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옮겨간 방에서는 이상한 일이 발생이 되었어.
앞에서 내가 얘기한 재수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는 K선생님께서 재판을 받게 된 거야.
그런데 이분이 항소심에서 합의를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1심과 마찬가지의 형을 받아온 거였어.
원래 내가 이분과 말씀을 나눌 때는 연세도 높으시고 나가봐야 딱히 할 일도 없으니 합의 보는 것보다 차라리 놀기 삼아 교도소에서 지내시는 것이 낫지 않겠나하고 말씀 드렸었거든.
그러나 몇 달 남지 않은 형량조차도 지겨운가 보았고 노름방의 특성상 살고 나가도 어차피 돈을 갚지 않고 안 된다는 생각을 하신 듯 부인을 시켜 합의를 보았던 거야.
내가 이분에게 돈을 갚지 말고 버팅기길 말씀 드린 이유는 이분이 돈을 빌려 쓴 곳이 노름창고(노름을 주선하는 곳)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어.
사람을 모아서 노름을 시켜놓고 돈을 빌려주며 고금리의 이자를 받아먹거나 꽁지를 뜯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용을 당한 것이 분명해 보인 만큼 그러한 돈은 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고 이분이 이미 항소심까지 살아온 기간이 1심 형량인 10개월에 4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었거든.
그런데도 이분이 부인을 시켜 2천5백인가 되는 거금의 돈을 빚을 내어서 갚게 된 데는 교도소에서의 갑갑함도 있었겠지만 노름방을 경영(?)하는 인간들의 무지막지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 말이야.
내가 재판에 앞서 이분의 합의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앞서 방을 두 번이나 옮기는 동안 항상 이불보따리를 같이 메고 다녀야 했으므로 60년 가까운 인생살이를 어떻게 살아왔나를 늘 말씀하시고 노름에 빠져 살았던 자신의 삶을 항시 후회하고 계셨기에 재판에 앞서 합의를 본 사실까지도 내게 미리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어.
지인으로부터 모래체취 허가를 취득한 이분이 얼마나 돈을 쉽게 벌었을지 머리를 심하게 굴리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고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이런 땅 집고 헤엄치는 식의 사업 운이 따라주었으니 얼마나 재수 좋은 사나이 이었겠어?
그런데 이런 분이 장난삼아 업자들과 노름을 하다 보니 한마디로 꾼들이 꼬여 든 거야.
전문적인 도박꾼들은 시시한 상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꼭 돈벌이가 잘된다 싶은 상대나 공무원들처럼 안정적으로 대출이 가능한 상대를 꼬여서 패가망신을 할 때까지 끝까지 빼먹는 법이거든.
이분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마약에 빠진 사람처럼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가 교도소에 와서야 정신을 차린 거지.
그런 분이 어떻게 빚을 내서 노름빚을 갚았던 모양인데 판사님이 합의서를 못 본 모양이었고 항소심에서 1심 형량을 그대로 적용시키고 마는 실수를 한 거였어.
원래는 집행유예로 나가게 되어있다는 것을 그 당시 판사주사보께서도 말씀해 주기도 했으며 앞의 재판경험을 통해 보아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무조건 나가게 되어 있었거든.
방안 사람들이 모두가 축하 인사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알만하지 않니?
아들아!
이래서 기적이라는 말이 존재하는가 봐.
사람들은 모든 기적을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에다가 붙이고 있지만 나는 그 반대인 꼭 되는 일이 되지 않았을 때에도 붙여야 한다고 보거든.
왜냐고?
그 이유는 조금 있다가 알게 돼.
재판장에서 난리가 난 것은 판사님의 판결이 있고난 후였어.
부인께서 합의문을 들고서 펼쳐 보이고 난리를 쳤는데도 다시 번복할 수 없는 재판정의 법칙에 따라서 재판이 끝나 버리고 말았지.
금방 재판을 했으니 그 자리에서 다시 판사님이 고쳐주면 되리라 여기겠지만 한번 내린 결정은 번복을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재판정 법칙이야.
재판과정이 녹음이 되게 되어 있어서 얼버무리거나 번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이 일로서 난리가 난 것은 이분 하나가 아니었어.
먼저 변호사가 큰일이 났고 그보다 판사님은 더 큰일이 난 거였지.
몇 달 앞으로 다가온 부장판사 승진이 무산될 위기에 봉착이 된 거다 이 말이야.
