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한국으로 돌아가 보니 모든 것이 바뀌어 있더구나.
IMF로 인해 거리는 한산하기가 명절날 귀향으로 지방으로 다들 내려간 것 같았고 소비가 너무나 위축되어서 멀쩡하던 기업들이 도산이 되고 있는 실정이었어.
정부에서 매스컴을 이용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소비를 억제시킨데 따른 부작용 때문이었는데 정부로서도 처음으로 맞이하는 국가초유의 사태에 당황 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일개국가가 하는 일 처리로서는 미숙한 대응이 아닐 수 없었지.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IMF이니까 무조건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식으로 광고를 했으니 착한 백성들로서는 그 말을 무조건 따랐었고 거기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거야.
수없이 많은 기업들이 흑자부도라는 것을 내기시작하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정부에서 다시 건전한 소비운운하며 진화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수없이 많은 우량기업들이 도산한 후였어.
나 역시 그 시기와 때를 같이하는 바람에 무척이나 애를 먹게 된 건데 특히나 어려운 것이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물품들을 공항에서부터 카메라를 들이대고 보도를 하니 관광객들이 외국에서는 어떤 물품도 사려고 하질 않는 거야.
이러한 국내분위기로는 도저히 양모이불이 팔릴 것 같지도 않았고 관심 있어 하는 몇 분과 접촉은 했어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어.
다행히 호주공장은 하청을 주는 곳에서 꾸준하게 일감을 주는 바람에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컴퓨터 기계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외삼촌께서는 컴퓨터기계 사는 일을 그만두라는 말씀을 하시더구나.
아마도 일반 퀼팅기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비싼 기계를 사서 모험을 하기는 싫으신가 보았지.
이런저런 이유로 모든 가능성이 무산되어버리자 또다시 나 자신을 근본적으로 돌아보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이번 기회에 신은 나에게 나의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 하는 것이었어.
이제는 네 삼촌네식구도 살길을 마련해준 셈이었고 너희 모자 역시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터인 만큼 이대로 출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용솟음친 거지.
시간도 넉넉한 만큼 과거에 나와 인연이 있는 대구동수 분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녔는데 캄보디아가면서 내게 자신이 봉사 하던 일을 넘겨주신 사형이 궁금해서 찾아보았더니 캄보디아 가기 전만 해도 사진관을 하던 분이 이제는 농사꾼이 되어있었고 자연농법을 한다고 시골 어느 마을에 들어가 계시더구나.
형편이 어렵다는 다른 동수의 말을 들었던지라 채식라면을 사들고 찾아가보니 한적한 시골에 평화롭게 사는 것 같긴 한데 짐작은 했지만 식사를 준비하시는 사저의 표정은 결코 만족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 것 같았어.
캄보디아 때부터 아쉬람을 원하던 분이라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수들과 돈을 모아서 집을 지었는데 서로의 주장이 대립되는 바람에 상처만 남기고 좋던 사이가 금이 가고 말았던 거야.
내가 방문을 했을 때는 공동으로 지은 집은 넘겨준 체 자연농법을 하겠노라 밭을 일구고 있었는데 도회지로 떠난 사람들의 버려진 땅을 얻어 자연농법을 하는 모습에서 도시를 떠나 생활하는 성자의 삶이 엿보이고 있었지.
본인이 성자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좋지만 식구들까지 함께 고생해야 하니 그것이 문제였고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다 보니 가족들이 모두 따라가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닌가 보았어.
나 역시 별반 다를 게 없다 보니 할 말은 없었지만 그나마 우리는 문명이라는 허울이라도 있었지만 그 사형 네는 그런 사치는 전혀 없었고 아이들이 학교 갈 때 마다 너무나 길이 멀어 차로 실어주어야 했는데 옆에서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이었지만 꿋꿋이 견디는 것 같았지.
작별을 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무척이나 복이 많음을 느꼈고 힘이 든다는 나의 푸념은 그 사형에 비하면 호강 속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들아!
이래서 행복이란 마음먹기에 달렸고 항상 행복 속에 있음을 우리의 욕심이 가리고 있어서 행복을 발견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내가 늘 이야기하는 거야.
