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인 것 같구나.
인터넷을 통해 가끔 듣는 불교의 찬불가가 성당에서 듣던 찬송과 흡사하였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우려하고 걱정하던 일들이 어느 틈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어.
비록 조그마한 일이긴 하지만 의도적이던 우연이던 불교와 천주교가 일치점이 생겼다는 것이 앞으로 있을 대종교 통합을 위한 초석을 깐 것 같아 기분이 괜히 들뜨는 것 같았지.
물론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나 많겠지만 적어도 서로 헐뜯고 싸움 박질 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지 않는가 말이야.
지난번에도 잠시 말한 적이 있지만 종교가 되었던 사상이 되었던 길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길을 주장하기 위해 남이 가는 길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 아픔이 없지 않았는데 대화를 할 수 있는 물고를 튼 것 같기도 하고 뭔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잠깐이나마 즐거울 수 있었지.
따지고 보면 너와의 대화 역시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결론을 얻기 위한 여정이고 보면 이러한 두 종교의 자그마한 공통분모 발견은 내 목적과 일치점 또한 있기에 반가움이 더욱 큰지도 몰라.
지난번 사이비는 없다는 제목으로 너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이미 말한바 있지만 종교가 되었던 사상이 되었던 그 모든 것이 신의 다른 표현들일뿐이라는 것을 얻기 위한 산행에 불과한 것을 말했으니 새삼 길게 말하진 않겠지만 조금 부연설명을 하고 싶은 점은 있어.
사람들이 알거나 모르거나 인정을 하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여행 중이란 얘기도 몇 번했으니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 인생길이 신이 자신을 알고자 혹은 느끼고자 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구의 인생도 소중하지 않을 수는 없겠는데 문제는 어떤 경험을 원하고 있는가를 봐야 할 것 같아.
어떤 수행자 한 분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기로 해.
이분의 목표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깨닫는 것이 목표라면 이분이 가는 길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러한 방법에 따라서 열심히 가게 될 것이 아니겠어.
하지만 이분의 목표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예수님이 가신 길처럼 갈 거란 것이지.
꼭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상황은 마찬가지가 되는 것은 물론이야.
수학을 공부하여 이 시대 최고의 석학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공부를 선택하여 수 없이 많은 수학학자들이 걸었던 길을 가고자 하지 않겠냐 말이지
철학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또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고 돈이 목표인 사람들은 거기에 합당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모든 관심을 거기에다 집중할거란 얘기가 아니겠어?
이렇게 본다면 나와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게 되거든.
그렇지 않니?
그런데 아들아!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일이 있는데 사실은 이모든 일이 신의 완벽한 조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고 내 주위에 이미 와 있다는 거야.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길만큼 또는 경험해야 할 만큼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
가령 내가 한 어떤 말들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해 졌다고 생각해 보기로 해.
내 말을 들었을 때 각자의 관심도에 따라 내 말에서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말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여겨져.
똑 같은 말을 듣고도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내 말의 해석을 달리한다는 것이 아니겠니.
아까도 얘기했듯이 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마도 돈을 연관시켜 해석하고 자신이 깨달음에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깨달음에 입각하여 판단을 할 텐데 거기에도 한결같지는 않다는 거지.
그래서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든다는 거야.
이렇게 놓고 본다면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이든지 이미 완벽한 안배가 되어있다는 내 말이 뜻하는바가 어렴풋이 머리에 떠오를 거야.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러면 어째서 원하는 데로 되지 않는 거냐고?
그래?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한번 얘기해보렴!
돈이 갑자기 많이 생겼으면 한다고?
그렇다면 돈이 생길 수 있는 노력을 네가 얼마나 했는지 되물어 보자꾸나.
만약 네 인생의 목표가 진정으로 돈에 있다면 거기에 합당하게 노력을 기울이고 돈이 생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모든 관심사가 그 쪽으로 향해있어서 돈을 벌 수 있는 모든 일에 신경을 쓰게 된다는 것이 아니겠니?
아마 진정으로 네 목표가 그러하다면 이 순간 내가 하는 말도 돈과 연관을 시켜서 생각 할 거란 거고 시작부터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란 거야.
어때?
이제 내 말이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했지?
만약 아무런 목표도 정하지 않은 채 누군가가 대충대충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대충 대충에 맞는 생각과 거기에 걸맞은 일들을 주위에서 받아들인다는 거지.
그런데 개중에는 목표하는 일이 죽어라고 안 된다고 하소연하는 분들도 꽤나 있어.
그런 분들 때문에 전생이니 업장이니 하는 말들이 존재하는데 사실은 이것 역시도 자신이 선택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생각일 뿐이란 것을 알아야 해.
