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들아!(26)

배가번드 2021. 8. 4.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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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기나긴 내 인생의 여정만 얘기하면 지겨운 것 같으니까 여기쯤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해.

깨달음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산으로 향하게 하며 인도로, 태국으로, 티베트로, 향하게 하고 멀쩡한 직장과 사업, 행복한 가정을 송두리째 남겨두고 떠나게 하는지, 과거의 깨달은 성인들이나 스승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다들 한번쯤은 생각해보았을 것이고 앞으로는 너 역시 한번쯤은 생각하게 되리라고 보이고 있는 만큼 분석 해부토록 해보자꾸나.

배움이 적은 나로서는 깨달음의 사전적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를 깨우쳐서 알게 되는 것을 이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 같은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할까?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으리라고 보여.

그런데 어떤 것이 깨달음인가 하는 점만 얘기해보라고 하면 아마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생각과 각자가 느껴본 깨달음에 대한 얘기를 사람숫자만큼이나 많이 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한 가지 세상의 지식과 확실하게 구분 지어 지는 점은 있어.

지식은 창고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는 해줘도 보물을 쓸 수 있게 할 수는 없지만 깨달음은 창고의 보물을 마음껏 쓸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달라.

예를 들어보면 먼저 아버지하나님의 왕국을 찾으라. 그러면 그 모든 것이 더해지리라는 성경말씀을 보면 이와 같은 말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보고 인식하는 것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왕국을 직접 찾는 행위를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보면 될 것이고 왕국에 도착하는 것을 왕국을 찾았다는 표현을 할 것이 아니겠니.

많은 경전이나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깨달을 수 없는 것은 마치 사과가 맛있다고 얘기만 듣는 것과 직접 먹어보는 것과의 차이라 할 수 있어.

과거 내 스승님께서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어느 장군 한 분과의 대화는 그것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데 잠시 살펴보도록 해.

먼저 장군께서 말씀하시길,

 

깨달음이란 사과를 어떨 때 먹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배고플 때 먹는 사과와 배부를 때 먹는 사과의 맛이 틀리듯이 믿음 역시도 세상의 덧없음을 알고서 어떤 믿음을 갖는 것과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릴 때의 믿음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며 여러 가지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을 설명을 하시자 스승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어.

 

아주 잘 아시고 계시는군요.

많이 아셨으니 이젠 직접 먹어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대화를 마치시고 떠나시는 것을 보았지.

이 대화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사과를 먹으면 어떤 맛이다 또는 어떤 분위기에서 먹어 보면 맛이 어떻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직접 먹어보는 행위를 깨달음이라고 한다는 거지.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고 가르침들이 있어도 사람들이 목말라 하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 때문 인거야.

만약 어느 누군가가 지식으로 안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고 해서 틀린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야기로 듣는 것과 먹어보는 차이는 있다고 할 수 있어.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경계나 경지에서 듣고 보는 것들이 모두들 환상이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들을 쉽게 하는데 본인들이 직접 사과 맛을 보지 않았다고 보면 돼.

앞에서 말했던 보물창고와 같이 볼 수도 있는데 보물창고에 보물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열쇠를 주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 말씀이지.

만약 지식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헤매거나 진리에 목말라 할 이유가 없는 것이 이미 이 세상에는 산더미처럼 많은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정보들이 넘쳐 나고 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것은 한마디로 지식으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니.

그렇다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냐고?

그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연과 자신이 이 길이 나에게 맞겠다고 선택해서 한걸음씩 정진을 해야 한다 이 말이야.

마치 산을 등산하듯이……

지난번에도 이야기 했다시피 수많은 등산로 중에 한군데를 선택해서 간다는 거지.

지름길을 선택하던 우회하는 길을 선택하던 그것은 순전히 무료이고 자유임은 물론이지.

아들아!

내가 가는 등산로가 아무리 나에게 빠른 길이라고 해도 다른 이에게 강요는 하지 않고 심지어 아들인 네게조차 종용하지 않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예를 들어봐야 할 것 같구나.

어떤 한 사람이 평상시 열심히 도를 닦아서 사후에 높은 천국을 올라가게 되었어.

워낙 신실하게 신을 찾고 열심히 수행을 했으므로 당연히 천국을 갔을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그 다음 이어지는 당연한 순서일거야.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은 한 가지 요청을 하는데 생전에 자기와 절친하게 지내든 친구를 생각하고 아직까지 사바세계에서 온갖 고통을 맛보고 있는 친구를 구해주기를 간청을 했어.

