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들아!(24)

배가번드 2021. 7. 29. 04:22
728x90

아들아!

비행기에 탑승을 하는 순간까지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가 배정된 좌석에 앉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더구나.

사실은 내가 진정 가야 할 길이 이 길이라면 신이 가도록 할 것이고 만약 감옥으로 가야 한다면 반드시 그러한 일이 오리라 생각했기에 호주에 가서 너희 모자를 보고 싶은 바램은 있어도 신의 뜻에 따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어.

비행기가 가속을 위해 선체로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가 출발신호를 받은 단거리선수마냥 총알처럼 질주를 하더니 어느새 이륙을 하는데 비행기공포증이 있던 지라 몸이 좌석 밑으로 꺼지는 것 같은 느낌에 머리끝이 서는 것을 느꼈지만 기체가 선로를 제대로 찾아 비행하기 시작하자 내 마음도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하더구나.

9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는 하지만 밤10시께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8시쯤이면 도착하는 시간이 그리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잠자는 시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었어.

이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쁜 스튜어디스 언니들의 음료수 제공이 있었고 또다시 음료 컵들을 수거하느라 분주하다 보니 어느새 1시간이상이 지나고 있었지.

정면에 부착되어있는 대형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 한편을 보고나니 어느새 취침시간이 되더구나.

비행기공포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명상을 하다 깜박 졸듯이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어느새 아침의 여명이 밝아오는 것 같았고 승무원들이 아침을 나르느라 분주한 모습들이 보이고 있었어.

나야 채식주의자인지라 식단이 맞질 않아 토마토주스만 마시고 있었고 식사가 끝난 후 또다시 커피 한잔씩을 제공받고 나니 도착을 알리는 기장의 안내 멘트가 이어졌지.

그리고 얼마 후 도착이 되고 있었는데 항구 도시라 그런지 도시의 전경이 보이지가 않았고 안개가 잔뜩 끼어있었어.

비행기가 안전하게 활주로에 내려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건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접이식 도로가 연결되어 내리게 되었을 때야 내가 호주를 도착했다는 감동이 물밀 듯 밀려왔지.

수속과 절차를 마치고 입구를 빠져 나오는데 어디선가 쏜살같이 튀어나온 네가 내 품에 안기는데 얼마나 반갑고 예쁘던지 순간적으로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억지로 참았지 않겠니.

6개월 만에 만나는 너의 모습은 햇빛에 그을려 원래 까만 피부가 더욱 까 많게 되어있었고 네 엄마는 눈물만 글썽이고 섰더구나.

외가 식구들 또한 모두들 나와 반겨주고 있어서 마치 집에라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좌측으로 보이는 강을 보니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것이 내가 정말 호주를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들 역시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과는 다른 것 같았고 간간히 보이는 공사현장의 모습 역시 한국의 공사 현장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지.

차가 핸들이 오른쪽에 달린 것과 도로를 역 주행하는 왼쪽차선 역시 외국에 온 기분이 나게끔 만들고 있었는데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이지 영화에나 나옴 직한 그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주거환경을 가진 그런 곳이더구나.

너는 그곳에서 살았어도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던 집이 사실은 개인 집이 아니라 신학교의 기숙사를 임대 한 곳이어서 학교캠퍼스 내부에 자리한 관계로 숲이 우거지고 더 넓은 공간이 주어져 있었어.

유럽의 대부분의 사회가 그렇듯이 호주 역시도 크리스천들이 점차 줄어드는 중이었고 우리가 임대한 곳 역시도 폐교를 고려하던 중 이었던 만큼 우리에게 임대가 허용된 거야.

그곳에는 우리뿐 아니라 한국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브리즈번에 가있던 몇 가구가 타운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거든.

기독교신자가 아니면 입주가 원칙적으로 허용이 되지 않지만 외삼촌이 교회의 장로님이시라 허용이 되었다더구나.

