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율법은 하나님의 시험과 같다.

배가번드 2024. 10. 3. 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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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강해하는 동안 놀라운 순간들이 숱하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지 못하던 기독교의 교리를 많이 알게 되었지요.

그동안 이러한 일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의 속뜻을 헤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성경 속에서 불교의 윤회사상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생을 상속받는다는 내용입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30)

But he shall receive an hundredfold now in this time, houses, and brethren, and sisters, and mothers, and children, and lands, with persecutions; and in the world to come eternal life.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19장29절과 누가복음18장30절에 기록되어 있지만 윤회사상을 가장 확실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마가복음입니다.

지금생과(now in this time) 다가올 세상이라(in the world to come) 정확히 말하고 있음으로 영어성경을 볼 수 있는 이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는 이들은 이미 이 내용을 몇 번이나 보았겠지만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새삼 되새기게 되었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구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상속자라는 말만으로는 윤회사상을 말한다고 볼 수 없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에 다른 내용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롬8:30)

Moreover whom he did predestinate, them he also called: and whom he called, them he also justified: and whom he justified, them he also glorified.

 

예정된(predestinate) 이들을 불렀다는 말은 앞서 예문으로 올린 누가복음에서 영생을 상속받은 자들을 부른다는 뜻이지요.

만약 이렇게 해석이 되지 못한다면 사람은 한번만 사는 것이 되며 이번 생에서 모든 것이 끝나야 되는 겁니다.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데 잘 먹고 잘살다 가면 그만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정해진 바에야 구태여 손해를 봐가며 착하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윤회사상은 인정되어져야만 하며 나 홀로목사와 함께하는 여러분도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곳에 와있다는 것은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서 이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이 알지 못하지만 전생에 믿음의 불씨를 심어놓았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겁니다.

또한 비록 전생에 성령의 불씨를 심어놓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이번 생에서 믿음의 불씨를 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모든 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달렸다는 점을 말씀드리며 9장의 마지막 문을 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롬9:30)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9:31)

 

육신으로는 의로울 자가 없지만 믿음으로 인해 의로움을 얻었다고 합니다.(30절)

그런데 31절에서 바울은 이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의에 법을 따라야하는데 이런 이들은 오히려 율법에 이르지 못한다 말하고 있지요.

이 말씀인즉, 의의 법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잘못을 따질 때 내가 옳다면 상대방은 그르다는 점을 말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선하면 상대방은 악하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내가 악하고 자신이 선하게 되므로 근본적으로 옳다 그르다, 선하고 악한 것을 구분 짓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이점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롬9:32)

Wherefore? Because they sought it not by faith, but as it were by the works of the law. For they stumbled at that stumblingstone;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이스라엘, 구도자)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데 의미를 두기에 율법의 완성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완전히 지킬 수는 없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뒷부분에서 그들이(구도자) 이렇게 하는 이유는 걸림돌에 발이 걸렸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습니다.(For they stumbled at that stumblingstone)

즉, 율법은 하나의 시험과도 같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 바울은 33절을 통해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줍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이 내용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내용이므로 잠시 보고난 후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로마서와 이사야서를 비교해보면 시험한 돌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령과 하나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통과한 견고한 주축돌이라는 말이지요.

시온의 뜻이 “우뚝 솟은, 요새, 봉우리”라는 사실을 볼 때 영적완성을 가리키므로 성령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같은 인자를 주춧돌로 삼아야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제와 우리내면에서 성령을 되살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이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걸림돌을 마음 안에 두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그자체가 우리의 율법이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내재하신 성령을 믿는 이는 부끄러움을 당하지도 않고 급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이미 정해진 운명에 따라 영광 받을 일이 정해져 있기에 온갖 핍박과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으며 고통과 괴로움역시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나 홀로목사의 이 말에 동조하지 못하며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다 호소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이들에게 한 가지 해줄 말이 있습니다.

당면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에게 이로울지를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내말을 믿으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것이고 믿지 않으면 고통이 배가될 것인즉, 모든 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달렸음을 말하며 9장의 문을 닫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