그래서 오전에 재판이 끝나고 돌아온 이분에게 변호사가 득달같이 면회를 왔지 않겠니.
이분은 신문에다 내겠다고 길길이 뛰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내가 조용히 불러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귀띔을 했어.
어차피 쏟아진 물인데 무엇이 이익이 될 건지를 생각하시고 남들이 알도록 너무 떠들어 대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는 판사님과 합의를 보라고 했는데 먼저 합의를 본 금액에 앞으로 살아야 할 4개월을 추가하여 받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라고 말씀 드렸더니 이분역시 연세가 있는 분이라 연극을 아주 잘하시더구나.
방 사람들에게 합의는 보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시면서 나름대로 합의를 이끌어 내었지.
현금을 받는 것은 물론 자신이 살고 나오면 경비자리 하나를 구해주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취직을 시켜주기로 합의를 했다는 거야.
아들아!
이래서 내가 이분이 재수가 좋다가도 나쁘고 나쁘다가도 좋다고 했던 것이고 기적이라는 말은 이분에게 붙여야 한다는 말을 한 거였어.
결과를 놓고 보자면 이분에게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니?
60세 노인이 어딜 가서 수천만 원을 벌 수 있을 거며 아들의 취직자리를 그리 쉽게 구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말이야.
너는 이일을 보면서 내가 왜 그런 불법을 저지르는데 일조를 했나 하고 비난할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어.
내가 그때 그분을 도우려 나선 것은 결코 판사님을 위해서가 아니었고 그분이 연세도 높은데다가 노름으로 가산이 탕진 될 지경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었고 어차피 판결이 번복이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이익이 되는 쪽으로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어.
어느 한쪽만 사는 것이 아니라 상생하는 쪽으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거든.
만약 그때 원리원칙만 따져서 판사님을 매스컴에 알려 앞길을 막았더라면 이분의 보상은 어디에서 받을 것인가 말이야.
신문사에서?
아니면 국가에서 보상을 할 것인가?
그도 아니면 국민들이 모금이라도 해서 도와줄 것 인가?
항시 내가 주장하던 말은 이 순간조차 적용되는 말이기도 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결과만큼은 내가 감수하면 된다.”
어떠니?
나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적어졌지 않니?
만약 그래도 비난하고 싶다면 그것 또한 자유인만큼 얼마든지 하렴!
다만 그 비난으로 나중에 똑 같은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인과의 법칙을 넘어설 자신이 있다면…
아들아!
이 말은 결코 협박이 아니야.
내가 살아나오면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고 겪어왔기 때문에 말해주는 것이거든.
어떻게 아들을 보고 협박을 하는 아비가 있을 수 있겠니.
내가 하는 말이 어제오늘, 하루 이틀 만에 생긴 말이 아니란 것을 옛 어른들의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옛 어른들이 살아나오는 동안 쌓아놓은 경험에서 나온 말씀처럼 확실한 것은 없거든.
그러한 옛 어른들의 말씀에도 있듯이 다시는 이 우물의 물을 안 먹겠다고 침 뱉는 자는 꼭 그 우물을 다시 먹게 된다는 것이지.
그래서 어른들이 참 소리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는 거야.
절대라든지 다시는 같은 극단적인 말은 될 수 있으면 쓰지 않아야 해.
물론 그 모든 상황을 내가 모두 즐길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겠지만 그런 자신이 없다면 항시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 하는 거지.
이분과의 이별이 있고 난 뒤 곧바로 두 사람의 신입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둘 중에 한 사람이 행색이 조금 이상했는데 바짓가랑이 한쪽을 걷어 올린 폼으로 들어온 거였어.
다리에 있는 문신을 일부러 보이기 위해서인 것 같았는데 한마디로 내가 이런 사람이니 다들 조심해라는 식이였지.
아주 현명한 처신이었고 나라면 부끄러워서 감출 일을 그는 아주 지혜롭게 해내고 있었어.
처음 들어오는 방에서 선임자들과 싸움을 벌여서 서로 피해를 보는 것보다 어차피 새겨져 있는 문신을 보여줌으로 서로 편한 길을 찾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지 않겠어?