이층구조로 되어있는 집이었는데 일층은 창고와 차고로 사용되고 이층이 주거 공간이었는데 기숙사로 쓰던 곳이라 그런지 방이 세 개나 되었고 모든 시설이 한국의 아파트처럼 편리하게 되어있어서 한국 같으면 아주 비싸겠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저렴했었어.

학생들을 생각해서 배려한듯했는데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활인혜택과 장학금제도가 아주 잘되어있어서 교육열을 높이기 위한 호주정부의 노력을 엿볼 수가 있었지.

여장을 풀고 쉬면서 생각하니 센터도 없는 곳에서 혼자 명상을 해나가야 하는데 어쩌나 싶어 내심으로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외갓집에서 나를 보고 저녁이나 함께하자고 연락이 온 거야.

이미 채식을 한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던지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것저것 많이 준비를 하셨더구나.

채식인 들이 먹는 것이라곤 나물반찬 몇 가지면 족할 테지만 음식을 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따로 준비한다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닌데다가 아무리 잘 준비해도 부족한 듯이 느껴지다 보니 뭘 만들어야 할지 고민들이 많은가 봐.

사실 간단하게 김만 있어도 되겠는데 내 마음과는 달리 다들 어려워하셔서 남의 집에 가기가 미안할 때가 더러 있지만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난감할 때가 있거든.

오랜만에 외가 식구들과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외삼촌께서 넌지시 물어 오시더구나.

부도를 내면서 가족들이 살 수 있게 돈을 준비해놓았는가 물으시기에 그런 준비는 할 생각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고 말씀 드렸더니 어리석게 행동했음을 나무라셨어.

그래서 변명을 하듯이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더니 이해가 가시는 듯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지를 걱정하셨는데 아직까지 네 삼촌이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서 우선은 생활비를 조금은 보조 받을 수 있다고 말씀 드렸지.

모르긴 해도 내가 폐를 끼칠까 염려되시는 듯해서 안심하시라는 뜻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내심으로는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 또한 있었거든.

정작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냐는 생각보다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는데 명상을 할 수 있는 센터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내게는 더욱 다급했어.

그래서 가지고 간 스승님 잡지책 뒷면을 보니 브리즈번센터 전화번호가 있기에 사촌동생을 시켜 연락을 했더니 마침 전화를 받는 분이 있더구나.

센터위치가 우리 집에서 차로 오 분 거리 내에 있다는 소리에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몸 둘 바를 몰랐어.

내가 그렇게나 감동을 받은 이유는 어떻게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네 엄마가 센터근처에 집을 얻을 수가 있었겠냐는 것이었고 모든 것이 내가오기 전에 안배가 되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

외삼촌에게 심려 하시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스승님의 안배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어.

호주에서의 첫날을 감사의 명상을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자 사촌동생을 불러 급하게 센터를 방문하였지 않겠니.

아들아!

너도 몇 번 가 보아서 알지?

집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을 따라 언덕길을 얼마쯤 올라가면 양 갈래로 갈라지는 길을 우측으로 꺾어져 양쪽으로 우거진 숲 사이 길로 차로 오 분걸어서는 약 2~30분 거리에 위치한 그림 같은 집말이야.

센터에 도착해서 거주하시는 분과 대화를 해보니 반갑게 맞아 주셨고 단체명상에 참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 주셨는데 한국여자동수가 그곳에서 결혼을 해서 지내고 있다고 하며 단체명상 때 볼 거라는 얘기도 했다고 통역을 하던 사촌이 얘기를 해주더구나.

다음날인가 단체명상에 참석했을 때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어.

그림과 같이 예쁜 집이 명상센터라는 것도 감격스러웠지만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 우측으로 방이 두 개있었는데 처음의 방은 사무실로 사용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방은 거주자가 머무는 곳이었지.