이것이 바로 지난번에 내가 말한 적이 있던 영혼의 선택 때문이거든.
인정하기가 죽어도 싫겠지만 영혼이 지독한 실패를 통해 느끼고자 하고 얻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고통이나 슬픔들이 이러한 연유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도 별무리가 없어.
나의 이 말을 듣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친놈 소리를 할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고 나 역시 내가 해야 할 역할과 나도 모르게 하고 싶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이야.
내가 하는 말 역시 내 의도와는 전혀 별개로 각 사람들의 관심도라든지 의식수준에 따라 읽혀지게 되기 때문에 나를 욕을 하던 칭찬을 하던 그 모든 것이 그 사람들 몫이거든.
설사 나를 욕한다 해도 그러한 욕을 통해 내가 얻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욕하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느껴야 할일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욕을 하는 것을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어.
물론 욕하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는 다음에 일어날 미래의 일이라 나도 몰라.
내가 욕한 사람을 같이 욕해주거나 주먹을 날린다 해도 거기에 따른 의미가 또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일을 해도 무방하리라 여겨져.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자신의 목소리를 제각기 내고 있는 것뿐이란 것을 알 수가 있어.
이러한 사람들마다의 제 목소리 내기는 내가 속한 명상단체에도 똑같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수없이 많이 당해보아서 이제는 상황분석까지도 가능해졌거든.
언젠가 동수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서로간의 주장을 하는 것을 보았지.
서로가 각자의 주장을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자신의 행동은 내면의 스승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고 상대방은 아직까지 그만한 수준이 안 된다고 여기는데 문제가 있었던 거야.
그때 다툼을 벌리던 두 분 중에 한 분은 자신이 명상 중에 자기내면의 스승을 만났던 모양으로 내면에서 시키는 대로 행동을 하는가 보았는데 자신만이 내면의 스승을 만났고 다른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이었어.
이러한 점은 누구나 마찬가지고 오랫동안 수행해서 체험이 많은 분들일수록 더 심한 경우가 있는데 다들 공통점이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 거야.
이러한 점이 사회의 많은 종교가 가진 폐단이란 것이 아니겠니.
내가 선택한 종교가 최고일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내가 그것으로부터 얻은 바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심해지는데 그러한 것을 어떻게 말릴 수 있겠냐 말이야.
그러한 점에 있어서는 나 역시 마찬가지임은 물론이고….
옆에서 아무리 뭐라 해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란거지.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 때 보이는 증세라고 보면 엇비슷하리라 여겨져.
아들아!
너도 짝사랑의 열병을 앓아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지독한 짝사랑의 아픔은 가끔씩 사람을 아주 못쓰게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증상이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어.
그런데 이러한 사랑이 사랑으로서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너무나 예쁘게 보여야 하지 않겠냐 이 말이거든.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당신, 보석보다 아름다운 당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사랑 등등….
이런 사랑의 감정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일로서 다른 이의 시각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져.
남들이 봤을 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 수없이 많은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지.
수없이 많은 사랑노래가 이래서 만들어졌겠지만 이런 경우를 한마디로 콩깍지가 씌운다고 표현해.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요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할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거야.
그때 그분 역시도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어야 했고 자신이 최고여야만 했던 거지.
이런 일은 우리 단체에서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데 스승님이 말씀하신 것을 인용하는 것만 해도 너무나 다양하고 독특해서 언제 스승님께서 저런 말씀을 하셨나 싶을 때가 많아.
물론 이것 역시 내 주관에서 보는 내 생각뿐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아들아!
적어도 나는 남을 비판하거나 욕을 하진 않고 나와 생각을 달리한다고 업신여기진 않으며 무엇보다 남들과 싸우려고 하진 않아.
그런데 나의 이런 말에 심하게 태클을 걸고 들어오는 분들도 가끔씩은 있더구나.
싸워야 성장한다는 말씀과 함께 …….
그런데 싸우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데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내 마음인 데야 어쩌겠니.
내가 보기에는 스승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각자가 생각하는 의식수준에 따른 해석을 내리고 있을 뿐 이란 것이 보이는데 구태여 내가 누구 편을 들 필요가 있겠냐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다른 이들 말에 찬성만 한다고 보면 아주 심각한 착각이야.
그때당시 내가 맡은 역할이 그러한 객관적인 시각의 나였기 때문에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을 뿐 나의 그때 역할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하거나 반대로 내가 싸움의 중심에 있어야 했다면 일의 진행이나 내 반응 정도가 달라졌을 것이 아닐까 해.