실지로 이 친구의 행동이 얼마나 효과를 보였나 하는 것은 마산 조 폭 두목의 행동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다른 분들이 들어왔을 때는 거침없이 욕을 하던 사람이 이 친구를 보고는 한풀 꺾인 태도를 보이는 것만 봐도 어설픈 행동이 통할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
이 친구가 신고식을 면제 받은 것은 물론이고 당장 오래된 식구들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친구의 지혜로운 처신 때문이었지 않겠니.
이래서 어딜 가도 제할 탓이라는 말을 하는 거야.
이 친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노름창고를 운영하다가 들어온 모양이었는데 하우스가 위치한 곳의 지명이 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동창 녀석이 운영하는 곳과 일치를 하기에 아는 척을 하고 보니 동창 녀석의 한해 후배였어.
모르는 척 넘어가려다가 노름방의 폐해에 대해 나무라고 한마디 해줄 모양으로 아는 척을 한 것인데 깍듯이 선배님대접을 하려고 하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까 얼른 사람들이 눈치 못 채도록 하라고 했지.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걸어가는 길이 다른 만큼 아는 척하는 것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백일도 안 된 아이를 두고 들어왔다는 그의 말에 인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입에 거품을 물고 노름이 가져다주는 가정파괴의 경우를 내가 아는 범위에서 열심히 말을 했고 지금 당신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 가정에 아픔을 가져다주고 있으며 나중에 그 일에 대한 인과를 당신이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해주었는데 아주 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어.
자신역시 아이가 태어난 이상 교육을 위해서라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겠다고 하더구나.
노름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마약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기에 열심히 설명을 했었어.
내가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했던 것은 내 어린 시절의 동창생들이 이러한 창고라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일로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야.
언젠가 한번 전화를 신청하러 전화국엘 들렀을 때 이었어.
서류가 모자란 것이 있어 집에 전화를 하려고 공중전화부스엘 갔더니 동창생 녀석들이 웬 아주머니 한 분이 전화하는 옆에 서 있기에 인사를 나누었는데 알고 보니 밤새 노름을 하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여기 저기 전화를 해서 지인으로부터 돈을 빌리려는 아줌마가 행여 달아날까 지키고 있는 것 같았어.
밤새 노름을 하느라 빌려 쓴 돈을 받기 위해 고급승용차에 모시고 다니며 수금을 하는 것이었지.
나중에 들었던 얘기로는 노름을 하다 사람들이 피곤하여 노름판의 열기가 식게 되면 돈이 벌리지 않으니까 음료수라고 속이고 마약까지도 먹인다고 하더구나.
자신들도 모르게 마약중독까지 되는 거지.
한두 번만 해보고 안 하면 되지 않느냐고?
아들아!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노름이라는 놀이가 마약과 같은 성분이 있기 때문인 것이고 사람의 특성상 빠지는 종류 역시 다양한 것이거든.
포커, 화투를 가지고 노는 방법도 너무나 다양해서 다 기억도 못하겠다만 이 같은 도박역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심리상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품인데 일단 개발을 시키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빠져 든다는 거지.
아예 마음이 약한 사람은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구나.
여자에 빠지거나 마약에 빠지거나 노름 또는 술, 담배, 또한 낚시, 등산 이밖에도 경마, 경륜, 화초수집, 골프, 카지노, 등 수없이 많지 않니?
이모든 것을 노름이라고 봐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취미 생활들이 우리가 일상생활 할 때 내 생활에 피해를 가져 다 준다면 이미 취미를 벗어나서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과거 내가 18살 때 시작한 포커로 인해 양복이나 선풍기까지 전당포에 맡겨본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노름의 폐해를 조금은 알 수 있었거든.
내 또래의 친구들이 포커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시작한 내가 노름계(?)에서 일찍이 손을 씻었던 것은 그 이후에도 십 수 년이 흐른 후였는데 어느 날인가 노름이라는 것이 결국은 생산적인 면보다 소비적인 면밖에 없는 것이라는 자각이 일어나고 난후였어.
이기면 이기는 데로 한턱을 내야하고 지면 지는 데로 손해를 보는데다가 밤 세워 놀다 보니 다음날 일하는데도 지장이 보통이 아닌 거야.
게다가 돈을 잃게 되면 화가 치솟아 좋던 사이에 욕설이 오가는 등 이익은 없고 피해만 크다는 것을 알았고 가정불화까지도 일어나니 어느 것도 득 되는 일이 없었어.
그래서 냉정하게 끓어버린 거지.
