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들아!(25)

배가번드 2021. 8. 2.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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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호주에서의 생활이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할 무렵 이번에는 시드니에서 국제선이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어.

명상시간이 끝나고 공지시간에 언뜻 전해 들었는데 호주 연락인이 영어로 한 말이라 정확한 해석은 할 수 없었지만 시드니 선 행사 준비를 위한 워킹 팀을 구한다는 것 같더구나.

나로서는 내가 호주에 온 것과 때를 같이해서 선행사가 있게 된 만큼 나를 위한 안배나 진배없이 받아들여졌으므로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고 네 엄마에게 말했더니 반대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 행사참가를 허락하였어.

부도가나서 마음고생도 심했으니 조금은 쉬도록 해주자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해.

아들아!

시드시 선행사 얘기를 하기 전에 우선 몸을 푼다는 기분으로 호주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까?

많은 사람들이 시드니가 호주의 수도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캔버라라는 인구5만의 조그마한 소도시가 호주의 캐피털 도시야.

처음 수도를 어디로 하면 좋을까 여론조사를 했는데 인구500만을 자랑하는 시드니가 당연히 수도가 되어야 한다고 들고 나섰고 이에 질세라 인구350만에다 호주최대의 공업도시인 멜버른이 맞불작전으로 수도를 고집하고 나선 것이었어.

한 치의 양보 없이 워낙 거세게 싸우다 보니 국론분열을 우려한 정치인들이 시드니와 멜버른의 중간에 위치한 캔버라시티를 수도로 지정한 것이야.

가끔씩 호주수상이 시드니에 머물고 수도인 캔버라에 자주 들리지 않으면 이 도시 주민들이 데모를 하는데 그 이유는 수상이 수도에 머물고 있어야 각종 일 처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올 것이고 거기에 따른 관광수입이 생기는데 수상이 자꾸 대도시에만 머물고 캐피털도시인 캔버라를 등한시하는데 따른 불만의 표시를 하는 거지.

수도가 아니긴 해도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거나 문화의 중심은 아무래도 시드니라 할 수가 있고 명실 공히 호주의 제일도시는 어디까지나 시드니임에 틀림이 없어.

그러한 곳에서 국제선이 열리는 만큼 그 기대 또한 적지가 않았기에 시드니로 출발을 하기로 했는데 때마침 사촌동생 역시 시드니에 일자리를 알아보러 간다고 하기에 함께 가기로 했지.

외숙모님께서 하릴없이 놀고 있는 막내아들이 못마땅한데다 내심으로 나와 함께 시드니를 가게 되면 마음을 잡고 일자릴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함께 보낸 것인데 나로서는 영어를 몰라 혼자서는 도저히 시드니 갈 엄두를 낼 수 없는 처지인데 이렇게 기가 막힌 신의 안배가 어디 있겠냐 싶었어.

자꾸 내가 신의 완벽한 안배를 들먹이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점 때문인데 어쩌면 그리도 앞뒤가 맞아 들어가는지 한 치의 오차가 없더라는 거야.

아들아!

너도 생각을 해보려무나.

영어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전화번호하나만 달랑 들고서 시드니를 갈수가 있으며 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말이야.

아무런 뒷생각 없이 무작정 간다고 나서니까 주위에 일들이 완벽하게 안배가 되었던 거지.

시드니에 도착해서 전화부터 했는데 통화는 할 수 있었지만 문제가 발생이 되었어.

상대편에서 어떻게 왔는지 되묻는다고 하는 사촌동생의 말에 워킹팀 합류를 위해왔다고 말하고 했더니 아직까지 워킹팀을 받지 않는다는 거야.

나중에 알고 보니 본부에서 연락하게 되면 연락인이 신청을 받아서 합류가 되어야 하는 것을 내가 영어를 잘못 알아듣고 미리 온 거였지.

내가 시드니에 연고도 없고 갈 때도 마땅치가 않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난 작업준비 팀에서는 일단 그날 하루는 어디에서든 숙박을 하고 다음날 다시 전화할 것을 요청했는데 아이디 번호를 묻기에 가르쳐주고 사촌동생의 친구 집으로 가게 되었어.

