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하나님은 여려명이다.

배가번드 2023. 11. 11.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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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어보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특히 구약은 믿음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이거나 대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선지자가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데 반하여 오늘날의 목회자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거나 만난 이들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주 드물게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이라 칭하며 스스로를 드높이는 자리에 올라있으니 성경과는 아주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이 같은 사실들을 볼 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도 문제이며 만난 후 자신을 높이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언행이 성경적이라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는 이들은 성경의 다음구절을 인용하길 즐겨하지요.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그러나 이 내용은 하나님의 진면목을 말해놓은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형상을 갖춘 이가 아니라는 뜻으로 얼굴을 보지 못한다 했으며 보고서 살자가 없다 한 것은 육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안(지혜안)으로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살자가 없다 한 겁니다.

즉, 육이 죽고 영(성령)이 깨어나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수의 목회자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보았다는 이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며 사이비라 주장하지만 이는 성경을 오해한 것이며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났을 뿐 아니라 대화를 나누었다는 내용이 숱하게 많지요.

지면상 모두를 옮겨올 수는 없으므로 같은 출애굽기에 나온 내용만 가져와 보겠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And the LORD spake unto Moses face to face, as a man speaketh unto his friend. And he turned again into the camp: but his servant Joshua, the son of Nun, a young man, departed not out of the tabernacle.

 

사람의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the LORD spake unto Moses face to face)

그런데 11절에서 특이한 점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수종자(隨從者)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영어성경을 보면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뜻은“하나님이 구원하신다.” 이며 이는 모세의 종이나 제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내면의 영혼, 즉 성령을 가리킨다는 점을 알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진으로 돌아 왔다고 했으며 여호수아(성령)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 겁니다.

그래서 여사제(女司祭)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며(the son of Nun) 성막(교회)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기록한 겁니다.(departed not out of the tabernacle)

구약에는 청년이라는 뜻의 “a young man”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젊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존재로서 영원히 젊다는 뜻으로 젊은 청년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속뜻을 알아야 왜 하나님을 보고 살자가 없다 했는지 또 몇 시간을 대화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의 속뜻을 헤아리지 않고 액면대로만 본다면 성경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11절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는데 갑자기 20절에서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 했으니 앞뒤가 맞지 않다 여길 수밖에 없는 거지요.

하지만 영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이 내용을 읽는 순간 곧바로 알아봅니다.

자신이 경험을 했으므로 이 내용은 영혼의 세계를 말해놓은 것이고 모세는 깊은 기도(묵상, 명상) 속에서 높은 의식의 세계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영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면 다음내용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위에 섰으라(출33:21)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출33:22)

And it shall come to pass, while my glory passeth by, that I will put thee in a cleft of the rock, and will cover thee with my hand while I pass by: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3)

 

하나님 곁에 가기위해서는 바위(반석)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21절)

성경에 기록된 바위는 굳건한 믿음을 비유한 겁니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에 바위의 틈 속에 두고(in a cleft of the rock) 손으로 덮었다가 거둔다고 한거지요.(22절)

그런데 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어도 얼굴은 볼 수 없고(my face shall not be seen) 등을 본다고 했습니다.(thou shalt see my back parts)

이 말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특정한 한 가지 얼굴을 가진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이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 같으면 11절 말씀은 거짓이 되고 맙니다.

모세가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성경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책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도 거짓이 되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인간의 육신처럼 특정한 한사람의 모습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빛이신 성령으로 각 사람들의 내면에 거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이와 같은 일에 대해 신약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막9:2)

And after six days Jesus taketh with him Peter, and James, and John, and leadeth them up into an high mountain apart by themselves: and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막9:3)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막9:4)

 

6은 부활의 숫자입니다.

높은 산은 의식의 가장 높은 곳을 뜻하며 하나님이 계시는 최상층의 하늘을 뜻하지요.

그러므로 2절 내용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인식의 최상층부에 데리고 올라간 걸로 봐야 합니다.(2절)

그래서 영어성경을 보면 그들 자신들로부터 떨어져 높은 산으로 데려갔다 한 겁니다.(leadeth them up into an high mountain apart by themselves)

옷이 광채가 나고 희게 빛이 났다는 것은 영의 세계로 올라갔다는 말이며(3절) 그곳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다 같이 빛의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동일한 빛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지만 개인의 특성은 약간 남아있기에 이렇게 표현한거지요.

바로 이러한 까닭에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얼굴은 볼 수 없고 등만 볼 수 있다 말해놓은 겁니다.

만약 하나님이 특정한 얼굴을 하거나 몸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도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단한분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인식은 육에 머물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여럿이라는 사실을 믿는 이들만 이 말씀을 먹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