누군가 내게 노름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지만 그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어.
내가 끓었다고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야.
아무리 나쁜 것이라 해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유용하다고 말이지.
문제는 누가 어떻게 평가하고 법이 어떤 해석을 내리는가가 아니라 이것이 내게 얼마나 이익을 가져 다 주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가를 봐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말을 하고 있지 않니?
좋다 나쁘다 판단을 하려고 하기보다 나쁘다고 여겨지면 자신이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나쁘다는 판명이 나서 없어지게 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방법이라는 거지.
이 친구 외에 또 한분의 신입을 만나게 되었는데 안경테공장을 경영하다 부도가 난일 때문에 들어오신 얌전하시다 못해 착하디착하게 생기신 분이었어.
이분이 내 주의를 끌었던 것은 이분이 너무나 착하신 탓 이었는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들보다 훨씬 급하게 재판을 받고 나가셨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그야 이분이 지어놓은 공덕이 많았기 때문이었지 뭐겠니?
이분이 몇 년 동안 어떤 산악회의 회원으로 있었던 모양이었고 그 회원 중에 판사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을 등산할 때마다 업고 다닌 모양이었으니 그 복을 받은 것이었지.
법의 잣대가 만인에게 공평해야지 어떻게 누구에게는 이렇게 적용시키고 누구에게는 저렇게 적용시키는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는 하지 말길 바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평불만이 사실은 너무나 공평하고 한 치의 오차 없는 신의 안배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말이야.
다 같이 부도를 냈다 해도 사람이 다르고 죄질이 다른 만큼 법적용이 일정한 것이 잘못된 것이지 비슷한 사건이라고 해서 판례에 따라 법적용을 받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거든.
이분의 경우 수년간을 선행을 해왔으니 이 같은 복을 받는다 해서 안 될 일이 전혀 없지 않겠어?
게다가 이분이 들어와서 재판 받는 날까지 감방장의 치질 물을 도맡아서 하고 뒤처리까지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을 내가 똑똑히 목격했거든.
옆에서 보는 내가 답답해서 욕을 하고 싶을 정도로 감방장의 무례함이 보였지만 이분은 절대 상대를 기분 나쁘게도 하지 않았고 나이가 열 살은 더 아래인 조 폭 두목의 반말에도 웃음으로 대하시는 분이셨어.
이런 분이 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면 누가 받아야 한단 말이니?
누군가 말을 한 적이 있는 무전 유죄, 유전 무죄니 하는 말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잣대로 쓰여야 하고 이 세상에 불평등이 없길 바란다는 것은 신이 없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해.
왜 그런가 하는 것은 기적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알 수가 있어.
평범하지 못한 일, 즉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기적이라는 말을 즐겨 쓰고 있는데 이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라도 불평등은 존재해야만 한다 이 말이거든.
어차피 기적이란 평등하지 못한 불평등이라는 요소가 담겨져 있다는 말이지.
사실 불평불만을 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기적 같은 일이나 혜택들이 자신에게 오지 않았음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러냐고?
내가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거든.
내가 이러한 법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짓을 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살펴봐야지 남이 돈을 쓰던 백을 쓰던 그 사람들의 문제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모범수들을 위한 혜택 또한 마련 돼 있는데 불구하고 그러한 혜택을 볼 생각은 없이 무작정 남이 혜택 보는 것을 배 아파하고 성토하는 목소리를 높여보아야 내 목만 쉴 뿐이란 거지.
이 세상에 불이익을 당하는 모든 분들이 사실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내가 불러들인 결과란 것을 알아야 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얼마나 많은 분들이 나에게 욕을 하고 비난을 퍼부을지 모르는바 아니지만 이것이 모든 불이익을 당하는 분들의 마음을 덜 아프게 한다는 점을 알기에 내가 이렇듯 욕을 자청하는 거야.
어째서 그러냐고?
너도 생각을 해보렴.
만약 내가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다 해서 내 주위가 변화가 일어나고 내 형편이 좋아진다면 얼마든지 불평을 말해야 하리라 보지만 그렇지 않고 불평과 불만으로 끝나는 경우는 가슴만 무너지는 결과가 되지 않겠어?
문제는 무엇이 내 마음에 진정한 안정을 가져 다 줄 수 있는가 라는 거지.
그렇다고 무작정 맥 놓고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야.
