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한국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내가 한 일은 자수를 하러 경찰서로 직행한 일이야.
네 엄마의 명예회복을 해주고자 갔던 건데 경찰서에서는 네 엄마도 함께 오라면서 자수를 받아주질 않았어.
나라 경제가 뿌리째 흔들리다 보니 경제사범들이 줄을 잇고 있는 상태여서 나 같은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더구나.
내가 처음 이불공장을 하면서 수표를 낼 때 은행 일보기가 비교적 쉬운 네 엄마이름과 내 수표를 같이 냈기 때문에 당사자인 네 엄마와 내가 함께 와서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인데 호주에 있는 네 엄마를 어떻게 데려올 수 있겠어.
어쩔 수 없이 돌아서 나올 수밖에 없었지.
처음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아예 교도소에 들어가서 죗값을 하고 나와서 떳떳하게 새 출발을 하리라 작정을 했던 건데 시작부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구나.
할 수 없이 센터에 가서 명상도하고 동수들을 찾아다니며 소일거리를 찾고 다니면서 어쩌면 이 기회가 신이 주신 출가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어.
그렇게 여기저기 다니다가 한번은 영천에서 국수공장에서 일을 하는 K사형을 찾아갔더니 아주 반갑게 맞아 주시는 거야.
나보다도 입문도 먼저 한데다 살아가는 것이 넉넉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구김살 없이 살아가시는 분이고 캄보디아까지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 와서 국수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조금도 힘들게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를 위로하며 입문을 해서 명상을 많이 하면 할수록 가족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고 충고까지 하시더구나.
그날같이 갔던 동수들 중에는 총각 두 분도 함께 있었는데 대화도중 결혼한 사람의 고충에 대해서 모르는 총각동수가 가정을 가진 사람들의 고충을 아는 척 하다가 꾸지람을 받기도 했어.
입문을 먼저 해서 좀 더 오래 수행했다는 사실만으로 세상만사에 모두 달통한 것처럼 말하다가 된통 혼이 났던 거야.
오래된 수행자일수록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자꾸 아는 척을 했던 것이겠지만 실상을 보자면 잘못을 지적한 사람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가정생활의 힘든 점을 토로하는데 결혼도 않은 입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하다가 일어난 일이었지.
웬만하면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지금껏 참기만 했지만 그날은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구센터를 향하는 도중에 강도 높게 비판을 하였어.
아무리 깨달았다고 하여도 자신이 경험 하지 못한 일까지 모두 안다고 해서는 곤란할 것인데 입문한지 오래된 것을 무기 삼아서 후배에게 자신의 주장을 너무나 강하게 한다는 것은 제삼자인 내가봤을 때도 너무한 점이 없지가 않았거든.
깨달으신 스승님께서도 재가수행자들에게 사과하신 일도 있다고 들었는데 초기 출가자 위주의 법문을 하시던 스승님께서 재가자들이 생활과 명상을 병행해 나가는 어려움이 그토록 힘이 든 줄은 몰랐다며 사과를 하셨다는 거야.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우리가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어.
깨달으면 이세상모든 지식까지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잘못 알고 있거나 모두 알아야만 하는 것으로 아는 것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 생각해.
한마디로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만물박사인줄 아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될 것 같아.
하나의 과정이긴 하겠지만 자신의 주장이 너무나 강해서 내가 나무라게 된 건데 지금도 가끔 동수들 중에는 이러한 분들을 볼 수가 있거든.
아들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깨달으면 모두 알아야 하고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을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신과의 합일이 된 존재일수록 바보가 되리라고 여겨져.
왜냐고?
너도 상상을 해보렴.
신이 어떻게 누구 편을 들 수가 있으며 신이 어떻게 좋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있겠니?
만약 판단하는 신이 있다면 답은 아주 간단해.
좋은 것만 남겨두고 나쁜 것은 모두 없애버리면 되지 않겠니?
신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이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고 신이 몰라서가 아니라 오른쪽과 왼쪽이 공존해야 하는 우주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거든.
이러한 모든 이치를 아는 것을 깨닫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물론이지 않겠니?
그러면 이러한 점만 알면 신이 되냐고?
