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가수들이 있으며 각자가 노래 부르는 방식이 다릅니다.
자신들만의 음색을 간직하여 다양한 창법으로 노래하기에 사람마다 좋아하는 가수가 따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며 한사람이 다수의 가수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요.
이러한 일은 영적인 길이라 해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음악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듯이 종교도 다양하며 노래 부르는 방식이 다르듯이 성경을 보는 시각도 다양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이들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가 하면 나처럼 영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며 부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목자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로 나 홀로목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강해를 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표본이 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오는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최선을 다하길 바라는 것이며 구태여 종교를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미 세세생생 수없이 많은 종교를 경험한 끝에 산 정상 가까이 도달했는데 구태여 길을 달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행9:1)
And Saul, yet breathing out threatenings and slaughter against the disciples of the Lord, went unto the high priest,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행9:2)
And desired of him letters to Damascus to the synagogues, that if he found any of this way, whether they were men or women, he might bring them bound unto Jerusalem.
언뜻 보면 사울은 주님(예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일 듯이 보입니다.
호흡을 가빠할 정도로 살기등등했다고(breathing out threatenings and slaughter) 묘사했으니 마치 엄청난 종교탄압을 한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1절)
그렇지만 앞선 시간에 본 성경내용을 참고해서 읽어보면 사울과 사도들 간의 시각에 차이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들이(성령)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다고 했으니(사도행전8장1절) 사울역시 남녀를 막론하고(whether they were men or women) 성전으로 인도하려 했음을 알게 되지요.(예루살렘으로 잡아옴)
각자가 성전으로 인도하는 목적을 가졌지만 방식과 결과가 달랐다는 겁니다.
다메섹의 뜻은 “물대기 좋은 땅”이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펼치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사울이 반대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성령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울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행9:3)
And as he journeyed, he came near Damascus: and suddenly there shined round about him a light from heaven: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9:4)
And he fell to the earth, and heard a voice saying unto him, Saul, Saul, why persecutest thou me?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5)
And he said, Who art thou, Lord? And the Lord said, I am Jesus whom thou persecutest: it is hard for thee to kick against the pricks.
“물(생명)을 대기 좋은 땅”(다메섹)에 가까이 갔다는 것은 생명의 가르침을 전할만큼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뜻이지요.
빛이 그를 둘러쌌다는 말은(shined round about him) 빛이신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성령과 하나 되신 예수가 빛으로 나타났다고 한 겁니다.
그런데 5절에 성령이신 예수가 말하길 사울이 핍박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the pricks에 대항하여 사울이 발로 찬다고 했으니 pricks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prick은 속어로 쓰일 때는 음경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또 다른 뜻은 “찌르다”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핵심을 찌르는 것이라는 점을 이렇게 표현한거지요.
성령의 가르침에 대해 반대하는 사울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이렇게 말해놓은 겁니다.
다음내용을 보면 이렇게 해석해야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9:6)
And he trembling and astonished said, Lord, what wilt thou have me to do? And the Lord said unto him, Arise, and go into the city, and it shall be told thee what thou must do.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행9:7)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행9:8)
And Saul arose from the earth; and when his eyes were opened, he saw no man: but they led him by the hand, and brought him into Damascus.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행9:9)
And he was three days without sight, and neither did eat nor drink.
한글성경은 [NIV]를 번연한지라 앞부분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사울이 떨려하며 놀라움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예수께 묻고 있지요.(trembling and astonished said, Lord, what wilt thou have me to do?)
이 같은 장면은 빛을 보게 되면(성령이 임하게 되면) 강한 진동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어디까지나 내적으로 일어나는 영적체험이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7절에서 다른 이들은 보지는 못하고(직접경험하지는 못함) 듣기만 했다고 한 겁니다.(전해 들었다는 뜻)
영적인 길을 같이 걸어가고는 있어도 누군가는 체험을 하고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8절에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다는 것은 육신을 벗어나 영안을 열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을(육신) 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육과는 별개의 존재가 됨, 하나님 눈에는 모든 이가 살아있는 것으로 보임)
그렇지만 성령은 반드시 육신을 통해서만 일을 할 수 있기에 또다시 사람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들어간다 한 것인데 달리 표현하면 성령의 불씨를 나누어줄 준비를 마쳤다는 말이 됩니다.(다메섹=물(생명, 성령)대기 좋은 땅)
그러므로 9절 역시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달아 인자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이 드러나 육신과는 별개의 존재가 되었음을 식음(食飮)을 하지 않는 것에 비유한거지요.
하지만 이렇게 인자가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가 않으며 숱한 고통의 순간들이 주어져야만 합니다.
하나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도 쉽지가 않은데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쌓아둔 고정관념을 한순간에 바꾸기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오늘은 제한된 지면 탓에 등장하지 못했지만 다음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사울을 방문하는 이가 나오게 됩니다.
과연 누가 등장하게 될는지 기대해보며 오늘의 시간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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