방 앞으로 따로 구조물이 없이 넓게 보이는 곳이 명상 홀 이었는데 바닥이 쪽마루로 이루어져있어서 여름에는 통풍이 아주 잘 될 듯 했고 홀 뒤편은 발코니로 꾸며져 있었어.

여기저기 걸린 스승님 법상(사진)에 합장으로 예를 갖추고 돌아서서 홀 정면을 향하는 순간,

!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니?

태백에서 내가 보았다던 스승님 화신의 모습이 그곳에 걸려 있었던 거야.

얼마나 눈물이 솟구치는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지.

 

스승이시여!

감사하나이다.

보잘것없는 저를 이렇게 호주까지 올 수 있게 해주시고 쉴 수 있는 공간과 식구들의 안전을

제가 오기도전에 이미 모든 안배를 하셨군요.

어떻게 이렇게도 완벽한 안배를 하셨는지

감탄사가 절로 납니다.

내 삶을 주관하시는 스승께 나를 바치나이다.

 

너무나 완벽한 안배에 탄복을 하고 명상이 끝이 나고 보니 앞서 말을 했던 한국여자동수를 누군가가 소개를 시키더구나.

S사저로서 원래 서울에서 입문을 한 분인데 유학차 왔다가 월남동수를 만나 결혼을 하고 살게 되었던 모양으로 영어공부와 가정생활을 병행하고 있다고 했지.

이분 덕분에 혼자서 센터를 가더라도 말문이 막혀 애를 먹거나 힘이 들지가 않았는데 몇 년을 두고 신세를 지게 되었던 만큼 내 인생에 있어서는 소중한 인연이라 할 수 있어.

이로서 내가 호주에서 명상과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춰진 셈이었으니 너무나 즐거운 하루하루가 돼야겠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한 죄의식은 결코 마음 편한 생활을 허락하진 않았고 참회의 마음으로 더욱더 명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

모든 것이 낯선데다가 영어도 되지 않고 길도 서툰데 무엇을 할 수가 있었겠니.

네가 그때 초등학교1년에 재학 중이어서 학교 바래다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기껏 산책이나 하고 센터나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

그나마 네 엄마가 경영하던 피아노교습소를 정리하고 타고 다니던 승용차를 처분한 돈으로 호주라도 올 수 있었고 중고차라도 살 수 있었기에 어딜 다니는 것은 그나마 자유롭게 다녔지만 넉넉한 생활을 할 정도는 아니었거든.

한번은 낮에 혼자서 산책 삼아서 센터 쪽으로 걸어가노라니 왼쪽 숲에서 갑자기 사람만큼이나 큰 캥거루 한 마리가 후다 닥 뛰어나오더니 껑충거리면서 도로를 횡단해서 오른쪽 숲으로 사라지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정신은 하나도 없었지만 야생캥거루를 실물로 보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더구나.

나중에 외사촌동생에게 이러한 일을 얘기를 했더니 야생 캥거루를 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면서 내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하였지.

센터에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수리를 하는 것 같았는데 금방 집을 사서 센터를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어서 못 다한 공사를 마무리 하는 중 이었던가 봐.

그래서 조금 도와줄 모양으로 머리를 열심히 굴려 영어단어 몇 개를 긁어모아서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반갑게 머리를 끄덕이며 엎-코스를 연발하더구나.

팔을 걷어 부치고 페인트칠을 돕는데 아무리 조심을 해도 페인트가 여기저기 묻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결국 옷을 버리는 바람에 네 엄마에게 혼은 났지만 내가 센터를 위해 뭔가를 했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호주 동수들과 친해질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어.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만국공통어인 바디 랭귀지가 있는 만큼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못 알아듣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기면 되는데다가 구태여 다 알 필요도 없지 않겠니.

그렇게 일을 통해서 호주 동수들과 면을 익혀가고 있었는데 호주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처음 어떤 곳을 가게 되면 그곳의 자장과 내가 융화가 되려면 한동안은 열심히 명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한국에서 지낼 때는 하루 3시간 정도의 관음명상을 한꺼번에 쉽게 할 수 있었지만 호주에서는 한 번에 한 시간 하는 것이 어렵더라는 거지.