그래 맞아!
너 또한 신이야.
그런데 너는 도저히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이지 달리 수행을 하겠니?
다들 책만 읽고서 이렇다 저렇다 말해봐야 스스로의 만족을 얻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이 말씀인데 어느 경전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천국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주 어느 곳을 가도 천국을 얻기가 어렵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이야.
그렇다면 깨달은 이는 모든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요 모두 다 아는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깨달은 사람일까?
더 이상 이러한 물음이 필요 없는 사람이 진정 깨달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 아닐까 해.
아들아!
사람들은 종종 신은 없다고도 하고 있다고도 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이는데 그 모두가 진정 깨닫지 못했음을 스스로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확하거든.
이러한 나의 말을 듣게 되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 사람이 박사학위가 열 개가 되어도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나 또한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야.
만약 깨달음을 단순히 아는 것으로 표현하는 분들에게 있어서 박사학위 열 개면 열 번 깨달은 사람이 되겠지만 그러한 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일 뿐이고 깨달음은 거지로 살아가면서도 천국의 지복을 맛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인데 정말 거지와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거지.
말로서 깨달음을 설명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스승들의 말씀이 오늘에야 내가 경험하게 되는구나.
그래서 스승님은 수박을 먹어본 경험을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먹어보는 것만은 못하다고 하셨는데 이제야 그 말씀의 참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스승님처럼 깨달은 분들이 왜 그러한 일도 몰랐을까 하는 물음을 갖는 사람의 이면생각에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소견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그릇이고 깨달음의 정도 인 것이 아니겠니.
어떤 사람은 지식이 출중하여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진정깨달음을 얻은 스승으로 인정할 테고 또 다른 이는 예술 쪽으로 재능이 뛰어나야 인정 할 것이란 거지.
어떤 분들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어야 인정할 것이고 말이야.
이렇기 때문에 스승은 많은 공부도 해야 하고 지식도 쌓아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이러한 지식이 깨달음과는 무관하지만 제자들을 위해서 스승이 방편으로 필요하기에 공부를 하는 것인데 다행히 우리스승님께서는 워낙 천재시라 5개국의 언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하시고 다방면의 재능까지 갖추시다 보니 지식층의 많은 이들이 감복하고 제자들이 된 것이지 웬만해서는 박사들이 입문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거든.
그래서 경전에도 나와 있듯이 지식이 많은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는 무식한 농부가 깨닫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던 거야.
이래서 많은 깨달은 스승들이 지식을 가르치는 책들을 쓰레기취급을 하는 것이고 과거 티베트의 유명한 스승이신 미라래빠는 둘도 없이 사랑하는 제자가 인도에서 애써 구해온 책들을 불살라버린 거지.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자신이 신임을 깨닫는다는 것인데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신이면 어떨까 하는 개인의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신이라면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판단을 하게 되기 때문이야.
어떤 분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놓고서도 남에게 잘못했다고 말도 못하는데 경전에 말하길 부처는 남에게 잘못했다고 해서도 안 된다는 말 때문에 사과도 못하는 것을 내가 직접 목격 한 적도 있어.
이것이 바로 문자에 사로잡혔다는 표현이 적용되는 경우인데 지식을 많이 쌓아두면 이러한 현상이 더욱 많아져서 스승을 받아들일 수가 없거든.
본인이 스승보다 아는 것이 더 많은데 어떻게 스승으로 모실 수가 있겠니?
그때 그 사형 역시 자신이 상대동수보다 더 많이 안다는 생각 때문에 충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인데 가정생활을 안 해본 사람의 철없는 말이겠거니 하면 될 것을 나 자신이 겪고 있던 어려운 점이 생각되다보니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가볍게 말하는 젊은 동수의 말에 화를 내게 되었던 거지.
평상시 차를 마시면서 즐길 때는 웃기만 하던 사람이 워낙 언성을 높여서 화를 냈더니 그날 이후 나를 보면 괜히 겁을 내서 조금은 미안했지만 어차피 누구나 한번쯤은 넘어야 할 산이라 여기고 모른 척 했는데 그날 이후에도 그 사형과 많은 경험을 하게 되니 나와는 인연이 깊은 것 같아.