바로 이런 경우가 내 역할에 따라 어떤 말이나 상황을 내가 받아들이는 마음상태가 달라진다는 것이고 스승님의 말씀역시도 자신의 주어진 역할에 맞게 해석해서 받아들인다는 좋은 예가 되리라고 여겨져.
우리단체를 벗어나서는 모든 종교가 그렇다는 얘기가 될 거고 말이야.
너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어.
하나님이 쓰신 책이라 굳세게 믿고 있는 분들이 실상은 성경의 제대로 된 역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얼마나 이세상이 완벽한 조화 속에 있는가를 알 수가 있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하지마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어째서 완벽하냐고?
그래 너는 또 나의 완벽을 문제 삼는구나.
그렇다면 우리 함께 왜 완벽한가를 살펴봐야 할 것 같으니까 먼저 완벽이라는 말부터 정의를 내려 보도록 해.
“완벽”의 사전적 의미는 모자람이 없고 흠 잡을 데 없이 완전하다고 나와 있는데 이러한 뜻에 걸맞은 인물이나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나님을 얘기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니?
맞는다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해결점을 찾았어.
하나님이 우주 삼라만상을 주관하시고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하다는 것이 옳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조차도 완벽해야만 하는 거야.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좀 더 알기 쉽게 풀어 보도록 해.
아들아!
지난번 내가 말한 적이 있던 연극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조금이해하기가 쉬울듯하니 생각해보자꾸나.
내가 어떤 연극에 악역을 맡았어.
그런데 내가 맡은 연기를 보다 잘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라야 보다 더 연극에 몰입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지 않니?
모든 예술가 들이 자신을 잊은 채 그 예술과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모르고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는 신의 완벽한 안배라는 말이야.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
솔직히 표현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도 모른 체 내재한 신의 안배 속에 완벽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야.
사람들이 인정하거나 말았거나…….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 스스로 만든 책속에 파묻혀서 하나님을 가두어 버린 짓을 보면 너무나 기가 막힌 노릇이겠지만 이 또한 신께 이르기 위한 몸부림의 일부임을 보고 있기에 나무랄 필요도 없을 뿐더러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란 것이 아니겠니?
하지만 남들에게까지 강요를 하고 자신들과 다른 길을 가는 이들을 아예 지옥으로 보내려고 하는 짓은 참기가 힘이 들더라는 것을 말하는 나 또한 같이 연극하는 또 다른 역할에 다름 아니라는 거지.
우리단체의 누구 역시도 마찬가지로 자신 내면에 부처를 봤으면 혼자 좋아하면 될 것이지 다른 이들을 아예 자신의 내면스승의 졸개 정도로 치부하려고 드는 통에 왕 짜증이 나는 것을 말할 수 있게 하기위해서 그런 착각을 해줘야만 한다는 거야.
그래야 내가 틀리다고 말할 기회가 생기지 않겠냐 이 말이거든.
게다가 그분에게서는 그것이 진리이고 자신이 부처라는 말이 틀린 점이 없거든.
다른 사람들도 똑 같은 부처이고 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점을 제외하고, 또 자신이 신의 완벽한 연출 속에서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틀리다고 할 점이 전혀 없어.
그런데 아들아!
이런 나의 말을 듣고 나서 다들 연극을 시시하게 여기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은 하지말길 바래.
내 말을 듣는다 해서 다들 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사 내 말을 백번 이해한다 해도 결국은 본인자신이 해야 하는 역할을 충실히 할 수밖에는 없어.
왜 그러냐고?
신이 아직 연극을 끝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모두가 인정해 버리고 나면 이세상이 존재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야.
말 그대로 완전이라는 말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연극이 끝났다는 말이 아니겠어?
물론 우리 모두가 이 연극을 끝내고 싶어 하는 순간이 온다면 가능한 일이긴 하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내 말을 모두가 인정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거라 여겨도 무방하리라 생각해.
이렇게 연극무대 위에서 짜인 각본대로 산다면 왜 우리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없느냐고?
아직도 너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구나.
어느 누구도 너를 구속 한 적이 없고 내가 말하고 있는 완벽한 조화라는 것이 결코 우리행동에 제약을 가져오거나 내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어떠한 이유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짜인 각본대로 사는 것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냐고?
그래?
네가 그렇게 크게 생각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보자꾸나.
그렇다면 바다에 사는 고래가 지구의 바다를 돌아다니는 것이 정해진 테두리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한다는 것을 고래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증명하고 있고 숭어 떼 역시 계절에 맞춰서 정확한 경로로 돌아다니는데 이러한 일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고래나 숭어들이 살아가는 것을 자유롭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니?
