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성령의 불씨는 이심전심으로 전해진다.

배가번드 2024. 3. 22. 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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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돈의 위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이 떨어지면 마음이 위축되어 한낮에도 추위를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울해지고 세상이 도무지 즐겁지가 않게 느껴지지요.

그러다보면 짜증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불친절해집니다.

이 같은 일은 육신이 힘들어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몸이 아프거나 병이 들어있으면 본인도 모르게 신경질을 부리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영생을 목적으로 가진 이는 생활이 즐거워 항상 웃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주변의 영향으로 일반인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만 골방에서 기도를 하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매일같이 죽는다는 표현을 했지요.

이런 의미로 나 역시 성경을 통해 매일같이 거듭나고 있으며 이런 좋은 소식을 여러분께 전해주고자 하는 겁니다.

과연 매일같이 죽는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행9:19)

And when he had received meat, he was strengthened. Then was Saul certain days with the disciples which were at Damascus.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9:20)

 

19절에 meat는 음식이라는 뜻도 있지만 “알맹이, 골자”라는 뜻도 있으므로 달리 해석해야 합니다.

먹는다는 동사 eat를 쓰지 않고 받아들였다는 received를 사용한 점을 볼 때 음식보다는 핵심의 가르침을 뜻한다고 봐야 하는 겁니다.

앞선 시간에 말한 대로 성령의 불씨를 전하기 좋은 상태가(다메섹=물대기 좋은 땅) 되었음을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비유 했는데 성령을 깨달아 사도들과 같아 졌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20절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전파하게 되었다 말해놓았습니다.

이렇듯 성령이 깨어나면(임하시면) 삶이 돌변하게 됩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행9:21)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9:22)

But Saul increased the more in strength, and confounded the Jews which dwelt at Damascus, proving that this is very Christ.

 

어제까지 물질 세상에 속해져 있던 사람이 영적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질세상에서 권세를 누리는 대제사장의 가르침을 전하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하여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설파하는지라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21절)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에 사울은 더욱 힘을 받아 진정한 그리스도에(very Christ) 대해 증명해 보였다고 했지요.(22절)

그런데 22절 내용은 약간 다르게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자칭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사람들은(유대인) 본인들이 성령의 불씨를 전한다고 말을 하지만(다메섹에 거주함) 진정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때껏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성직자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파했던 겁니다.

이렇게 되자 유대사회가 들끓게 된 것은 당연하지요.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행9:23)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행9:24)

But their laying await was known of Saul. And they watched the gates day and night to kill him.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행9:25)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사울을 죽이기 위해 유대인들이 노력했고 야밤을 틈타 사울이 도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풀어보면 단순하게 그렇게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24절에 유대인들이 중요함을 기다렸다고 했으니(their laying await) 이는 성령이 깨어나는 순간을 기다렸다고 봐야합니다.

성문을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육신(성전)의 문, 즉 눈으로 성령을 보고자 했다는 뜻이지요.

사울의 가르침을 듣고 성령의 역사하시는 순간을 지켜보고자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울을 죽이려했다는 것은 사울의 가르침에 따라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아 스스로를 죽이고 영으로 부활한 것과 같은 의미라고 봐야합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공회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잡아가면 아주 간단한일이지요.

결정적으로 25절에서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벽으로 내렸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는 성령을 볼 수 없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육신에 속해진 사람들은 어둠속에 있는 것과 같고 성령은 마치 바구니 속에 담겨있는 것과 같아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흡사하다는 점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내용을 액면대로 본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지만 성령을 깨닫기 위해서는 속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거지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대로 믿으려면 구태여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를 들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의 능력만으로 성령을 깨닫기는 불가능합니다.

사울을 통해서도 확인했다시피 여호와의 은혜와 축복을 통해야만 가능하며 성령의 불씨를 전해주는 이(인자)를 진심으로 믿어야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이루어져 심심상인(心心相引)이 되는 거지요.

여기에 대한 일조차 성경은 친절하게 설명해놓았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행9:26)

And when Saul was come to Jerusalem, he assayed to join himself to the disciples: but they were all afraid of him, and believed not that he was a disciple.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9:27)

 

사울이 성전(예루살렘)에 들어갔음을(하나님과 하나 됨)(Saul was come to Jerusalem) 입증하려 했지만(평가받으려함)(he assayed to join himself to the disciples) 누구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등장시켰는데 바나바는 ‘권면(勸勉)의 아들’, ‘위로(慰勞)의 아들’ 곧 ‘권위자’(勸慰子)란 뜻으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결국 사울의 거듭남을 알아보려면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바나바라는 인물이 있다고 가정했을 경우 그동안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토록 반대하던 사람을 일순간에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모쪼록 믿음이 성령을 되살릴 수 있음을 인식하기 바라며 강해를 마무리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