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들아!(23)

배가번드 2021. 7. 26. 04:12
728x90

아들아!

오늘은 내가 태백센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로 장을 열어보자꾸나.

겨울햇살이 명상 홀 앞을 눈부시게 수놓던 어느 날인가 경찰관들이 방문을 했어.

그때 당시 전국의 각 사찰이나 기도원을 중점적으로 검문을 하고 있었고 우리센터에도 그러한 검문을 하게 되었던 건데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부도가나서 수배령이 내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괜스레 불안한 것이 검문 나온 경찰관이 나를 잡으러 온 것같이 느껴지더구나.

그래서 사람은 죄 짖고는 못산다고 하나 봐.

자수를 할까 하는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처음계획대로 네 삼촌이 장사를 계속하면서 합의를 보기로 한만큼 그럴 수도 없었고 계속 그곳에 있다가는 센터에 피해를 줄 수도 있겠다는 나름의 판단으로 태백에서 내려갈 수밖에 없었어.

내가 천국 같은 태백센터를 내려오게 된 이유로는 호주로 피신했던 네 엄마에게서 온 전화도 한몫을 했고 네 삼촌이 공장경영의 어려움을 호소해오기도 했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었지.

네 삼촌이 타고 온 차에 몇 분의 스님들을 모시고 내려오며 공장 일에 대한 그간의 보고를 듣고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들을 얘기해주고 네 삼촌을 돌려보낸 후 대구센터를 갔을 때 이미 센터가 이사를 해서 공사까지 마친 후라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있더구나.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젊은 동수들이 갈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머물고 있을 때 이었기에 다들 센터 건립에 품을 팔아서 식당과 조그마한 방까지 멋지게 꾸며놓았던 거야.

센터 이사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던 터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지만 내가 부도가 나서 피신해있다는 소문이 나있었던 관계로 센터에서 만난 한 분의 동수는 나에게 심리적인 압박감을 상당히 주셨어.

부도를 냈으면 해결을 해야지 왜 피해 다니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인 말과 상념의 화살을 날리는데 속으로 화도 났지만 내 사정을 몰라서라고 생각했고 그분의 생각도 전혀 틀린 것도 아니어서 차라리 내가 센터에 머물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센터를 나와 버렸지.

태백에서도 나로 인해 센터가 피해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해서 내려온 것이고 대구센터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떠날 생각을 한 것이어서 그분에게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고 단지 내 입장을 말씀 드리지 못한 때문이라 생각 했던 거야.

어디로 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단식할 때부터 걱정을 해주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시던 또한 분의 스님이 생각났는데 나에게 연락인 선거에 나가라고 말씀하시던 비구니 스님이셨어.

그렇게 태백을 내려와 대구센터를 거쳐서 비구니스님의 암자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필연의 연속은 계속되고 있었지.

그 스님암자에 도착해서 단식을 할 때 분식점을 차려 실컷 먹어보리라 생각했다고 말씀 드렸더니 스님께서 가래떡을 뽑아 오셔서 얼마나 먹었던지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먹었어.

스님 역시 단식을 해보셨다면서 자신이 36일간을 단식을 했던 얘기와 잠을 자지 않고 잠을 조복 받기 위해서 기와지붕 위에까지 올라가 수행한 얘기까지 해주셨는데 그 모든 것이 스승님을 만나 뵙고 나니 아무 소용없는 짓이란 것을 깨우쳤다면서 스승님만 따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거듭 강조를 하시더구나.

스님이 계신 암자 역시도 다른 수행 터와 마찬가지로 얘깃거리가 많았는데 원래 어느 문중의 제실로 사용하던 것을 비구 스님들이 빌려 수행하시다 워낙 터가 센바람에 자신들은 포기하고 비구니스님께 추천하였던 곳이었어.

처음 왔을 때는 뱀들이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고 집도 무너질 듯 낡아서 하룻밤만 자고 내려갈 참으로 그 밤을 보내는데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길을 막더라는 거야.