우리역시 신의 범주에서 보면 너무나 미미한 존재여서 더 넓은 우주에서 보자면 한낱 보잘 것 없겠지만 지구에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든지 자유롭지 않는가 말이야.
그리고 보다 명확한 일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신의 조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네 안에 있고 내 안에 있으며 동시에 모든 이들에게 있는 신이 내 머리를 움직이고 내 생각과 사고와 내 앎까지도 주관하고 있으며 내 삶은 물론 네 삶과 지구 위의 모든 존재들의 삶까지도 주관한다는 거야.
일찍이 이런 말을 부처님께서 하신 적이 있는데 “이 세상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었는데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거든.
이러한 존재를 요즘은 외계인들의 메시지에 보면 “상위자아”라고 표현하는데 무척이나 신빈성이 있다고 여겨져.
네가 믿거나 말았거나….
사람들이 인정하거나 말았거나….
앞서 내가 말했듯이 이미 내 주위에 내가 원하는 일들이 모두 와있다는 말 역시 이러한 범주에서 받아들여져야 해.
부처님이 꽃을 들자 마하가섭이 웃었다는 선문답이 있는데 이 말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설명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어.
부처님과 마하가섭이 짜고서 한 일이 아니라 마하가섭이 해야만 했던 역할이 있었기에 그러한 연극이 만들어졌던 거야.
다른 모든 이들이 알아보지 못했지만 가섭만이 알 수 있었던 것은 가섭이 수행력이 가장 높았다기보다 본인이 이미 그러한 역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 순간이 온 것이란 것을 알았던 거지.
그렇기에 부처님께서 꽃을 들자 웃을 수 있었지 않겠니.
이렇게 가섭존자가 웃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이미 와있는 자신의 바람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 실상은 정확하게 와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깨닫는 것만큼 어렵긴 하지만 말이야.
아니!
깨닫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라 봐도 틀리지 않아.
아들아!
내 생각으로는 이미 이 세상에 우주의 비밀이 모두 다 내려와 있다고 여기고 있어.
그런데 왜 사람들이 모르고 있냐는 질문은 더 이상 하지말길 바래.
지금껏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일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데 이제 새삼스럽게 또다시 말하고자 한다면 솔직히 너무나 실망스럽구나.
아!
그래.
내가 흥분한 나머지 깜빡 하였구나.
네가 아직 성인이 되려면 지구의 나이로 몇 년이 더 필요하고 학생이라 공부하느라 정신세계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구나.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설명해 보도록 해.
지난번 비 오는 날 구원의 손길을 마다하여 죽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 이야기 기억나지?
바로 우리가 그 사람과 같다는 소리야.
이미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 있는데 불구하고 볼 수가 없는 것은 나하고 인연이 있고 내 관심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리고 내 의식수준과 레벨이 맞아 떨어졌을 때라야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지.
본인이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으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래서 “꽃이 피니 새가 운다.” 하지 않았나? 생각해.
이러한 점은 책을 잃을 때 역시도 마찬가지야.
똑 같은 책을 읽어도 의식수준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왕왕 불수가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거든.
이것이 바로 인식의 차이 때문이야.
이모든 것이 자신이 만든 일인 동시에 신의 완벽한 안배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는 거지.
내 마음가짐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모든 일이 결정지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정확해서 한 치의 오차가 아니라 빈틈이 없어.
다른 것이 진리가 아니라 이것이 불변의 진리인 것이야.
아들아!
오늘은 너무나 말이 길어져 내 과거로의 여정이 늦어졌지만 그래도 어차피 내 과거의 얘기를 통해 얻어야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이러한 일이니 오늘의 이야기는 가불을 한 샘이라 여기자꾸나.
한 가지 너에게 덧붙이고 싶은 것은 내 마음상태가 어떤 때는 과거의 그 시점에 머물다가 현실속의 나에게 머물렀다 하는 점을 이해하기 바라.
지금의 이러한 내 마음이 형성되기까지 일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를 너와의 대화를 통해 나열하고 분석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있을 많은 일들이 이러한 내 말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시간을 아끼지 않고 투자를 하는 거란 말이지.
물론 이 또한 내 역할이고…….
결국에 가서는 이모든 것이 내가 원한 결과였고 신의 완벽한 조화 속을 살아 나가고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기에 그러한 일이 어떠한 과정에서 어떠한 상태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자는 거야.
다음에는 또 한걸음 과거의 특정한 시간대로 날아가 또 다른 변화를 기대하면서 오늘은 여기서 날개를 접도록 해.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