약 일주일을 죽어라고 버티니까 그제야 한국에서처럼 제 페이스를 찾게 되더구나.

이 사실을 모를 때는 어째서 똑바로 앉기조차 힘이 들고 허리를 펼 수가 없는가 하고 의아해 했지만 힘이 들수록 이겨내야 한다는 투지로서 밀어붙였더니 어느 순간 나를 억누르는 힘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축복의 에너지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

이러한 점은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여서 자리를 옮길 때마다 힘이 들고 그곳에 적응하기까지 일정기간을 엄청난 노력을 기우려 명상을 해야 평상시 내가 갖고 있던 평온함을 찾을 수가 있었는데 한마디로 자릿세를 내야 한다고 보면 될 거라고 생각해.

이렇게 명상이 정상을 찾고 나자 내가 호주에서 지내려면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외숙모님 말씀 따라 영어 학교를 다니게 되었어.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80세가 넘으신 수녀님이셨는데 생김새가 꼭 마더 테레사 수녀님 같았고 인도네시아에서 오랜 시간을 봉사하시다 오신분이셨는데 굉장히 친절하시더구나.

처음에는 외숙모님과 네 엄마와 내가 모두 한 반에 속해 배웠는데 한 사람씩 지적을 하여 질문을 하는 통에 자존심이 센 외숙모님과 네 엄마는 도중에 포기를 하였지만 돈도 받지 않고 무료로 운영하는 영어교실이 많지 않은 만큼 나 혼자 열심히 다녔지.

그렇게 영어도 배우면서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지내던 중 몇 분의 한국 동수들이 합류를 하게 되었는데 S교수님 가족들이었어.

너도 기억나지?

가끔씩 우리 집에 놀러 오기도 했었고 너와 장난감 때문에 싸움까지 했던 형이랑 동생을 데리고 왔던 가족들 말이야.

가족들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생활하다가 아쉬람 건설이 무산 되어버리자 허탈한 마음에 공부도 하실 겸 머리도 식힐 생각으로 호주를 오게 되었다는데 한국의 동수가 브리즈번에 와있다는 소문만 듣고 무작정 오게 되었다더구나.

교수님 가족과 사우스 뱅크에 놀러 갔을 때 서양 사람들의 놀이문화나 스케일의 크기와 실용적인 공간 활용성을 볼 수가 있었는데 강변에 위치한곳에다 바다를 옮겨 놓은 것 같은 수영장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어.

빼곡히 들어찬 잔디가 늘려있는 곳에는 연인들이 수영복차림으로 선-텐을 하고 있었고 갈매기들이 음식물 찌꺼기를 얻어먹느라 겁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날고 있었으며 물이 맑아 푸르기까지 한 수영장물은 모래사장과 자갈을 깔아놓아서 아이들이 놀기엔 그저 그만이었지.

아들아!

다른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아도 이곳은 너도 기억이 날 거야.

그렇지?

게다가 옆의 작은 동물원은 사람들이 처음 입장할 때는 지하로 내려가는 줄도 모르게 설계되어 있어서 수중의 생태계를 볼 수 있게 수족관처럼 되어있더니 올라와서 보니 아래층과 연결이 되어 있어 놀라게 만들어 놓았더구나.

아이들이 늪지 생물들이 물속에서는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있게 설계를 해놓은 것을 보면서 어쩌면 하나를 만들어도 저토록 이나 신경을 썼을까 싶었어.

그렇게 잘 꾸며놓은 수영장과 작은 동물원 옆에는 장이 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각종 노점 상인들이 거리를 배회하여 도시미관을 해치지 않도록 배려를 하고 있어 또 한 번 놀랐으며 그 옆으로는 컨벤션 센터가 자리 하여 각종 문화행사가 열릴 수 있도록 하였더구나.