산신령이 선 몽을 주는구나 하고 생각하신 스님께서 마음을 고쳐먹고 암자를 수리하고 마을 분들에게 홍법을 한 결과 다음해 초파일 연등행사 때는 등이 수십 개로 늘어났고 또다시 선

몽을 했는데 이번에는 호랑이가 새끼를 두 마리나 데리고 나타나더라는 것이었어.

그 스님 말씀으론 산신령께서 감사의 인사로 선 몽을 주신 것 같다고 하시더구나.

그 스님이 계시는 암자에서 마을까지는 걸어서 40분은 족히 걸리는데 아무리 스님이라고는 하더라도 여자의 몸으로 밤길을 걸어 내려가니 마을 사람들이 탄복할 수밖에 없었고 스님의 법력이 범상치 않다 생각한 마을 분들이 하나 둘 신도들이 되었던 거지.

이 스님과 비슷한 얘기들도 많고 나름의 깨달음을 얻으신 분들이 많겠지만 한 소식이 뭔지는 몰라도 내가보기에 이 스님은 두 소식은 넘게 하신 분 같았어.

그 스님암자에 잠시 머무는 동안 불교관련 책도 보고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중국에서 오신 관정대법사가 아미타세계에 갔다 온 얘기책도 그곳에서 보았지.

이 얘기는 관정대법사란 분이 선정에 들어서 아미타세계와 관세음 보살님이 계시는 곳 등, 사후에 사람들이 각자의 의식세계에 따라서 가게 되는 9품으로 나뉘어져 있는 곳을 스승을 따라서 갔다 와보니 6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얘기였어.

참고로 말하지만 이분은 중국에 실존하고 계시는 분이야.

스님의 암자에는 그뿐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더구나.

스님의 암자에 갈려면 두 가지의 길이 있는데 한곳은 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들어놓은 길이고 마을을 통해 나있는 길은 저수지를 끼고 돌아서 한참을 등산하듯이 해야 다다를 수 있는데 가다가 보면 신라 때 있었다는 절터가 저수지를 바라보는 곳에 있어.

규모로 보아서 꽤 컸던 것 같았는데 저수지 아래서 위로 바라보면 그 절터 뒤로 풍수에서 얘기하는 금계포란형 의 자리가 보이는 것이 누가 봐도 명당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마을 박 씨 문중에서 6대째 산소를 썼는데 내리 망하고 있다는 거야.

하도 괴이해서 풍수 하시는 분에게 물어보니 산소주인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했대.

아들아!

너는 이런 말이 이해가 가니?

그렇게 얘기한다면 명당이 무슨 소용인가 말이야.

사람이 중요하다는 소리라면 훌륭한 사람이 묻히면 그곳이 명당이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냐 이거지.

개인적으로 장사를 다니며 제일 불만이었던 것이 산소 문제였었는데 어느 명산을 가 봐도 좋은 자리에는 예외 없이 산소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으며 서민들에게는 법적으로 공동묘지나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안치하거나 가족묘를 권장하면서도 소위 말하는 위정자들은 모두가 대형분묘를 고집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 데 없어.

아들아!

아빠가 죽거든 화장해서 산에다 뿌려라.

바다나 강에 뿌리면 오염될지 모르거든.

꼭이다.

!

얘기가 잠시 마을로 갔나본데 원위치로 돌아가 보자꾸나.

스님의 암자에서 지내는 중 대만 선 행사 때 나에게 채식 햄을 팔았던 사형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나를 만나 긴히 상의를 했으면 하기에 네 삼촌에게 몇 가지 공장 일을 마무리해주고 급하게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지.

서울을 도착해보니 3~4평 됨직한 방에 동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차를 마시는데 다들 국제선에서 일면식들이 있다 보니 따로 인사가 필요 없이 자연스레 합석을 하게 되었어.

그곳에서는 주로 나보다 나이들이 적은 동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나이만 어렸을 뿐 정신세계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높은 것 같았고 다들 나보다 입문한지도 오래된 분들이라 센터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듣게 되었지.

