않으며 다음날 하나님에 의해 없어져 버렸습니다.(7절)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일이 동트는 새벽 무렵에 일어났다는 거지요.
해는 곧 빛이신 성령을 뜻하는지라 성령이 깨어나기 시작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가피력은 없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음날 새벽이 일어났다고 표현한 겁니다.(the morning rose the next day)
마찬가지로 해가 뜨게 되면서부터 뜨거운 동풍이 분다는 것은 성령이 깨어나면서부터 닥치는 일이 육신에게는 고통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빛이신 성령이 드러나게 되면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들은 떨어져 나가게 됨으로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는 거지요.
구도자가 병이 들거나 물질적으로 손해가 발생하는 등의 각가지 재앙이 이러한 이유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면 요나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푸념을 했겠습니까.(8절)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9절에서 하나님이 요나의 푸념이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하자 요나는 오히려 합당하다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요나가 답한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이상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감정을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성령이 깨어났다고 하더라도 육신이 느끼는 감정은 그대로 있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다가 갑자기 재앙을 내리시는지라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요나가 박 넝쿨(축복)이 소멸된 것을(perished in a night) 몹시 서운해 하고 아쉬워한 것을 알게 됩니다.(Thou hast had pity on the gourd)
그렇지만 그러한 축복은 어디까지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요나는 축복에 대해 노력을 하거나 성장하게 만들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which thou hast not laboured, neither madest it grow)
이 말인즉 하늘의 축복은 사람(육신)과 상관없다는 말이지요.
또한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는 육신조차 축복을 하는데 어찌 12만 명이나 되는 사람과 많은 짐승을 아끼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글성경은 spare를 아낀다고 번역했지만 여기에서는 살린다는 뜻으로 쓰인 겁니다.
그리고 cattle은 키우는 소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여기에서는 순종하는 무리를 뜻합니다.
이미 몇 번에 걸쳐서 말했듯이 12만 명은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닙니다.
12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는 3과 사람의 숫자가 연합한 것으로 봐야하며(3×4=12) 만 명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12사도라 말하는 것도 같은 뜻이며 오병이어에서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빵이 12광주리라 한 것도 같은 뜻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좌우식별을 못하는 12만 명이라 한 겁니다.
좌우 분별을 못한다는 말은 시공간이 무너진 상태를 뜻하며 성령을 깨달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11절 말씀을 제대로 번역하게 되면 하나님과 연합하여 성령이 깨어난 사람과 순종하는 무리들이 많은 니느웨를 살리지 않을 수 없다가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나 순종하는 사람은 영적부활이 일어나 성령이 되살아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차라리 죽는 것이 났겠다고 푸념한 요나는 육신의 소리를 냈지만 내재하신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는 거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련과 시험이 주어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실 시련과 시험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들로 인해서 옵니다.
뭔가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싶어서 시험이고 시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의 내면에는 빛이신 성령이 들어있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몰라서 신이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을 만큼의 노력과 성장하게 만들지 않아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경우에는 최선을 다해보고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조건 현실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바꿀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이라는 점을 아는 이는 들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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