나 역시 어떤 경우는 앞에 당사자를 놓고서도 내 불만을 말할 때가 있고 내 권리를 반드시 찾아낼 때도 있어.
그럴 때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이러한 내행동이 상대와 나에게 얼마나 이익을 가져 다 주는가에 대해 생각을 해.
내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조차 이렇게 하길 바라거나 강요하는 것은 아니야.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 일뿐 상황과 여건에 맞춰서 각자의 판단을 하라는 거지.
무엇이 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 다 줄 것인가 하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항상 경험했던 것은 눈앞의 불이익에 대한 불평불만을 주장하는 행위를 통해 현실을 벗어나봐야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는 것이고 진정 그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현실에 대한 불평불만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야.
이러한 내 마음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날까지 내가 살아나온 경험을 통한 것인 만큼 어린 네가 내 마음을 이해하긴 어려우리라 생각해.
하지만 언젠가 이 말이 이해가 되리라 여겨지고 차라리 이 말을 끝까지 이해 못하는 네 인생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지만 이미 너 역시 사람이 살면서 겪어야 하는 고뇌의 맛을 보고 있으니 좀 더 빨리 내 말을 이해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분이 나가고 나서 H사형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게 되었는데 철학과 출신답게 편지내용에는 선문답이 두개 있었는데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던 엄마와 아들이 동시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건질 것인가와 비싼 도자기 속에서 자라는 귀한 분재를 어떻게 끄집어 낼 것인가 이었어.
솔직히 내게는 문제 같지도 않았고 이러한 것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러한 선문답이 수행하는 분들 중에는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는 분들이 있으니 모든 분들이 같지 않은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는 말은 수행의 길에도 적용됨은 물론 세상 어디든 적용이 되나 보았지.
이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상황이 닥쳤을 때의 내행동이 정답이라는 것과 무엇이 더욱 중요한가? 판단을 하고 행동하면 된다는 간단한 대답과 함께 사형에게 부탁하나를 했는데 가까이 지내던 스님 중 한분 이신 B스님께 안부를 전해달라는 거였어.
지금은 우리단체의 수장 이다시피 하신 이분을 내가 왜 보고 싶어 했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입문을 하고 나서 내가 가는 어디에든 눈에 보이시는 스님이었기 때문일 것 같아.
처음 입문하고 청옥센타를 생전 처음 갔을 때도 그분이 계셨고 부산에 장사를 갔다가 시간이 촉박해서 부산센터에서 명상을 하고자 들어갔을 때도 보였으며 내가 부도가나서 태백에 머물고 있을 때 역시 나에게 호주의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조언을 하셨고 시드니에서 열린 호주 선에 오셔서 브리즈번에 있는 우리 집에까지 오셨으며 나중에 한국에서 선행사가 열렸을 때는 매일같이 차를 마시며 공사 일을 의논하였던 분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지는데 이후에도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으니 전생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는 분이야.
정확한 이유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알리지 않고 있다가 연락을 했던 것은 나중에 나가게 되면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 서운해 하실까 염려된 때문이었던 같았어.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스님께서도 힘든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지.
출소를 하고 나서 들어보니 동수들로부터 공격의 화살을 많이 받게 되어서 승복을 벗고 머리도 길렀다가 또다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을 무렵 내가 연락을 하게 된 거야.
이 같은 일이 일어난 데는 우리사회의 고정된 시각이 문제가 되고 있었어.
우리단체 내부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우리에게만 국한된 일일수도 있겠으나 실상을 보자면 사회에 만연되어있는 분위기가 그러하니 우리단체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성싶구나.
먼저 이 스님이 승복을 벗게 된 이유를 보면 동수들이 스승님이 출가재가의 분별이 없어야 하는 말씀을 하신 것을 놓고 승복을 입고 있는 스님들을 공격한데서 문제가 일어난 것 같았어.
왜 스승님께서 승복을 벗으라고 하셨는데 입고 있느냐는 거였지.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얘기 같은데 그 당시는 조금은 심각했던가 봐.
스승님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 한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평생을 간직할 진리가 되어 버린 경우였어.
대만의 출가승들을 상대로 하신 법문을 우리현실은 생각도 않고 적용을 하려는 어리 섞음에서 나온 판단에 따른 행동이었던 거지.