한국에 차이나타운이 있듯이 시드니에도 코리아타운 이라는 곳이 있더구나.

캠시라는 곳으로 조금은 변두리에 속하는 그곳은 한국 교포들이 대부분 거주한다고 하였는데 일견 보기에도 한글로 된 간판들이 한국인의 거리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어.

동생친구 집에 도착해보니 아버님께서 무척이나 반가이 맞아주시는 바람에 미안할 정도였고 호주에 살게 된 일부터 불법체류 10년 만에 정식 영주권 획득까지의 인생사를 말씀해주시는데 많은 고생을 한 흔적들이 말씀가운데 구구절절이 묻어나고 있었지.

대부분의 초기 이민자들이 불법체류자로 호주 사람들이 기피하는 막노동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호주정부로서도 이러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는 만큼 적당히 묵인도 해주었으며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말도 통하게 되고 생활도 안정을 찾게 되는 시점에서 영주권을 인정해 준다는 거야.

나보고도 어떻게든 이겨내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시길 처음부터 못한다고 하지 말고 일단은 할 수 있다고 얘기를 해서 취직부터 해놓고 기술을 터득하고 나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하시더구나.

호주 이민당국에 등록된 한국인 이민자 수가 약4만 명이고 불법 채류자까지 포함하면 10만 명은 넘을 거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호주의 이민자 포함한 전체인구가 천8백만 명인 것을 감안 한다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분으로부터 여러 가지 호주의 이민사와 역사를 전해 들으면서 시드니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어.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전화를 했더니 대만본부에 확인절차를 마쳤는지 호주동수 두 분이 나를 데리러 와서 동생과 헤어진 후 함께 시드니 시내모처에 자리한 선행사 준비 팀에 합류를 하게 되었지.

시내중심가에 위치한 그리 크지 않은 빌딩이었는데 수위나 경비도 없이 무인 자동 개폐기만이 빌딩을 지키고 있는 것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일이라서 참으로 신기하더구나.

비밀번호 몇 개를 누르고 나니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데 내부시설물 역시도 그러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화장실과 샤워장헬스클럽까지도 모두 자동응답기로 되어있어서 외부 사람들은 번호를 모르고서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어있으니 인건비를 많이 줄일 수 있으리라 여겨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빌딩이 죽어 있는 것 같은 삭막함이 왠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어.

마치 내가 외계에 온 기분이 들었고 샤워를 하러 갈 때마다 건물이 너무나 차갑게 느껴지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귀기감까지 들어서 정이 가질 않았지.

역시 사람은 사람의 온기가 필요한가 봐.

아직까지 상세한 선행사의 일정들이 준비단계에 있는 만큼 제한된 인력만이 필요했었는데 불구하고 내가 합류를 했으니 어찌 보면 그들로서는 황당했을 거라 생각이 되었어.

하지만 일단 국외조본부에 내 아이디를 조회한 결과 본부로부터 합류를 시키라는 연락이 온 만큼 경위야 어떻든 나 역시 워킹 팀이 된 셈이었지.

이러한 일은 일반적으로 보게 되면 결코 있을 수가 없는 것이 내가 영어도 되지 않는데다가 컴맹이고 게다가 시드니 지리도 모르지어느 한 가지도 내가 그 자리에 합당한 인력이 될 수가 없었지만 신의 안배는 정확히 그 시간 그 장소에 내가 있게 만들었던 거야.

아들아!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내가 작업 팀으로서는 결코 반가운 존재가 아니겠지만 내가 그곳에 자리 한데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인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모르겠다고?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보도록 해.

뉴욕의 시내한복판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날개 짓을 한 것이 태평양에서 태풍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나비이론이 있어.

내가 불청객이 되어서 그곳에 자리한 듯 했지만 나중에 내가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많은 일을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지금 역시 그때의 경험을 너에게 말해 줄 수 있으니 그 당시 내가 필연적으로 그곳에 있어야 하지 않았냐 이거야.