하나님은 절대적인 자유를 가진 분인 만큼 허락을 했고 세상으로 가서 친구를 데리고 천국에 와서 지내게 되었지.

처음 한동안은 신기하고 재미있게 여기고 좋아 하던 친구가 몇 달이 지나자 재미없어 하며 다시 지구로 돌려보내달라고 호소를 하기 시작해서 천국의 친구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지상에 살 때는 도박도 있었고 담배, 술도 있었으며 여자는 물론이고 그밖에도 즐길 거리가 무궁무진했었는데 천국은 너무나 심심해서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는 거였어.

결국 그 친구는 천국에서 머물지 못하고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는 얘기지.

내게 아무리 천국이라고 해도 다른 이들에게 까지 천국일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해.

술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천국은 반드시 술 담배를 주어야 천국이라고 여길 것이고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여자를,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도박을 하도록 해주어야 천국이라고 여길 것이 아니겠어.

불교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9품으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이 있는데 9가지의 사후세계를 선정에 들어가서 올라가본 경험을 기록한 이 책은 중국의 관정대법사란분이 선정에 들어서 6년간을 의식세계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그곳에서 본 내용들을 책으로 엮어서 각 사찰에다 보낸 것인데 보신 분들도 더러 있을 거야.

여기에서 책 내용을 다 쓸 수는 없고 내용을 간추려보면 법사께서 동굴에서 선정에 들었는데 돌아가신 자신의 스승이 나타나 같이 의식의 각 경계를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고 돌아오니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있더라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보면 각자가 이룬 의식의 단계 따라서 경험하는 세계가 다름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의식의 경계들을 나눈 것을 9품이라고 한다는 거지.

그곳에서 비교적 낮은 단계의 극락세계를 보면 평상시 자신이 좋아하던 것을 연꽃 위에 앉아서 온갖 것을 즐기는데 살아생전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마음껏 쓰면서 즐기고 잔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이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을 마시면서 각자가 좋아하는 향락을 마음껏 누린다는 거야.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렇게 즐기는 동안 고래 등 같은 집과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장소들이 연꽃 위에 펼쳐져도 그 부피와 공간들이 전혀 모자라지 않아.

그러다가 시간이 되어 종이 울리면 모든 상황들이 사라지고 돗자리를 말아 쥐고 그 세계의 부처님께 법문을 듣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고 각각의 단계에 따라 각 경지가 모두 다르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살아있을 때의 자신이 체득한 의식의 경계와 생각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세계로 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해.

이런 점은 성경에도 이야기한 부분이 있는 걸로 아는데 내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는 방이 여러 개다 일거야.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만이 천국이고 다른 모든 믿음들은 지옥으로 보내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것을 보면 조금은 안쓰럽기까지 해.

이러한 점은 이 세상 멸망을 말하는 이들이나 외계와의 교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고 모두들 자신들이 진정한 메시아들이고 최고라고 주장하는 특징들이 있는데 사실은 다들 옳은 말들을 하고 있다고 봐.

이러한 모든 말이 옳다고 내가 감히 단정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의식들 때문이거든.

지난번에도 잠시 말했지만 본인이 자각하는 만큼의 세계가 자신 앞에 펼쳐지게 되기 때문으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법이 아니겠냐 말이지.

요즘 인터넷 서핑을 하다보면 참으로 많은 수행법과 가르침이 있고 구원자들의 홍수 속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멸망론자들까지 더해져서 그야말로 시장 통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더구나.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고 넘어갈 사실은 각자의 세계마다 거기에 맞는 고유의 주파수가 있다는 거야.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정보를 많이 쌓아두어도 본인의 파장이 그곳에 맞지 않으면 절대로 그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데 그러한 점은 외계에서 왔다는 체널러들도 얘기하고 있고 각종 종교경전에도 나와 있어.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서방정토니 아미타세계니 하는 것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에 이를 때 천사들이 나타나고 천상의 나팔소리가 들린다고 하거나 불교에서  소리를 듣는다든지 해조음을 듣는다든지 또는 소 울음소리를 듣거나 범종소리를 듣는 등의 체험들이 모두들 각자경계에서 들리는 주파수, 즉 진동음이라고 보면 되거든.

흔히들 빛이 소리보다 빠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거기에는 인식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해.

빛 또한 에너지의 빠른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필요가 있어.

아들아!

너희들이 음악시간에 음색이라는 것을 배웠을 건데 바로 이 음색이 소리와 빛이 사실은 주파수를 달리한 파장 즉 진동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란 거야.

