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용서와 징계의 하나님.

배가번드 2024. 3. 24.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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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말하면 사랑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용서해주고 안아주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기 쉽지요.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매를 드는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했는데도 매를 들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징계를 하나님의 사랑이라 말하며 공의(公義)의 하나님이라 기록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삶속에서 맞이하는 그 어떤 순간도 하나님이 주시는 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이 같은 일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 멀리 하늘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살아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신 성령을 담지 않은 그릇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입니다.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확인을 시켜주고 있지요.

과연 그러한지 오늘도 성경 속으로 들어가 확인해보겠습니다.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행9:32)

And it came to pass, as Peter passed throughout all quarters, he came down also to the saints which dwelt at Lydda.

 

룻다는 구약시대의 롯을 가리키며 그 뜻은 “감추어진, 덮개”입니다.

이점을 감안해서 해석하면 성령이 감추어진 성인에게 베드로가 갔는데(to the saints which dwelt at Lydda)어떤 일이 일어났다가 됩니다.

아직까지 성령이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성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에게 성령의 불씨를 전해주러 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겠습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년이라(행9:33)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행9:34)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행9:35)

 

애니아의 뜻은 “난산(難産)”이며 중풍은 혈이 돌지 않아 생긴 병으로서 하나님의 생명, 즉 성령이 업장(죄의식)으로 막혀있어서 드러나지 못하고 있음을 비유한 겁니다.

성경은 성령과 하나 됨을 믿음의 딸에 비유하고 있음을 볼 때 성령의 드러남은 산고(産苦)에 비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은 창조주 하나님의 하신 일(1주=7)을 깨닫고 첫 출발점에 선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이며(7+1=8) 사도(베드로)의 가르침을 듣고 영이 깨어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지요.(시절인연이 도래함)

그래서 베드로의 가르침에 따라 성령의 내재함을 깨닫고 분연히 거듭나게 되었음을 치유의 기적으로 풀어놓았습니다.(34절)

앞에서 말한 대로 롯다의 뜻은 “감추어진, 덮개”이고 사론의 뜻은 평지입니다.

성령이 감추어지고 믿음이 없는 상태(평평한)를 이렇게 비유한 것이며 그들이 베드로의 가르침에 성령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드러남=일어섬=심어짐=돌이킴)

이 내용은 사도인 베드로의 활약상을 말해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반석 같은 믿음이(베드로의 뜻: 반석) 성령을 깨운다는 뜻도 됩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해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가 있으므로 본인의 노력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9:36)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행9:37)

And it came to pass in those days, that she was sick, and died: whom when they had washed, they laid her in an upper chamber.

 

욥바의 뜻은 “아름다움”으로 화려한 세상을 가리키며 다비다와 도르가는 동일하게“영양, 사슴”을 뜻합니다.

영의 세계를 모른 채 세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비다와 도르가에 비유했으며 그들이 영적으로 보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she was sick, and died)

그런데 37절에서 죽은 그녀를 씻어서 높은 곳에다 두었다고 했는데 이 말씀인즉. 회개하여 용서받아 깨끗해져서 높은 곳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when they had washed, they laid her in an upper chamber)

다르게 표현하면 선행과 자선을 베푸는 이는 높은 곳에 갈 자격을 갖춘 거나 다름없다는 거지요.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성령의 불씨를 전해줄 사람이 오게 된다는 것을 이어지는 내용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행9:38)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행9:39)

 

 

성령에 가려진 상태의 룻다가 세상에 완전히 빠져버리기(영적죽음) 전에(욥바에 가까움) 구원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베드로에게 간청한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을(2) 보내 베드로를 청한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2+1=3)

성부이신 하나님만 있어도 안 되고 성자인 사람만 있어서도 안 되며 영육(성령)이 합하여 인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성령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39절 말씀도 여기에 근거하여 해석해야합니다.

다락방은 높은 의식 상태를 뜻하며 과부는 피 남편(성령)이 필요한 상태를 가리킵니다.(출애굽기 4장25절)

또한 이 말씀은 베드로가 성령으로서 심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도르가(양, 사슴)와 과부들이 살아생전 영혼(속옷)과 육(겉옷)으로 행한 일들을 낱낱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본인들이 성령을 깨닫고 싶어도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높은 의식세계에 머물 수가 없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9:40)

But Peter put them all forth, and kneeled down, and prayed; and turning him to the body said, Tabitha, arise. And she opened her eyes: and when she saw Peter, she sat up.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행9:41)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9:42)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행9:43)

And it came to pass, that he tarried many days in Joppa with one Simon a tanner.

 

액면 상으로는 사람들을 다락방에서 내어보낸 것으로 되어있지만 자격미달로 쫓겨난다는 뜻이며 베드로가(성령) 축성을 하여 신성케 하자 다비다가 성령을 보고(she saw Peter) 거듭났음을 자세를 바로 하여 앉은 것으로(she sat up) 표현한 겁니다.(40절)

성령이 임하여야 거듭날 수 있으며(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킴) 하나님이신 성령이 허락해야(베드로가 불러들임) 살아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41절)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베드로가 성령의 입장에서 가르침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던 거지요.(42절)

그러므로 43절에서 베드로가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한다 한 것인데 시몬의 뜻은“응답하셨다, 들음”이고 피장은 가죽을 세공하는 무두장이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는 육신(무두장이) 안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거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성경해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들만 듣기를 바라며 9장의 강해를 모두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