그러고 보면 여기저기 내가 가는 곳마다 스승들만이 있었던 것 같아.

아들아!

배우고자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스승이라는 것은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참으로 사실이었어.

매 순간이 기적 아닌 순간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것 같지만 중요한 얘기인 만큼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도록 해.

내가 하는 일이 우물을 파는 일이라고 가정했을 때 누군가의 부탁으로 돈을 받고 일을 했으므로 나로서는 그 일을 마치면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어느 날 누군가는 목이 말라 죽을 지경에서 그 우물을 먹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우물이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겠냐 말이야.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너희들이 숙제로서 어떤 일을 조사해오라고 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찾지를 못하다가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누군가가 올려놓은 자료로 인해서 숙제를 하게 되었을 때 기적과 같이 숙제를 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란 것이지.

물론 자료를 올려놓은 사람은 절대 네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할 테지만 어찌 되었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라는 거야.

아직까지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으니까 내 경우를 얘기해줄게.

총각시절 한동안 자살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던 어느 날이었는데 육교 위에서 도로위로 떨어지려고 생각하던 중이었지.

그런데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다리 없는 분이 작은 손수레를 바닥에 엎드린 채 밀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기 위해 노래를 하는 소리였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심하게 얻어맞는듯했고 자살하겠다는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길로 사촌형님을 찾아가서 취직을 하고 그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날까지 삶을 이어오게 되었단 말이거든.

어때!

그날의 앵 벌이 아저씨가 내게 기적을 준 것이 아니겠니?

내게만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신 게 아니라 네가 태어나도록 해주신 기적도 일으킨 셈이 아니겠냐 말이야.

그분이 알거나 모르거나……

너와 내가 또는 사람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이와 같은 점은 스승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역시 마찬가지여서 알게 모르게 다들 나에게 스승의 역할들을 하고 있으며 내가 배우고자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도 스승이 있으며 스승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거야.

그때 서울에서 만난 나보다 젊은 동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므로 나이가 많고 적고 학벌이 높고 낮고를 떠나서 그들은 내게 스승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한 셈이었어.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지 알 수가 있었고 그렇게 힘겨운 삶을 전혀 힘들지 않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

그렇게 좁은 방에 모여서 도에 관한 이야기와 차를 마시며 밤을 새우기를 여러 차례 하던 중 한번은 10여명이 한꺼번에 잘 때도 있었는데 자다 보니 누군가의 발이 내입에 닿아 있은 적도 있었고 동수 한 명은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는 이도 있었는데 명상으로 날을 세고 식당으로 출근을 하였다가 돌아오면 또다시 명상으로 밤을 밝히는 생활을 몇 달째 이어나가고 있었어.

캄보디아에서부터 그러한 생활을 계속했다고 하는데 조금도 피곤해 하거나 힘들어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이 세상에는 별스러운 수행자가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내가 모른다고 해서 없다고 하거나 믿을 수 없다고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해.

나 역시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이러한 사실을 믿지 않았거든.

이제는 이와 같은 일들을 워낙 많이 보아서 누군가 이상한 일을 말할라치면 일단은 인정을 하고 보는 거야.

서울에서 머무는 동안 채식 햄 장사하는 동수로부터 채식 햄의 유익함과 전망을 많이 듣고 채식 햄 장사를 하고자 권유를 받기도 했기에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여러 가지 노력도 기우려 보았지만 내 형편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대구로 가서 아는 분들에게 얘기도 해보고 네 삼촌공장에서 협조를 받아보기 위해서 갔더니 다들 어렵다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채식 햄 장사 건은 없는 걸로 하기로 했는데 네 삼촌의 말로 채권자들이 와서 보채는 바람에 아주 힘이 든다는 말과 내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욱 합의가 어렵다고 하면서 호주로 가길 권유하더구나.