그렇게 토닥거리면서 대구센터에 갔더니 부산에서 중앙센터건립에 따른 회의가 있다면서 모이라는 연락이 왔었는데 나로서는 센터에 어떤 책임을 맡고 있지도 않았고 개인사정도 있는지라 가지 않았어.
그래서 이었던지 그날의 회의는 무산이 되었고 다음날 센터의 일반 동수들도 모두 오라고 하여서 끌려가듯이 나도 따라갔더니 그날 또 한 번의 기적과 같은 일을 경험하게 되었지.
부산의 어떤 동수아파트에 모여서 회의를 하던 중 미국에 계시는 스승님께서 전화를 하신 거야.
상주에서 국제선행사를 열겠다는 통보를 하신 것이었는데 관음사자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동수들이 환호성을 올린 것은 한국에서는 전례가 없던 일인데다가 한국의 전체 입문자수가 천명이 겨우 될까 말까 한 점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영광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거야.
내 개인으로 봐서는 더욱 의미가 깊었는데 전날도 아니고 하필 내가 간 날 스승님의 발표가 있었으니 착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만을 위한 스승님의 안배가 느껴졌었어.
그 다음날 만나기로 모두가 약속을 하고 지금의 영동센터가 있는 곳을 구경 갔었고 얼음이 녹지 않은 길을 차들이 올라가자 진흙에 차가 빠지는 바람에 뒤에서 밀어가며 힘들여 올라가야 했는데 도착해보니 땅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 한분이 나와서 우릴 맞아주시더구나.
여자가 산속에서 혼자 지내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어서 그렇게 강하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주인을 우리 동수들은 일월교주라고 불렀는데 외모가 강하게 보인 탓도 있지만 우리가 산 땅과 그분이 사는 땅 사이에 놓인 조그마한 다리이름이 일월교인 탓에 우리가 그분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지.
그분의 안내로 산을 올라가면서 보니 불쑥불쑥 솟아난 채로 아무렇게나 말라서 길을 덮고 있는 잡초 따라 나있는 길이 풀 더미 사이로 가끔씩 보이는 시멘트가 없으면 길인 줄도 모를 정도로 아무렇게나 방치가 되고 있었고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을 때 펼쳐진 경치는 모든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도록 했어.
먼저 나무마다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는 이름 모를 넝쿨들이 꼭 밀림 속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고 발아래 여기저기 불룩하게 솟아올라 보이는 것은 모두가 토끼들 보금자리였지.
한발자국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놀란 토끼들이 달아나는데 처음 한두 번 신기하다가 나중에는 너무나 많은 토끼들이 뛰쳐나오는 바람에 도리어 토끼가 없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지.
아들아!
너는 어떤 것이 자연보호라고 생각하니?
자연을 잘 가꾸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나 않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생각하는 자연보호는 인간의 보호하려는 의지조차 없는 것이 자연보호라고 생각해.
이러한 점을 자연농법 하시는 분들이 쓴 책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으니 꼭 한번 사서보기 바래.
도라고 이름붙이는 순간 도가 아니듯이 자연보호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순간 더 이상자연보호가 아니야.
그때 우리가 간 곳이 바로 자연보호에 가까운 자연보호를 하고 있는 곳이었는데 상주 시에서 지정된 자연학습장이었어.
학생들에게 자연의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학습장을 우리가 구입을 한 건데 여기저기 동식물들을 배려한 흔적들이 보이더구나.
원앙새가 헤엄을 치기도하고 산짐승들이 내려와서 목도 축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조그마한 연못하며 행여 물을 마시러 내려왔다 비라도 올라치면 피할 수 있게 배려한, 차라리 우산이라 불러야 할 것처럼 작은 정자가 교주님의 자연 사랑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어.
원래는 화전 밭인 것을 교주님보다 앞선 주인이 논으로 사용하던 것을 묵혀서 두었던 탓으로 물이 흘러내리듯이 잡초들이 자라고 있다가 겨울을 맞이한 모양으로 말라서 늘어진 모습이 차라리 한 폭의 풍경화였지.
