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목욕한 자는 발만 씼으면 된다.

배가번드 2023. 12. 2.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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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말이 있습니다.

단박에 깨우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육조혜능으로서 우리나라 조계종의 원뿌리가 되신 분입니다.

오조홍인으로부터 의발을 전수받은 혜능은 신수와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였다고 알려져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멱살잡이를 해가며 싸웠다는 것이 아니라 시문(詩文)으로서 서로의 경지를 겨루었다는 겁니다.

그분들이 써놓은 시를 보면 오늘날의 우리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수행 길을 걸어가야 할지 잘 알게 됩니다.

 

이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거울이니

부지런히 갈고 닦아 티끌 묻지 않도록 하라.

 

이 몸은 보리수가 아니요 마음 또한 거울이 아니라

본래 아무것도 없느니 어디에 티끌이 묻겠는가.

 

앞에 것이 오조홍인의 수제자 신수의 시이고 뒤에 것이 혜능선사의 시입니다.

이시로서 오조홍인은 수제자 신수를 제쳐두고 혜능에게 의발(衣鉢)을 전수했다고 합니다.

의발전수는 불가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일로서 스승이 후계자로 지목된 제자에게 가사와 바리때를 전해주는 의식이지요.

두 사람의 시를 액면 상으로 보면 분명히 혜능은 불성이 드러난 사람이고 신수는 그렇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비유하자면 성령이 드러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라고 보면 됩니다.

육조혜능은 빛이신 성령을 보았으므로 견성성불한 사람이고 신수는 아직 육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으로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볼 일은 막상 빛이신 성령을 보았다 하더라도 육신을 가진 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신수의 시도 아주 잘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모습이(眞我) 드러났다 할지라도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지요.

그래서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생겨난 거라 생각합니다.

사전에서는 깨달음에 달하기까지 점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내보기에는 즉각적으로 깨닫고 난후 점차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성경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13:10)

Jesus saith to him, He that is washed needeth not save to wash his feet, but is clean every whit: and ye are clean, but not all.

 

성령이 드러난 예수님과 연결이 된 사람 모두는 빛이신 성령이 깨어났다는 말이지요.

마치 같은 전기를 쓰는 방의 전등과도 같이 연결이 되어있으며 언제든지 스위치를 켜면 불을 밝힐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이 육신에 깊숙이 담겨져 있음으로 자꾸만 잊어버리고 습관에 의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예수님같이 빛을 밝히신 분으로부터 말씀을 들음으로서 또다시 우리의 신구의(身口意)를 되돌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회나 절에 가서 목사님이나 스님들로부터 설교를 듣는 것이 이래서입니다.

그런데 예문으로 올린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있지만 모두는 아니라고 했습니다.(ye are clean, but not all)

이 말씀인즉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거나 말씀을 왜곡되게 받아들였다는 겁니다.

마치 스위치가 고장이 난 방과 같았다는 말이지요.

스위치는 곧 믿음과 같은 것인데 스위치 온이 되어있지 않으면 예수님 같은 분이 스위치를 올려주어도 방에 전원공급이 되지 않아서 등을 밝힐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14:37)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14:38)

Watch ye and pray, lest ye enter into temptation. The spirit truly is ready, but the flesh is weak.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막14:39)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 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막14:40)

And when he returned, he found them asleep again, (for their eyes were heavy,) neither wist they what to answer him.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막14:41)

And he cometh the third time, and saith unto them, Sleep on now, and take your rest: it is enough, the hour is come; behold, the Son of man is betrayed into the hands of sinners.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막14:42)

 

이 내용은 십자가형을 앞둔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그려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담겨있으며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세히 읽어본 이들을 아시겠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돌아옵니다.

이는 단순하게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성령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세 번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처음에는 성령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같이 성령이 드러난 분이 찾아오게 되지만 몰라봅니다.

또한 육신의 믿음이 약한 탓에 항상 세상유혹에 빠져 성령을 깨울 수가 없습니다.

내재하신 성령은 간절하게 드러나길 원하고 있지만 육신의 믿음이 약한 탓에 늘 굴복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또다시 기회가 주어지지만 지혜안이 열리지 않아 또다시 성령은 잠들어 버리는 겁니다.

눈이 무겁다고 표현한 것은(their eyes were heavy) 그만큼 영안(지혜안)을 여는 것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41절을 보면 이제 그만하고 쉬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더 이상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Sleep on now, and take your rest)

본인들의 죄가 너무나 커서 성령이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자가 팔리는 것에 비유한거지요.(the Son of man is betrayed into the hands of sinners)

아마도 많은 분들이 내말에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42절을 보게 되면 내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금방 자라고 해놓고 또다시 일어나서 가자고 한 것은 담긴 뜻이 있음을 알라는 거지요.

방에 불을 밝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촛불도 있고 등잔도 있으며 전기불도 있습니다.

촛불이나 등잔불은 지극히 제한적으로 불을 밝힐 수 있고 그 범위도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연결된 성령의 불은 세상 전체를 밝히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내 것만 고집하고 나만이 불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한다는 자체가 이미 그 불의 범위와 근원을 제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쩨쩨하신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본인이 세상 전체를 밝히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자그마한 촛불을 들고 있는지는 스스로가 알기 마련입니다.

겸손한 이는 내말을 알아듣고 돈오돈수보다는 돈오점수 쪽을 택할 거라 생각됩니다.

 

 

촛불을 전기불로 바꾸고 싶은 이들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