이런 이유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결코 우연히 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

만약 우연은 없고 필연만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것인데 모든 사람들이 정해진 삶을 살아야 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아들아!

우리에게는 언제나 선택의 순간이 주어지고 있고 수많은 선택을 하고 있지 않니?

너 역시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를 가기 위해 차를 타는 것부터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버스를 탈까택시를 탈까아니면 걸어갈까등의 선택을 하게 되지 않니그럴 때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되는 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때가 왕왕 있다 이거야.

가령 시간이 많고 돈을 아껴야 하겠다 싶다면 걸어가는 선택을 할 것이지만 네가 시간이 촉박하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탈것이란 거지.

이렇게 순간순간이 모두 자유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운명적으로 되어있는 것이 우리가 모두 하나로 역어 져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거든.

앞서 얘기했다시피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너는 요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 프로그래밍이 되어있다는 거야.

너와 네가 알거나 모르거나……

혹은 사람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어려운 것 같지만 살다 보면 많은 일을 겪으면서 알게 되는 만큼 때가 되면 느껴질 것이니 조급하지 말고 우선 내가 경험한 일들에 집중해보도록 해.

그때까지도 선행사를 위한 어떠한 일도 확정된 일이 없이 컴퓨터로 준비를 하는 것이 일의 대부분이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명상밖에는 없었기에 워킹 팀이 임시로 잠을 자기도 하고 명상을 하는 방에 앉아서 오로지 명상만 하고 있었는데 건물 안인데다 날짜 감각도 잃어버렸고 내가 처음 출발한 날짜도 모르고 있었으므로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어.

그렇게 며칠인가 지나고 시드니 동수들이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단체명상을 하는 날이라 다들 참석하게 되었던 거야.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당시만 해도 따로 명상센터가 없어서 백여 명의 시드니 동수들이 단체명상을 하려면 실내체육관을 빌려서 해야 했고 그날 역시 다들 체육관 앞에 모여 있었어.

언뜻 보기에도 이백 명은 넘을 것 같은 동수들이 보였는데 아마도 선행사 준비 때문에 대만에서 지원 차 오신 분들과 각 지역에서 미리 오신 분들이 있었던가 봐.

나중에 알고 보니 다들 시드니에 거주하는 동수들 집에서 숙식을 해가며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는데 나처럼 연고도 없이 워킹 팀에 합류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어.

그날 단체명상과 함께 선 행사 준비에 따른 여러 가지 임무를 배정 받기도 하는 날이어서 평상시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왔었던 모양인데 가만히 살펴보니 낮이 익은 얼굴이 보이는 거야.

나를 연락인 이 되게 만드신 관음사자가 선행사 참석차 오셨던 것이 아니겠니.

얼마나 반갑던지 서로 손을 덥석 잡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인사말 외에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더구나.

마음 같아서는 내가 그간에 겪어야만 했던 일들을 구구절절 말씀 드리고 하소연도 하고 싶었지만 언어소통에 한계를 느끼는지라 간단한 인사말을 끝으로 돌아서야만 했어.

그날 단체명상이 끝나고 나서부터 선행사 준비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 모든 임무가 배정되고 각자의 할 일들이 결정이 된 만큼 소식이 빠르게 전국으로 전달되었고 가깝게는 시드니 근교에서 멀리는 뉴질랜드 동수들까지 워킹 팀에 합류를 하고 있었지.

우선은 부지확보부터 시작되었고 마침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해서 선 행사가 열릴 지역을 가게 되었는데 세계 보이스카우트대회(잼버리)가 열린 적이 있던 시드니 교외에 위치한 공원이 우리가 선행사를 열게 된 곳이었어.

수십만 평은 됨직한 곳에 여기저기 구조물들이 널려져 있었고 선행사가 열리기에는 아주 기가 막힌 곳인 듯 했는데 땅이 아주 건조해 보여 물어보니 호주동수말로는 그때까지 약3년 동안 비가오지 않고 가무는 바람에 물이 아주 귀하다고 하더구나.