그 같은 배려는 모든 문화행사나 민속 축제들이 한군데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여 관광객들이나 처음도시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찾기 쉽게 배려 한 것 같았지.

그렇게 서양인들의 문화에 탄복을 하고 있을 때 교수님께서 수영을 하러 가자고 하셨을 때 나는 수영을 하지 않겠노라 말씀을 드렸더니 왜 그러시는가 물으셨어.

차마 몸에 문신이 있어서라고 말씀 드리지는 못하고 스승님 핑계를 대었지.

 

물이 업장(카르마전달이 제일 빠릅니다.”

사람이 많고 좁은 곳에서는 되도록이면 수영을 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긴 하지만 공간이 넓은 바다나 호수 같은데 사람이 적은 곳이면 괜찮지만 사람 많고 좁은 곳에서의 수영은 자신이 충분히 힘이 생기기 전에는 그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을 내가 직접 목격을 해 봐서 알아.

어떤 이들은 스승님의 이러한 법문을 듣고서는 비판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장님이 코끼리 코털을 만지고 코끼리가 코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어.

아들아!

너희 반에도 일등 하는 아이들과 꼴 등 하는 아이들의 차이가 있지?

우리 스승님의 제자들 역시도 근기들이 다 같지가 않아서 아래서부터 위까지 많은 법문이 있거든.

그래서 부처님 법이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니.

처음 입문하신 분들에게는 스승님의 법문이 자신의 힘이 생기기전까지는 상대방 눈을 쳐다봐서도 안 되며 제사를 모시지도 말고 남에게 절 조차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을 위해서 라면 자신의 업장을 생각하지 말고 봉사하라는 말씀을 하셨어.

물론 가족들이 마음 아파하면 제사나 절을 하고 명상을 평상시보다 조금 더 많이 하면 된다는 말씀도 덧붙이고 계시기도 해.

아들아!

내가 몇 해 전 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상복을 입고 수백 번 절을 했었고 제사도 모셨으며 산소까지 가서 남들이 하는 만큼 예를 갖추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은 스승님 말씀대로 가족들을 위해서 나 자신을 가족들에게 맞추어주고 나중에 더욱더 명상을 많이 하면 된다는 생각과 절을 하는 대상을 부처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어.

우리가 보통 절이나 교회에 가서 부처님 상이나 예수님 상또는 마리아상을 보고 절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형상에 의미를 두고 절을 하지만 원래 불상이나 예수님과 마리아상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 안에 내재한 부처와 그리스도를 일깨우는데 목적이 있고 절을 할 때 자신내면의 부처와 그리스도에게 절을 한다고 생각해야 하거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상에 어떤 힘이 있어 축복을 내린다고 여겨서 자신의 내면을 일깨울 생각들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불상에다 절을 하는 거야.

그래서 어느 선사는 불상을 도끼로 쪼개어서 땔감으로 썼다는데 한마디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서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신 거지.

그 당시 내가 절을 한 대상도 그 사람 안에 내재한 부처에게 절을 했던 만큼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내가 가족들의 생각에 따른다고 해서 스승님의 가르침인 오계를 어긴 것은 아닌 만큼 문제가  없었거든.

만약 오계를 어겨야 하는 경우라면 단호히 거절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얼마든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때 교수님이 수영하자고 하신데 거부를 한 것은 스승님의 지시나 말씀보다는 어린 시절 철없이 새긴 문신 탓이었음을 지금에야 고백하고 싶구나.

아들아!

언제 어디서나 그렇지만 또 다른 나의 경험을 위한 신의 안배는 호주에서 조차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막을 내리고 다음에는 또 다른 신의 안배를 살펴보도록 하자구나.

안녕!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아!(26)  (0) 2021.08.04
아들아!(25)  (0) 2021.08.02
아들아!(23)  (0) 2021.07.26
아들아!(22)  (0) 2021.07.24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21)  (0) 2021.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