사형과 헤어진 후 태백센터에 행사가 있다 해서 갔더니 내가 처음 입문하는 날 사진을 가져가지 않아서 곤란을 격을 때 도와주시던 동수 한 분을 만나게 되었어.
내가 입문할 당시는 총무님이었는데 스님이 되어있더구나.
김천 직지사에 있는 승가대학을 나와서 정식코스를 밟아서 스님이 되셨는데 나보고 시간이 있으면 직지사와 해인사를 같이 갈수 있겠냐 해서 함께 가게 되었지.
캄보디아를 다녀와서 많은 고민 끝에 출가를 결심한 모양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해주시는데 처음 승가대학에 입학함과 동시에 오천 배를 했더니 반장을 시키더라는 얘기와 동료들과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직지사와 해인사를 다녀왔는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
내가 알기로는 대만에서 처음 스승님이 승복을 입고서 입문자를 받으시다가 어느 순간 출가의 의미가 옷에 있지 않다는 얘기로 다들 승복을 벗고 일반인들처럼 머리기를 것을 지시하자 스승님 아래 출가해있던 수많은 스님들이 우리단체를 떠났다고 들었거든.
캄보디아에서도 스승님께서 많은 스님들을 모아놓고 승복 벗기를 권유하셨다고 하는데 한국스님들 중 단 한 사람도 스승님 말씀에 따른 이가 없었다고 들었어.
왜 스승님의 권유를 무시하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이미 출가를 한 사람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입문한지 몇 해가 지나서 또 출가를 하는 것은 납득이 가질 않는 거야.
나 역시 출가를 지향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승님에게의 출가였지 불교에 입문하는 것은 아니었거든.
나중에 어떤 스님으로부터 이러한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름 아닌 생계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승복을 입고 있을 때는 다들 보시도 해주고 차비도 주다가 승복을 벗는 순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스님 생활만 오래하시던 분들이 세상에 나와서 할 만한 일도 없고 근력도 남만 못하다 보니 어딜 가서 취직하기도 어렵다는 하소연을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야 어떤 스님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어.
한마디로 승복이 보호막 역할을 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점은 불교의 많은 스님들 또한 예외일수는 없을 거라 여겨져.
언젠가 한번은 어떤 스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하더구나.
“사형!
진흙 길을 걸어갈 때 안전하게 걸어가려면 장화를 신고가면 됩니다.”
나보고 출가의 길이 장화를 신고 진흙 길을 건너는 것이니 출가를 하라는 권유의 소리로 들렸는데 그때는 못 다한 얘기를 지금은 하고 싶구나.
“스님!
장화를 신고건너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맨발로 걷는 감촉을 장화를 신고서는 도저히 맛볼 수가 없으니 저는 장화를 신지 않고 맨발로 걸을 겁니다.”
아들아!
내가 출가를 하지 않고 재가를 한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출가자가 진정한 출가자가 되면 재가자와 다를 바가 없음을 내가 알기에 결코 내 위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스승님의 말씀에는 출가자들 보고 어느 누구에게도 보시를 받지 말라고 했고 자신이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모든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도록 명하셨기에 출가자도 똑같이 자신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함으로 재가자 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고 재가자 역시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남을 위한 봉사를 더욱 많이 하라고 하셨고 시간만 나면 잠도 자지 않고 명상에 전념할 것을 명하신 만큼 출가자 보다 나은 점은 손톱만큼도 없지 않겠니?
그때 당시 그 스님께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이왕 출가를 하였으면 절간에서 스님으로서 본분을 다하면서 수행을 해야 스승님의 가르침을 남들에게 전하는 역할이 되는 것이지 승복만입고서 센터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승복을 방패막이로 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아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들아!
어떤 선택을 하더라고 자유이지만 나의 행동을 스스로 살펴서 그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면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스승님의 말씀은 지킬 줄 알아야 스승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비록 승복을 벗지 못하고 있더라도 대중을 위한 봉사를 하고 일하시는 스님들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곳저곳을 떠돌다시피 하면 본인은 물론 다른 이에게도 결코 좋은 이미지를 주지 못해.
하기야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 그 스님이 그러한 역할을 맡았을 수 있으니 내게는 감사할 노릇이라 여기고는 있어.
그 스님과 호주에 오신 적이 있던 B스님을 모시고 진주홍법에 갔더니 학상장 기공을 가르쳐주신 K관음사자께서 와계시더구나.