모두들 내려가고 총무 하시다가 스님이 되신 S스님과 내가 폴대를 잡고 부산의 사형한 분이 측량을 했어.
아들아!
그러고 보면 영동센터가 생길 때 나의 공로가 개국공신으로 치면 일등공신에 해당할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공덕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그렇게 구경하는 것으로 그치고 며칠 후 구경삼아 다시 갔을 때는 그분으로부터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처음에는 소를 키우는 목장을 목적으로 땅을 사서 자신의 땅 경계 따라 울타리를 치고 방목을 했었는데 처음 소를 키울 때는 너무나 좋았지만 막상 소를 팔 때가 되니 어미 소와 새끼소가 서로 헤어지기가 싫어서 우는 바람에 가슴이 아파서 도저히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그만두게 되었다더구나.
이분이 처음 스승님의 견본책자를 보고 감명을 받아서 우리단체라면 자신이 추구하는 의도대로 자연보호도 하면서 땅을 지켜 주리라는 생각에 우리단체에 땅을 팔게 되었던 것인데 우리가 센터 건립을 한답시고 여기저기 마구잡이식으로 산을 훼손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했고 땅을 판데 대한 후회를 무척 많이 하셨어.
스승님의 가르침이 좋아서 처음에는 입문까지도 생각하다가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 자연보호도 사람이 있고서 자연보호를 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으로 돌릴 수밖에는 없는 것 같아.
아들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무조건 자연보호를 해야 한다고?
또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고 지켜봐야만 한다고?
맞는 말이긴 한데 거기에는 또 다른 점이 있어.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모든 것이 안배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하면 된다고?
그 적당한 장소가 어떤 곳인지 나에게 가르쳐주면 그곳에다가 센터를 지을 테니 가르쳐줄래?
가끔 이세상의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당사자가 아닐 때는 너그러울 수 있다가도 막상 내가 손해 봐야 하는 일이 생기거나 나의 주장과 상반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것을 왕왕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화두가 아닐까 해.
이세상의 많은 일들이 이러한 선문답에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으니 선문답 하나를 풀어보도록 하자꾸나.
어느 날 친구에게서 내게로 온 편지한 통의 내용 중에 선문답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엄마와 아들이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건질 것인가와 고급 도자기 안에 비싼 분재가 크고 있다가 자꾸 커서 병이 깨질 지경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일까 이었어.
아들!
너는 어떡하면 좋겠니?
어쩌면 너는 아들이니까 당연히 아들편일 테니 아들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구나.
게다가 나무를 좋아하니 분재를 꺼내기 위해서 도자기를 깨야 한다고 할 것이고 말이야.
그래!
네 말도 정답일수 있겠고 다른 답이 정답일수도 있을 테지만 그때 내 답장은 간단했어.
“그때가 되어 봐야 안다”
“도자기가 값이 나갈는지 분재가 값이 나갈는지 판단하면 된다.”
정답여부를 떠나서 문제랄 것도 없었고 문제 같지도 않았는데 화두라는 것이 원래 그런가 보았지.
누가 엄마와 아들이 빠져서 고민하다가 건지겠으며 도자기 안에다가 분재를 키우겠냐만 화두를 공부의 방편으로 삼으려고 만든 거야.
이러한 점은 알고 있지만 모든 것을 정답으로 보고 있는 나로서는 대답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만약 사고가나서 정말 그러한 상황을 맞이한다면 그때 당시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정답이지 엄마만 구했다고 욕을 먹어야 하고 아들만 구했다고 해서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란 거지.
간혹 이 비슷한 일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욕도 하겠지만 사실은 부질없는 짓이거든.
사고당사자가 안고 있는 어떤 인연 고리로 인해서 상황이 연출이 된 만큼 지켜보는 옆의 사람이 관여할 바가 아니란 것이고 어떤 답도 그 당시의 판단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야.
어때?
이해가 가니?
이해가 안 가면 다시 한 번 설명해볼까?
예를 들어서 전생에 원수를 갚기 위해서 가족을 형성했다고 본다면 어떤 계기가 마련이 되면 사건이 발생이 되어서 인과가 갚아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연극이 필요할 것이고 당연히 그러한 고민거리를 주어서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 것이다 이거야.