오랫동안 가물었다고는 해도 숲은 굉장히 우거져있었고 푸른 잔디들이 곳곳에 늘려있었는데

호주 어디를 가도 이러한 경치를 볼 수 있는 것으로 봐서 그 누구의 말처럼 세계에서 가장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을만하다고 여겨졌어.

그날 우리가 답사하고 난 후 선행사 날짜가 결정이 내려진 것 같았고 다음 주 단체명상이 끝나고 난 후에는 다들 그곳으로 몰려가 청소를 시작했으며 나는 물품구입 팀에 합류가 되어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일을 하면서 보니 이미 상당한 동수들이 암암리에 준비들을 하고 있었던 듯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물품들을 사서 보관 시키고 있었고 동수들이  모여서 대기를 하고 있더구나.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을 일하다 보니 청소가 마무리가 되고 그간에 속속 몰려드는 지원자들이 워낙 많아 더 이상 사무실로 쓰던 빌딩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기에 모두들 선행사가 열리는 공원인의 텐트 에어리어로 옮겨가게 되었어.

그렇게 물품구입 일을 하다 보니 드디어 브리즈번 동수들도 워킹 팀에 합류를 했고 그 중에서도 센터에서 같이 페인트 일을 한 적이 있던 마 선생님과 대만 동수가 눈에 띄었는데 이분들 중 마 선생님은 나와 함께 목공 일을 돕는데 차출이 되었고 대만동수는 주방장이 되었지.

대만동수는 센터 일을 할 때는 몰랐지만 이미 선행사 준비 차 호주를 오셔서 브리즈번 센터건립을 도와주시고 계신 듯 했거든.

선행사 때 주방장을 맡는다 하면 수행력이 높고 주위의 평판이 아주 좋아야만 할 수 있는 만큼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고 그분 역시 예사로운 분은 아니었던 것 같았어.

이분은 그 후에도 한국의 선행사에서 뵙게 되었는데 신비한 분위기를 가지고 계신 분이었으며 출가승들이나 대만 분들에게는 이미 많이 알려 지신 분 같았지만 아쉽게도 성도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런데 말이 쉬워 5천명의 밥을 한다고 하지 결코 장난이 아냐.

이 많은 분들이 며칠 동안 먹는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이 경험이 없고 보통능력 가지고는 결코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워낙 자주 선행사가 열리는 대만인지라 많은 경험을 쌓고 있었던 거지.

대만 국내선의 경우 오천 명은 기본이고  타이페이시 한군데만 해도 평상시 일주일에 세 번 있는 단체명상 때만 하더라도 2천명은 쉽게 넘어서거든.

더군다나 이런 중요한 국제선에서 주방장이라면 웬만한 사람은 그 책임의 막중함에 짓눌려서 아무 일도 못하겠지만 워낙 많은 경험과 지혜로서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해냈었지.

이분에게 비하면 완전 초보자인 나는 기본적인 물품 구입일 부터 시작하였어.

시간이 조금 지나자 큰 덩어리의 물품들은 구입이 모두 마무리되었던 만큼 목공 일에 투입이 되었는데 나하고 마 선생님과 뉴질랜드동수인 안톤 그리고 조장이자 목수인 호주동수 프랭크 이렇게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서 무엇인가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승님이 앉는 단상이더구나.

워낙 모든 일들이 비밀리에 진행이 되다 보니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으며 장난을 쳐가면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이 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진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아들아!

이러한 점을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

 

여러분에게 어떠한 일이 주어지면 이 일이 내게 처음으로 주어진 것처럼 영광되게 일을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너 역시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이 말을 명심하길 바라.

이러한 자세로 일을 하게 되면 시키는 사람도 기분이 좋고 무엇보다 일하는 당사자에게 아주 좋은 일이거든.

그렇게 웃고 떠드는 가운데 날짜는 흘러갔고 선행사 날이 다가왔는데 선행사 이틀 전에는 한국 동수들이 도착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구나.