어차피 재기가 어려워진 이상 공장에 미련을 갖지 말고 차라리 호주의 가족들과 합류를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을 것 같다는 네 할머니의 말씀과 그 당시 태백에서부터 가족들이 있는 호주로 가길 권유하시던 스님의 조언도 있고 해서 결국 호주 행을 결심하게 되었지.

어떻게든 피해 다니며 재기의 길을 모색하려고 생각을 했지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더 이상 그 길이 아니었던 것 같았어.

막상 호주 행을 결심하고 나자 여러 가지의 일들을 정리를 해야 했기에 네 삼촌과 할머니를 너희 외갓집으로 오라고 한 후 대책을 세우기로 했는데 먼저 네 삼촌에게 일단 나하고는 별개인 만큼 채권자들이 찾아와도 책임을 지겠다거나 수표에 사인을 해주거나 하지 말고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 갈수 있는 데만 전력을 쏟으라고 하였지.

네 할머니께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죄송하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었는데 네 할머니는 내가 신경 쓸 까봐 걱정 말고 떠나기만 하라 시더구나.

내가 호주로 가지 않으면 밤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애를 태우신다는 네 할머니의 말씀에 어떻게 거역할 도리가 없었어.

모든 일을 당부하고 떠난다고는 했지만 내가 과연 호주를 갈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지.

기소중지가 내려있는 내가 한국을 벗어날 수 있는지 법적인 지식이 아주 없는 나로서는 상당한 모험이었고 어차피 한번쯤은 겪어야 할 상황일수도 있다고 여긴 터라 과감하게 밀어붙이기로 했어.

대구센터의 동수에게 혹시 내가 떠난 후 10일 내로 전화가 오지 않으면 교도소로 면회를 오라 우스갯소리까지 하고 작별을 했지.

서울에 도착하여 그 동안 함께 지내던 동수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공항으로 향했는데 네 분이나 따라 나와 배웅을 해주시더구나.

명상을 시작한 후로 여러 번 해외를 다녀온 후라서 비행기 공포증으로  떨릴 이유는 없었지만 죄인의 몸이라 경찰서로 직행하게 될까 봐 그런지 속마음으로 무지하게 떨렸어.

미리 호주에 연락을 해두었기 때문에 식구들이 다들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니 가고 못 가고는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해도 조마조마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지.

아마 우리의 인생 역시 이와 같을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잘 모르겠다고?

아들아!

많지 않은 세월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다 보니 삶에 있어서 한 가지 법칙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더구나.

왜 이런 경우가 있지.

앞날을 알 수 없어 불안한데 불구하고 안하고 안 되는 그러한 경우들 말이야.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 역시도 그러한 법칙의 적용을 받게 됨은 마찬가지여서 부도가 나고 친구에게 갔다가 다시 센터로 태백으로 해서 또다시 천국 같은 태백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센터에 머물려고 해도 동수 분의 파장이 나로 하여금 센터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으며 비구니스님의 암자로 해서 서울로 갔다가 또다시 다음으로 계속되는 삶의 여정들이 똑 같은 필연의 연속선상에 있더라는 거지.

그렇게 오늘까지 살아나오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 자신 안에 내재한 내면의 신이라는 얘기가 아니겠니.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또는 나 자신이 알거나 모르거나……

아들아!

이제 이해가 가니?

만약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야.

내가 겪어 나온 삶의 여정에서 일어난 감동들은 나만의 것이지 결코 네가 똑같이 느낄 수는 없거든.

다만 네가 언젠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같은 말이 실감이 가리라 여겨지는 만큼 우선은 내 여정을 따라와 보기만 해.

좀 더 내 과거의 여정이 깊어지게 되면 우리가 필연이 무엇인가를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도 같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며 다음 장을 위한 휴식을 갖도록 하자꾸나.

오늘도 변함없이 안녕!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아!(25)  (0) 2021.08.02
아들아!(24)  (0) 2021.07.29
아들아!(22)  (0) 2021.07.24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21)  (0) 2021.06.10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20)  (0) 2021.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