사람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너와 네가 인정하거나 말았거나……
비정한 것 같은 어떠한 살인행위도 그저 일어나는 법은 없고 보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거기에도 어떤 법칙이 있어.
세상을 살아가는 인연법에도 정업이 있고 신업이 있다는 것인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격어야 하는 것을 정업이라고 부르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즉 다시 말해서 피할 수 있는 일들에 있어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신업을 짓는다고 하거든.
일생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격어야만 하는 일이 없다면 사람은 더 이상 살아 있을 수가 없는데 그러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연극을 예로 들어보기로 해.
어떤 이가 배역을 극 중간에 잠깐 비치는 역이라고 했을 때 그 역할의 비중이 크고 적고를 떠나서 반드시 그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니?
그런데 그 역할이 끝나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역할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돼?
당연히 퇴장한다 이 말씀이야.
이러한 역할이 바로 정업이라는 얘긴데 이해가 가지?
이해가 안 가면 다음해가 올 수 없으니 반드시 이해하도록 해.
대충의 정업에 대한 설명은 이러하며 신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시간들로 보면 되는데 우리자신이 창조주의 품성대로 창조도 할 수 있는 위대한 순간이기도 하고 업장을 무진장 쌓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한거야.
아들아!
이렇게 모든 것이 선택에 달려있는데 너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니?
항시 너에게 묻고 있지만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네 고유의 권한이긴 하지만 진정한 너의 이득을 위한 선택을 했으면 하는 것이 아들을 바라보는 아비의 심정이야.
솔직히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인과법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만큼 나름의 인연을 얘기한 것에 불과한 것일 뿐 내 육신 스승님의 가르침이 이 전부는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해.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어떠한 선택도 정답인 것이 내가 받아들이는 인연인데 매 순간 나의 행동이 진정으로 내게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선택이라 할 수 있어.
내 양심에 가책도 없고 남도 다치지 않고 결국은 내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선택이 내가 가고자 하고 걸어가고 있는 신업의 길이야.
아들아!
그때 당시 우리가 자연보호를 하는 것과 국제선행사를 열어야만 되는 상반된 선택의 기로를 설명하다 보니 이만큼 이야기가 멀리 온듯한데 결국 모든 일의 귀결이 하나로 돌아가는 만큼 종착점에서 해결을 해보자꾸나.
모든 일이 어떠한 것이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오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우리는 그토록 아름다운 경관을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바꾸는데 모두들 동의를 하고 국제선 준비에 착수하게 되었던 거지.
분재가 아까워서 도자기를 깨야 하는 심정이었고 도자기가 아까워서 분재를 조금씩 잘라내야 했으며 엄마를 구하러 뛰어들기도 하고 어느 순간 마음이 바뀌어 아들을 구하기도 했으며 또한 둘 다 구하러 들어갔다가 죽기도 했고 둘 다 죽도록 내버려두기도 한 것 모두가 나의 선택이었어.
그 어느 순간의 내 선택도 후회를 남기지 않아.
나는 매 순간 선택하는 신을 따랐을 뿐이었기 때문에 후회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음을 네가 알았으면 해.
아들아!
오늘은 여기에서 쉬어가도록 하고 다음에는 국제선을 하기 위해서 센터를 건립하면서 일어난 이야기들로 다시 만나자.
아들!
알지?
사랑한다는 거……
스승이시여!
부족한 저에게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주셨는지요.
호주에서 열린 선행사의 준비에
내가 왜 미리 갔을까를 생각하는 한편으로
알 수 없는 스승님의 안배가 있으리라고는 여겼지만
한국에서의 선행사가 있게 될 줄 어떻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스승이시여!
사람들은 종종 불평등을 얘기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얘기하지만
그러한 불평등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때는
결코 현실의 불평등은 더 이상 불만거리가
아니라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여지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일들도 모두가 마음에 달린 문제라 여깁니다.
무엇이 가치가 있고 좋은 일인가를 우리들이 선택함에 따라
결과는 좋게도 나쁘게도 받아들여질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점을 내가 알게 해주신 나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