조장이 알려주어서 허락을 맡고 동수들을 만나러 갔는데 얼마나 반갑든지 서울을 떠나온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마치 몇 년은 흐른 듯이 느꼈던 것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의 몇 달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가 봐.

특히나 대구에서 온 C사형은 전 연락인이 센터를 등질 때 같이 고민하고 의논하였고 태백에서 내가 단식할 때도 늘 걱정을 해주었기에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

너무나 반가워서 밤늦은 시간에도 동수들과 떠들고 얘기하다가 옆 텐트동수로부터 야단을 맞기도 했지.

그렇게 반가운 마음에 내가 저지른 실수는 내가 처해있는 현실을 망각한 것이었는데 워킹 팀에 합류를 한만큼 내가 맡은 일을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불구하고 일하는 중에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은 한마디로 무책임한 행동이었어.

게다가 명상에 대한 욕심으로 새벽2시부터 명상 홀에 가서 명상을 했더니 그날 스승님의 법문에는 330분전에는 명상 홀 출입을 금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나의 무지를 나무라시는 것 같더구나 .

아닌 게 아니라 그날 조장인 호주동수로부터 꾸지람을 받기도 했고 나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했구나 하고 생각을 했으며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리고 돌아가 하던 일을 마무리하였어.

그렇게 선행사가 진행이 되고 있는 중의 어느 날인가는 스승님의 큰 꾸지람이 있었는데  모두들 조용히 명상을 하고 정해진 명상시간이 끝날 무렵 갑자기 박수소리가 들리기에 눈을 떠보니 스승님이 들어오고 계신거야.

누군가 스승님께서 입장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박수를 쳤고 다들 명상을 하다 말고 덩달아 박수를 쳤던 거지.

스승님의 법문시간이 되어 오시는 것을 앞줄에 앉은 여자 쪽 동수가 미리 보고서 박수를 친 모양인데 스승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한 거였어.

먼발치에서 뵙기에도 화가 나신 듯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이크까지 작동이 되지 않자 스승님의 화가 폭발을 하였지.

테이블에 내동댕이치듯이 던지는 마이크가 몇 미터는 족히 날아가는 것 같더니 스승님께서 일어나서 나가버리시는 거야.

스승님께서는 명상 중에 살며시 들어와 동수들과 함께 명상에서 깨듯이 만나기를 원하셨는데 그러한 스승님의 의도를 번번이 깨버리는 동수들의 무지함에 화가 나신 거였어.

대만 선에서도 똑 같은 일을 겪었는데도 또다시 실수를 반복한 셈이었는데 스승님이 가시고 나서 모두들 침울한 가운데 명상을 하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구나.

누군가는 이같이 화내시는 스승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의 업장을 씻어주는 거라고 하는 분도 있었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화를 내시는 스승님의 행동은 진정한 겸손을 갖지 않은 분은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었어.

 

아니!

어떻게 깨달은 분이 화를 낼 수 있지요?

부처는 자비로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화를 낸다는 것은 범부와 다를 것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요?

 

여러 가지의 질문을 네가 하고 싶겠지만 잠시 내말을 들어보렴.

내가 스승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이 최상의 겸손함을 가지신분의 행동이라고 보는 이유는 우리가 화를 낼 때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면 절대 화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어.

게다가 자신의 위치가 스승이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거침없이 마이크를 집어 던질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지.

만약 화를 내게 되면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어서 가식적인 행동이 나오게 되는데 그러한 일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이 상대를 향해서 쇠몽둥이를 날릴 수 있는 스승의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을 아시는 분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

아들아!

너는 이해할 수 있겠니?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몰라.

그래서 옛날부터 스승을 만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고 했으며 깨달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만나기도 어렵다고 했을 거라 여겨져.

어찌 어찌 인연이 되어 왔다가도 스승의 이런저런 행동과 말에 실망하여 돌아서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동수들끼리도 상처를 주고받아서 등을 돌린 예가 무척이나 많은 것을 보면 스승을 만나기도 어렵고 깨달음을 얻기까지 한 길을 가기는 더 더욱 어려운 것 같아.