음에 빛깔이 있다는 말은 빛과 소리가 하나라는 말이며 색이 다양하듯이 음류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는 말이 아니겠어.

그래서 각 경계마다 소리가 다르다고 하는 거지.

누구는 옴 소리 또 누구는 해조음 다른 이는 범종소리 어느 분은 백 파이프소리, 거문고소리 등등 각 경계에 따른 많은 주파수를 달리한 소리들이 있다는 것이고 본인들의 의식경계만큼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지.

어떤 분들은 사람이란 똑 같은 재료로 이로워져 있는데 틀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죽으면 모두가 마찬가지라고 큰소리치시는 분들도 많은데 솔직히 나도 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큰소리치는 사람일수록 죽기 전에 엄청난 공포심과 함께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하더라는 것은 알아.

아들아!

네 외할아버지가 평상시 아무도 믿지 않으시고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시다가 막상 암에 걸려 수년간을 병마에 시달리다 돌아가실 무렵 얼마나 극심한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는지 너도 보아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죽기 싫어서 꺼진지 오래된 육신을 붙들고 떠나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치던지 옆에서 보는 내가 안타까워서 혼이 났어.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갔다 허탕치고 올라오길 몇 번이나 한끝에 겨우 돌아가시는데 의식은 벌써 없어진 지 오래되었건만 숨을 쉬고 있으니 호흡기를 뺄 수도 없어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몸을 1시간여를 주물러드린 후에야 숨을 거두시더구나.

늘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모든 것은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고 그 누구도 방해하거나 강요해서도 안 되며 길은 열려 있는데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스스로의 결정에 달렸어.

이생을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살아가다 공포에 휩싸인 체 죽기 싫어 발버둥을 치다 죽음을 맞이하던 편안한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던 아니면 죽음이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여기던 그 어떤 것도 본인이 선택하기 나름이야.

문제는 본인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편안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란 말이지.

어떤 누군가가 아미타세계를 가기 위해서는 아미타세계의 주파수를 맞추면 되고 천국에 이르고 싶으면 그곳에다가 주파수를 맞추면 된다는 것 밖에 달리 무엇이 있겠니.

티베트 사자의 서 에 보면 사후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는데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구나.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수행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막행막식을 일삼고 있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일들이 있는데 사후에 진정한 자신의 갈 길을 아는 이는 어떻게 해도 관계없겠지만 이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해탈을 원하는 이는 거기에 걸맞게 공부가 필요함을 알 필요가 있어.

사람들은 어떤 일을 증명하길 좋아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외에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신통을 가진 사람에게 혹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해탈을 하려고 공부를 하는 사람은 절대 신통에 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많은 스승들이 얘기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신통으로는 해탈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이렇게 분명한 증거가 있어도 사람들은 누군가 깨달음을 얘기하면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다고 보면 돼.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공부가 끝나고 나면 어떤 능력이 생겨서 더 이상 힘든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나 역시 인생의 고비 길을 넘을 때마다 이산을 넘어서면 평지가 오리라 여겼으며 강이 앞을 가로막을 시는 이 강만 건너면 탄탄대로가 기다리리라고 여겼지만 기다리는 것은 더욱 높은 산과 더욱 깊은 강물이었어.

몇 번이나 반복되는 산과 강을 넘나들며 신을 욕하고 원망하길 그 얼마나 지속하였던지 몰라.

하지만 어느 순간,

 

!

그것이 아니로구나!

 

험한 산을 오르며 힘들어 할게 아니라

험준한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느껴야 함을 알았어.

 

!

그것이 아니로구나!

 

깊은 강물을 건너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강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면서 즐겨야 함을 알았던 거지.

길을 잃은 등산객은 산이 무섭고 두렵겠지만 노련한 등산가는 일부러 바위산을 타길 원하며 저 먼 곳 에베레스트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해.

내가 장담하는데 깨달음을 얻고 나면 어려움이 없다거나 괴로움이 없다는 사람은 진정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면 돼.

진정 깨달음을 얻은 이는 어려움과 괴로움조차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에게 있어서 삶의 모든 번뇌는 더 이상 어려움이 아니라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는 신의 축복만이 있는 거야.

 

아들아!

항시 네게 던지는 물음이지만

지금 이 순간 너의 선택은 무엇이니?

어디를 향한 선택을 하고 있니?

산을 넘는데 힘이 들어 하고 있는 거니?

아니면 산을 즐기길 원하고 있는 거니?

혹 강이 너무나 깊어서 돌아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너는 변함없는 나의 아들이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끝으로 오늘을 마무리 하자꾸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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