많은 분들이 동수들이 나누어준 전단지나 시내곳곳에 붙여진 포스터를 보고 모여왔었는데 일반인 한 분이 관음사자께서는 견성을 하였나를 물으셨을 때 관음사자가 웃으면서 자신은 스승님께 입문하기 오래 전에 견성을 하였다고 하더구나.
아들!
견성이 뭔지 궁금하지?
견성이란 한마디로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을 말하는 거야.
이러한 본성을 보게 되면 빛이 나타나는데 어떠한 종교도 다 같이 빛을 보는 것을 알 수가 있어.
기독교에 다니시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가끔씩 단식 끝에 하나님을 봤다고 해서 하나님 형상이 어떻든가 물어보면 하나같이 빛을 봤다고 얘기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불교에서는 견성성불을 했다 하는 거야.
종교나 이념을 달리한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만큼 빛을 본다는 점은 동일해.
그렇지만 또 다른 식으로 체험하기도 하는데 지난번에도 말했다시피 소리로서 체험하기도 하거든.
이러한 체험을 했다고 해서 수행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을 보고 나서 이제부터가 실질적인 수행이 시작된 것에 불과한 것이니 그리 높다고도 낮다고도 할 수 없어.
그때 관음사자도 스승님께 입문하기 전에 벌써 견성을 했지만 입문하고서도 스승님께 출가하여 엄청난 고난이도의 수행을 했으니 사람들 앞에서 본인이 깨달았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
이러한 점을 얼음만 드신다는 스님도 인정하시는 것만 보더라도 깨달은 분들끼리는 통하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봐.
일반인들과의 대화가 끝이 나고 마산에 있는 동수가 운영하는 찻집에 갔을 때는 누군가가 질문을 하는데 입문한지3년이 넘었다면서 처음 입문하고 너무나 체험도 좋고 편안함이 계속되다가 최근 들어 수행이 어렵고 명상 또한 즐겁지가 않고 힘들기만 하다고 하소연하자 관음사자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으시더니 너무나 자신의 육신을 몰아쳐서 그렇다면서 자신의 육신에게도 휴식을 주라고 말씀하시더구나.
평생을 해나가야 할 수행인데 너무 몸을 혹사하게 되면 몸이 싫증을 내게 된다는 건데 일리가 있는 말이라 여겨져.
너무 느슨해도 안 되고 너무 팽팽해도 안 되는 그야말로 중용을 지키라는 소리였지.
그 관음사자는 입문하기 전 대만에서도 유명한 절인 불광사의 스님이었는데 초기에 스승님께 입문하신 분 인만큼 스승님 옆에서 시자 생활도 오래한데다가 관음사자들 훈련까지 담당하신 분이라 아주 많은 얘기를 들었어.
그런데 이 스님과 한국에서 내가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는 이상한 일이 계속되었는데 내가 호주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 만날 때마다 호주를 언제 가는가를 묻는 거야.
처음 한두 번은 그냥 지나치다가 세 번째부터는 이상하다 싶었고 네 번째 듣고서 호주로 전화를 해보니 기계가 고장이 나서 공장이 멈추어있다는 것이 아니겠니.
사실 내가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호주로 가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니면 무심결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는 곳마다 마주치고 만날 때마다 호주를 언제 가는지 물어오는지라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고 호주로 돌아가라는 스승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관음사자와 함께 서울로 향해서 가는 도중에 심심하셨든지 내게 질문하나를 하는데 그때 당시 한창 선거유세 중이어서 누가 대통령이 되면 좋겠는가 묻기에 여당대표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더니 왜 그런가 하는 거야.
그래서 내 생각을 말해주었어.
지금껏 도둑질해먹든 사람들이 또 집권을 해야 도둑질을 덜해먹지 야당대표가 되고 나면 주위의 가신들이 엄청난 도둑질을 할 거라고 했더니 웃으시더구나.
호주에 가면 대만에서 건너간 동수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관음사자의 부탁을 받는 것을 끝으로 이분과는 이별을 하였고 나는 또다시 호주로 돌아가야만 했어.
한국을 떠나 호주를 도착해보니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집이 이사를 해서 공장부근으로 옮겨있었고 센터 역시 잦은 침수로 인해 센터로서의 기능이 마비가 되어 매주 시티즌 홀을 빌려서 명상을 하고 있는 거야.