앞으로도 내가 격은 많은 일들을 통해 알 수 있겠지만 말로만 듣는 것보다 수행의 여정에서 겪어야 하는 장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러한 어려움에서 이겨내는 방법은 오로지 스승께 매달릴 수밖에 없기에 많은 경전에서 스승의 중요성을 그렇게나 강조하고 있는 거야.

실지로 인도에서는 하느님과 스승 중에 어느 한쪽을 택하라면 주저 없이 스승을 택한다고 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가 있을 거라 생각해.

우리의 시각으로 깨달은 분들을 평가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일인 것만은 분명해.

그때의 스승님의 모습 역시도 감히 내가 판단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단지 내 개인적인 생각 일뿐이야.

다음날은 동수들과의 대화가 있었고 어떤 동수가 불법체류에 대한 스승님의 의견을 물었는데 스승님은 원래 국경이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이지만 일단 국가라는 개념이 있고 법이 존재하는 이상 법에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말씀을 하셨어.

가끔씩 동수들과의 대화를 하실 때마다 느끼는 점 한 가지는 똑 같은 질문을 해도 누구에게는 아주 부드럽게 안아주시고 심지어 함께 울기도 하시는가 하면 어떤 이는 아주 냉정하게 자르듯이 무안을 주시고 심지어 어떨 때는 쫓아내기까지 하실 때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스승님께서 아시고 계신 때문이라고 여겨지기도 해.

나중에 물어보면 스승님 당신도 모르고 계시다가 누군가가 귀띔을 해주면 그제야 그 제자가 무엇을 잘못했나를 아신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온전히 신과 하나가 되어서 신이 주관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신 것 같아.

선행사기간 내내 비가 왔는데 3년 동안 가물었다는 곳을 아주 풍족하게 적셔주고 있었고 언제나 우리가 선행사 하는 곳은 비가 왔으므로 동수들에게는 신기할 것도 없었지만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는 신비함을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이 가시는 곳마다 비가 오는듯해서 스승님의 일정표를 도표로 그려보았더니 정말로 그렇더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경험한 바로는 선행사 참석 때마다 비가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거든.

어찌 되었든 그 비로 인해 그 지역에 고질적인 가뭄이 말끔히 해소 된 것만은 분명해.

선행사가 끝이 나고 마지막 날에는 스승님의 인사말씀이 있었는데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특히 공연과 법문 때 사용한 스승님 단상을 만든 동수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씀이 아주 또렷하게 들렸어.

그렇게 모든 행사를 마친 마지막 날에는 시드니 관광이 이어졌는데 그 유명한 오페라하우스하며 시내 관광 명소들을 일주하는 것을 끝으로 선 행사를 마무리 하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왔지.

막상 헤어지기가 섭섭해서 우리가 사는 브리즈번에 함께 가자고는 했지만 비행기여비가 장난이 아닌데다가 한두 분도 아니고 해서 차비가 있는 몇 분만이 함께 가기로 했어.

그 중에서도 C사형은 우리 집으로나머지는 모두s교수님 댁에서 기거하기로 하고 브리즈번으로 가게 되었는데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분들이 상당수 많았지만 내 형편이 도저히 그분들을 모실 수가 없었던 지라 뒤통수가 간질거려도 억지로 참아야만 했어.

아쉬워하는 모든 동수들을 뒤로하고 브리즈번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호주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시드니에서 브리즈번까지 약 천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인데  불구하고 비행기로 가는 만큼 2시간 정도가 지나자 도착하더구나.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에 창밖을 내려다보니 지난번 한국에서 올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바다에는 요트들이 경주를 하는 모양으로 수백 대가 떠있었고 숲에 둘러싸인 집들이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듯이 보이는 것이 꼭 동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듯해서 함께 간 동수들이 감탄을 하였어.

나 역시 처음으로 보는 아름다움에 내가 사는 곳이 저렇게나 아름다웠구나 했지.

그렇게 아름다운 호주에서의 생활에서도 수행인의 여정은 계속되기 마련이어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다음에는 또 다른 장면으로 만나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쉬어가도록 하자구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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