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멀게 된 사울에게 누가 나타났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인사말을 줄이고 곧바로 사도행전 속으로 뛰어 들겠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행9:10)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행9:11)
아나니아의 뜻은“여호와는 은혜가 깊으시다”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말했듯이 다메섹은 성령의 불씨를 나누어줄 자격을 갖춘 이를 가리키므로 이 내용을 액면대로 볼 것은 아닙니다.
아나니아라고 하는 특별한 제자가 있었다기보다 사울에게 깊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런 이유로 직가(直街)라는 거리를 말해놓은 것인데 이는 거리이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통(直通)의 방법을 뜻하는 겁니다.
즉, 사울이 기도 중에 여호와의 깊은 은혜로 인해 성령의 역사하심을(내적체험) 경험한 사실을 비유로서 말해놓았다고 봐야 한다는 거지요.(다소의 뜻: 기쁨)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는 이들은 알겠지만 사도행전5장에서 “아나니아”는 죽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또다시 9장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나오는 것은 액면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이어지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행9:12)
이 내용이 비유의 말씀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에게 성령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구태여 아나니아를 통해 안수를 받게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요.
그래서 이 내용은 여호와의 은혜를(성령의 역사하심) 받은 사울이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음을 비유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영생을 얻는데 있어 방해했음을 인식해야하는 겁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 같은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행9:13)
Then Ananias answered, Lord, I have heard by many of this man, how much evil he hath done to thy saints at Jerusalem: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행9:14)
13절에서 예루살렘의 성인들에게(saints at Jerusalem) 악행을 저질렀다고 했으니(how much evil he hath done) 성령을 깨닫는데 방해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았음을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육신에 속한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성전으로 이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게 되면 달라진다는 사실을 성경은 밝히 보여줍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But the Lord said unto him, Go thy way: for he is a chosen vessel unto me, to bear my name before the Gentiles, and kings, and the children of Israel: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6)
For I will shew him how great things he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
지금 이 장면은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도달하기 전에 일어나는 일이지요.(사울이 성령을 깨닫기 전)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기 전 조차도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그릇이었음을(he is a chosen vessel unto me)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the Gentiles) 육신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kings) 그리고 믿음을 가졌지만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이들을(the children of Israel) 위해 사울 같은 가르침을 펼치는 이들이 있어야함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성령의 은혜를 입기 전, 결실을 얻기 위해 참고 견디게 만드는(to bear my name)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거지요.
쉽게 말하자면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로 인해 많은 시련이 주어지게 된다는 점을 16절을 통해 말하고 있으며 사울이 저지른 일로 인해 그가 받을 것은 그자신이 감당하게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제3자가 함부로 심판하지 말라는 뜻에서 이렇게 기록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세계에도 다양한 등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중에서도 성령과 하나 된다는 것은 영광중에 영광이라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9:17)
And Ananias went his way, and entered into the house; and putting his hands on him said, Brother Saul, the Lord, even Jesus, that appeared unto thee in the way as thou camest, hath sent me, that thou mightest receive thy sight, and be filled with the Holy Ghost.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9:18)
And immediately there fell from his eyes as it had been scales: and he received sight forthwith, and arose, and was baptized.
이제 우리는 아나니아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킨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앞서 9절에서 유다의 집이라고 한 것은(in the house of Judas)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의 육신을(유다의 집) 가리키므로 여기에서는 사울의 육신을 뜻하지요.
그러므로 이 장면은 빛이신 성령이 사울의 몸에 역사하시는 것을 비유로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여(be filled with the Holy Ghost) 잊어버리고 있던 지혜안(영안)을 회복했다는(돌려받음) 말입니다.(thou mightest receive thy sight)
그래서 18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곧바로 다시 보게 되었다(received sight forthwith) 한 것인데 한마디로 표현해서 거듭났다는 말이며 빛이신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세례라는 거지요.
이렇게 해서 사울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었음을 확인했으며 성령이 역사하시는 이의 가르침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타인들의 믿음의 정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겉보기에는 일반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게 보이지만 성령이 드러난 이는 내면이 다르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바보 같아서 멸시당하며 무시당하기 일쑤이지만 내면이 깨어나 있음을 말하고 있지요.
부디 함부로 누군가를 심판함으로 인해 자신이 심판받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의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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