다음으로 공장에 들러 고장이 난 기계를 고쳐야 했어.
네 삼촌이 기술자인데 내가 뭘 알겠냐 싶어 하며 거저 건성으로 보다가 이러하면 될 것 같다고 했더니 정말로 내 말대로 해서 기계가 고쳐지는 것이 아니겠니.
조금만 응용하면 고칠 수 있는 것을 어렵게 문제접근을 하다 보니 몰랐던 것인데 기계를 전혀 만져보지 않았던 내가 기계를 고친 셈이었어.
어쨌든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은 맞았던가 봐.
내가 호주로 돌아감과 동시에 함께 있던 S교수님은 한국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학위취득이 끝이 나서 호주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어.
종종 힘이 들 때마다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동수여서 의논도 하곤 했는데 막상 돌아가고 나자 의논할 상대가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지더구나.
어차피 갈 사람은 가야하고 남을 사람은 남아야 하는지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
그렇게 또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기계로 인해 공장이 돌아가면서 우리의 생활도 정상을 되찾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 터지고 있었어.
네 엄마와 네 삼촌네 식구와의 갈등이 하루하루 쌓여가고 있었는데 다들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는 만큼 들어보면 이유는 충분히 있었지만 서로 양보라고는 하지 않다 보니 옆에서 지켜보는 나도 짜증이 나기 시작하더구나.
처음에는 네 엄마만 나무랐지만 네 엄마만의 잘못은 아닌 것이 그토록 한국에서 고생스러워하는 사람들을 호주로 불러들여서 살게 해 준 것을 고맙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불공평만 주장하니 나로서도 화가 났어.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베푼 것을 몰라주는 네 삼촌네가 야속하고 괘씸했던 거야.
이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지 몰라.
매일같이 계속되는 갈등가운데 외삼촌과 외숙모님까지 가세해서 네 삼촌역성을 들기 시작하자 내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어른들로서는 내가 형으로서 이해를 하고 융화하길 바라고 네 삼촌역성을 드셨겠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
공장일 처리도 엉망으로 해서 남에게 모두 뺏겨 버리지를 않나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 해놓아서 분통이 터질 지경인데다가 모든 일이 내 잘못으로만 몰아붙이는 주위 분들의 심사까지 나를 조용하게 내버려 두지를 않았던 거야.
매일같이 네 삼촌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돈을 빌려서 기계를 샀으며 모든 일 처리가 완벽하게 되기까지 내가 한일들을 어쩌면 저리도 몰라주는가 하는 야속한마음밖에는 들지가 않더구나.
그래서 형제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차피 공장 일에는 우리 식구는 필요가 없는 만큼 기술자인 네 삼촌네 식구와 일을 계속해나가시라고 외삼촌에게 말씀 드리고 우리는 양모이불을 판매하기로 했어.
처음 양모이불을 팔기 위해 사우스뱅크 몰에 갔을 때 한여름 땡볕에 이틀을 고생한 결과 겨우 이불 한 장을 팔았는데 장소 임대비를 주니 딱 맞더구나.
너도 기억나지?
우리가족들 세 사람이 무더운 여름날 이불을 잔뜩 진열한 체 바닥에 앉아서 땀을 흘려가며 있었던 일말이야.
너야 어렸으니 재미있었겠지만 여름날 이불을 팔러 나온 우리를 별종 쳐다보듯이 하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한여름 따가운 햇볕보다 더욱더 따갑게 느껴졌어.
그곳에서 별 성과가 없자 이번에는 브리즈번 마켓이라는 청과도매시장에 가게 되었는데 이곳 역시도 팔리지 않기는 매한가지여서 새벽부터 앉아 있어도 이불 한 장 팔수가 없었지.
그 대신에 잘하면 커피장사를 해도 괜찮을 것도 같더구나.
시장이 열리기전 각지에서 온 장사치들이 장사를 하러 들어가기 위해 표 파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보통 한두 시간은 예사로 걸리므로 그 시간 동안 커피나 간단한 음료를 파는 것이 짭짤할 것 같았거든.
