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안에도 죄의 품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가짐으로 인해 DNA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동일한 이치로 사람에게는 태초에 심어진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알아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이 같은 일은 의심할 여지없는 하나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죄를 물마시듯 하면서도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고 성령이 나타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육신에 갇혀서 신의 품성이 드러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 살아가면서도 죄인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워낙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살다보니 죄를 당연시 여기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죄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죄를 알 수 있다” 경전은 말하고 있습니다.
구태여 경전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이러한 점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를 상대하다보면 그 사람의 잘못된 점을 발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보면 본인역시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던 적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근본적으로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으며 사는 동안 그러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지요.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기도와 명상을 해야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마5:23)
Therefore if thou bring thy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memberest that thy brother hath ought against thee;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4)
Leave there thy gift before the altar, and go thy way; first be reconciled to thy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thy gift.
이 내용을 액면대로 보게 되면 단순하게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지로는 깊은 기도를 뜻한다고 봐야 합니다.
예물을 제단에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 전에 나아가 자신의 것을 드리는 겁니다.
나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이신 성령을 만나기 위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표현한거지요.
깊은 내적(內的)기도(祈禱)를 하게 되면 성령은 우리가 일상에서 지내던 중의 잘못들을 깨닫게 만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깊은 기도 중에 상대방의 잘못만 보인다면 기도를 잘못하고 있거나 기도의 근본목적을 잘못 설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사전적 의미는 신령한 존재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 달라 간청하는 거지요.
이러한 점에 입각하여 보면 삶의 목적이 세상 적이고 물질적인데 있는 사람의 기도와 영생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의 기도는 명백히 다릅니다.
물질세상을 목표로 삼는 인생은 어떻게 하면 내가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이길까,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행동하여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쟁취할까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영생을 목표로 삼는 인생은 어떻게든 살아생전 성령을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매일같이 성전(聖殿)된 육신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지라 하나님이신 성령은 응답을 하게 되며 본인의 잘못을 깨닫게 만듭니다.
아마도 내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기도를 말로서 간청하는 것으로 오해한다는 거지요.
내가 말하는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를 지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자체가 기도라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잘못한 일은 없는지 살펴보고 또다시 회개하고 돌이키는 시간을 갖는 것이 기도이지요.
다만 눈을 감고 기도를 하기 전 내재하신 성령께서 밝히 보게 해주실 것을 간청한 후 하루 일과를 되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매일같이 발에 묻어오는 흙먼지를 씻는 것과 같은 효과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예수님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13:10)
Jesus saith to him, He that is washed needeth not save to wash his feet, but is clean every whit: and ye are clean, but not all.
우리가 매일같이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겁니다.
그런데 발을 씻어야 하는 이가 남의 발만 붙잡고 씻어주려 한다면 그야말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우리가 내적기도를 통해 성령에게 응답을 받게 된다는 뜻이지 타인들의 발을 씻어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지지 않았겠지요.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6:42)
진정 성령과 하나 되려면 이러한 점을 깨닫는 것은 필수입니다.
성령과 하나 된다는 것은 전체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과도 같은 것인데 나자신안에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담으려는 이가 자신의 죄인 됨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내 죄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죄를 짊어져야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언제나 상대방의 잘못을 볼 때는 그 죄가 내안에도 들어앉아 있음을 보는 계기로 삼아야하며 기도나 명상을 통해서는 상대방이 저지른 죄조차도 자신의 것임을 확인해야 됩니다.
그래서 일찍이 불가에서는 좌선(坐禪)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좌(坐)라 함은 밖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고 앉는 것이요.
선(禪)이라 함은 남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경계의 벽이 허물어지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빛이신 성령과 하나 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한 이유를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영혼이 성령과 완전히 하나가된 상태가 되어야 이러한 말을 들을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말로만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점부터 깨닫고 매일같이 자신의 발부터 닦을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채식과 명상을 시작할 무렵 나 자신을 교도소를 일곱 번 다녀와도 모자랄 죄인이라 생각했고 지금 와서는 세상에 나보다 더 큰 죄인은 없다는 결론을 얻었으며 멜기세덱의 등급에 오른 다윗이 자신을 벌레에 비유했던 이유를 깨닫고 있지요.
내가 하는 말은 모두가 죄인이 되어 죄 값을 치려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온 세상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심을 깨달아 알라는 뜻입니다.
성령과 하나 되려면 가장 우선되어야할 일이 이러한 일이며 너와 나의 경계가 허물어져야 합니다.
성령과 하나 되고 싶은 영혼만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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