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금 특별한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최근 들어 알게 된 찬송가 가사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함께 공유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읽어보면 가사를 쓴 사람이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후렴: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좋고 기쁜 일만 경험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분명히 슬프고 괴로운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고 남에게 말하지 못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일도 당하며 살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빛이신 성령을 경험해야만 가능합니다.
숱하게 당해야만 했던 억울한 순간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였고 갈등과 반목(反目)속에 이별하며 아파했던 순간조차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조금만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온다 싶으면 발끈하는 것이 사람인데 자신을 향한 공격과 비난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러므로 이 가사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쓴 것이 맞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빛이신 성령을 경험했기 때문에 과거(어린아이시절), 현재(지금까지), 미래까지(꿈을 꾸는 삶) 하나님의 은혜아래 놓여있음을 노래하고 있는 거지요.
숨 쉬는 것조차 은혜라고 노래했으니 삼라만상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신 성령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 20년도 더된 옛날 일을 떠올리게 됩니다.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집을 나와 차에서 생활해야만 했을 때 어찌나 추웠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되었다는 자유로움에 온몸에 전율(戰慄)이 흘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을씨년스러운 겨울조차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거리를 지나는 사람마다 칼바람을 피하느라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 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고 앙상한 모습으로 서있는 가로수조차 아름답기 그지없었던 겁니다.
그 무렵 어느 날인가 그때껏 지나왔던 과거가 한순간에 펼쳐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나온 과거가 한편의 잘 짜인 연극과도 같다는 점을 그때 알게 되었고 감격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지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그때 깨달았던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온갖 역경과 어려움은 늘 함께 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다만 역경과 어려움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일반인들과 내가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기보다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해야 하리라 봅니다.
한순간에 깨닫고 나서 끝이 아니라 깨닫고 난후부터 점차적으로 닦아 나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한순간 성령의 임재하심을 깨닫고 모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안다 해도 육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항상 고난과 시련의 시간이 주어질 거라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점의 문제로서 성령에 초점이 맞춰지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완벽함으로 돈오돈수가 되는 것이며 육신에 초점이 맞춰지면 완전하신 성령이 육신을 끌고 주변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으므로 돈오점수가 됩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거듭나는 시간이 필요하며 내면으로 들어가 빛이신 성령을 만나야 하기에 바울은 자신이 매일 죽는다는 표현을 한거지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15:32)
If after the manner of men I have fought with beasts at Ephesus, what advantageth it me, if the dead rise not? let us eat and drink; for to morrow we die.
빛이신 성령을 만난 바울조차 자신이 매일 죽는다는 표현을 할 정도인데 일반인들이 오죽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항상 시비(是非)를 따짐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운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에베소: 바람직한, 올바른)
그래서 자신은 이미 성령과 하나 되어 있으므로 짐승 같은 사람들과 다투는 것이(fought with beasts at Ephesus) 무슨 유익이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인 만큼 잘 먹고 잘 사는 데만 열중할 것이므로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논쟁을 벌여봐야 영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까닭으로 나 같은 경우 누구와도 논쟁하기 싫어합니다.
자신이 이미 답을 정해놓고 나에게 답을 강요하고 있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여봐야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들과 엄마가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를 따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들을 먼저 구해야한다는 말을 들어보면 그 말도 맞는 것 같고 엄마를 구해야한다는 주장도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육적인 사람은 어느 쪽이든 결말이 나기를 바라지만 영적인 사람은 어느 쪽도 답이 될 수 있음을 압니다.
나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내가 취하는 행동이 답이 되는 것이지 이래야만 한다거나 저래야만 하는 법은 없습니다.
이렇게 행동하면 이런 결과가 주어지고 저렇게 행동하면 저런 결과가 주어질 뿐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사 모두는 이러한 패턴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으므로 내 경우는 다르다는 말은 소용없는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영적인 사람은 항상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고 상대방주장을 따라줍니다.
그러나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면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엄마와 아들을 서로 먼저 구해야한다는 주장으로부터 나 자신을 죽이는 선택을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 선택하라고 강요하면 둘 다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제나 용서와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사랑을 주면 사랑이 배가 되어 돌아올 것인즉 받고 싶으면 주어야 합니다.
은혜가운데 산다는 것은 이런 거라 생각하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떤지요.
(221) 은혜 - 손경민, Grace - Son KyungMin (feat.지선,이윤화,하니,강찬,아이빅밴드) (햇살콩 일러스트 &캘리)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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