그래서 안 팔리는 양모이불 대신에 커피장사로 나섰는데 새벽 두시부터 설쳤지만 이틀 동안 겨우 다섯 잔 정도 팔고 포기를 해야만 했어.
이런저런 일들이 모두무산이 되고 나자 느는 것은 네 엄마와의 싸움밖에 없었고 외가식구에 대한 원망과 네 삼촌에 대한 괘씸한 마음만 늘어가고 있었는데 급기야 내가 안 해야 될 일 까지도 생각하게 되었지.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는 양모이불공장을 다른 사람과 함께 따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물론 성사는 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 외삼촌과 네 삼촌에 대한 서운한 마음 때문에 별생각이 다 들었는데 궁지에 몰려있는 내 처지로서는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양심에 비춰볼 때 분명히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고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
아마도 이러한 나의 행동을 뒤늦게 외삼촌이 외사촌 동생을 통해 듣고서 나를 괘씸하게 여겼으리라 생각하지만 외삼촌 귀에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동생에게 얘기를 했으므로 지금도 후회는 없어.
다만 나의 그때 행동이 보다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만큼 내가 닮아가고자 했던 성인의 품성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나로 인해서 누가 득을 봤더라도 내가 해주었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하는데 내가 편하지 못하다고 해서 남에게 베푼 것을 후회한다는 것은 성인의 삶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 취할 행동은 분명히 아닌 것이고 스승님 가르침과도 맞지 않는 행동이었거든.
아무리 내 행동을 반성하고 하심을 하려고 애를 써도 결코 쉽지가 않았는데 명상을 해보면 문제가 분명해서 해결방법 또한 있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가족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만 가는 거였어.
가족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화해를 조성해 보려고 하면 아무도 양보라고는 없으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가운데 어느 날은 네 엄마의 스트레스가 폭발을 했지.
이러한 네 엄마의 행동은 나의 인내심에도 영향을 미쳐서 나로 하여금 완전히 가족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만들었어.
그 동안 그렇게나 붙들고 있던 가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하고 가방을 챙겨 내려오는 날 설마 하는 네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냉정하게 돌아서버렸는데 사람의 마음이 차가워지면 그렇게 차가워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던 거야.
그때의 내 마음은 부도가나서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슬픔 속에서도 가족들을 지키고 싶었고 신에게 매달리면서도 모두를 함께 안고 가고자 했던 기대가 무너진데 대한 원망으로 인해서 꽁꽁 얼어붙어버렸고 그러한 내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아들아!
나의 차가운 마음이 이러한 연유로 일어났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지금도 후회는 되진 않아.
왜냐하면 과거의 어떤 일도 우연히는 없고 반드시 헌 건물이 무너져야 새 건물이 들어 설수가 있기 때문이거든.
어떠한 아픈 기억과 잘못이라 해도 겪어야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기에 일어났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야.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이 한국으로 돌아온 내 앞에 놓여 있으니 또 다른 일들을 보기에 앞서 오늘은 스승께 드리는 기도로서 마무리 하자꾸나.
스승이시여!
사람들의 대부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즐거움만을 바라고 살아가고
괴로움은 멀리하고 싫어하지만
그 즐거움도 괴로움이 있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되고 난 후부터는
괴로움을 받아들이기가 쉬워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신이 주시는 축복이
즐거움 속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괴로움 속에도 더 큰 신의 축복이 있음을
당신은 저에게 가르쳐주셨지요.
스승님의 사탕만 좋아하기보다는
대나무 회초리를 갈망하는 제자가 되길
원했던 어느 날
꿈속에서 스승님 앞에 엎드려 간청했어요.
저를 진정한 제자로 여기신다면
저를 밟고 지나가 주시기를……
그래요.
스승님은 저의 간청대로
제 등을 밟고 지나가셨고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당신의 회초리는 끝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오나
스승님!
어느 순간 철저한 부서짐과 함께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는 희열을 맛본 순간
고통과 희열이 둘이 아니었어요.
더 이상 빛과 어둠이 둘이 아님을
알고 나서 내 삶은 보다 견디기 쉬워졌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고통을 진정으로 아파하기 시작했고
슬픔을 제대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괴로울 때 제대로 울 수 있는 가슴을 열어주신
스승님!
제 삶은 온전히 당신 것이옵니다.
내 삶을 주관하시는 내면의 스승이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