또 캄보디아에서 더 이상 승복이 필요 없음을 말씀하신 것을 그때까지 되돌림을 뜻하는 되돌이표를 적용시키고 있었던 거야.
대만의 경우는 이미 스승님께서 생활을 모두 책임지고 계셨던 만큼 승복을 입을 필요도 없었고 홍법 역시 출가재가가 분별이 없음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 승복이 필요만 없는 것이 아니라 입어서는 안 되는 것 이었고 캄보디아에서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아쉬람에서 생활할 사람들이 승복이 더 이상 필요가 없었던 거지.
그런데 이런 상황은 살필 줄 모르고 옛날 한 시점에 스승님께서 하신말씀을 가지고 문제를 삼은 것 이었어.
스님은 왜 스승님이 하신말씀도 듣지 않는가 하고 말이야.
아들아!
이제 내가 앞서 말한 적이 있었던 선문답을 들먹였는지 알 것 같지 않니?
엄마와 아들이 함께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건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이 그 당시가 되어봐야 한다고 내가 말했던 것처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답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한 가지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는 거야.
너도 한번 생각을 해보렴.
한꺼번에 빠진 엄마와 아들을 누구를 구해도 정답이지 아들만 구하는 것이 정답이고 엄마만 구하는 것이 정답일수 있겠는가 이 말이지.
누구를 구해도 정답이고 두 사람 다 구하다가 죽어도 정답이며 두 사람 모두 구하지 못하고 구경만하고 있었다 해도 정답인 것이며 누구 한 사람만 구한다 해도 정답인 거야.
그리고 분재와 도자기의 경우 역시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여서 행동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해.
그렇지 않니?
분재를 구하려면 도자기를 깨면 될 것이고 도자기를 구하려면 긴 칼이나 가위를 집어넣어서 분재를 잘라내면 될 것이고 말이야.
이렇듯 모든 일은 무엇이 가치 있을 것인가 하는 판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거기에 대한 고민을 아무리 오래 해도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아.
물론 선문답이 이러한 고민을 통해 정신공부에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긴 해.
하지만 그 당시 스님이 승복을 벗어야 했던 것이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판단 때문이라는 것을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과거 큰 스승들의 가르침을 지금의 우리현실은 생각지도 않고 무턱대고 적용시키려고 하는 무지를 탓하고 싶은 거야.
우리나라 동수들의 경우는 스님들에 대한 뒷받침이 전혀 되지 않고 있었던 문제가 있었고 일단 승복을 벗어버리고 나면 가족들이나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차비 한 푼 보태주는 사람이 없어져버리는데 승복을 벗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거든.
한평생을 스님으로 지내시던 분들이 사회에 나와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말이야.
그렇다고 우리단체에서 보시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사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동수들로부터 지탄을 받고서 옷을 벗기도 하신 모양이었으니 그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였겠어.
우리단체에서 스님들이 옷을 입고 있음으로 적어도 사이비는 아닌가 보다 하고 입문을 결심하신 분들 또한 많은 것을 보면 스님들이 옷을 입고계신 것이 결코 동수들로부터 지탄 받을 일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이 같은 일은 일반인들 또한 마찬 가지라 여겨져.
스님이 되었던 목사님이 되었건 신부님이 되었든 간에 그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의 위안을 얻고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른 일에 대한 보속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나? 이 말이거든.
아들아!
내가 어떠한 생각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유일한 정답을 말하는 것은 아니란 것을 네가 알았으면 해.
아무리 내가 좋은 말을 구구절절이 한다 해도 그것 역시 그때 그곳에 적용해야 할 말일뿐 다른 곳에는 또 다른 정답이 있다는 것이야.
내가 선택한 종교는 내가 선택한 정답일 뿐 다른 이의 정답까지는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권할 수는 있으되 강요는 하지 말아야 하며 긍정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타 종교를 부정하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미물이라 해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값진 것에 틀림이 없듯이 아무리 사이비라 해도 그것을 통해 위안을 얻는 아픈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설사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나무라고 욕을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은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진정구원 받은 자들이 하여야 할 일이 아닐까 해.
성경말씀에는 이런 말이 있지.
“저 절벽에 핀 꽃을 보아라.
아름답지 않느냐.
저 절벽의 이름 없는 꽃조차 하나님이 돌보시는데 어찌 하느님의 자녀인 너희들을 돌보지 않겠느냐.
오늘 무엇을 먹을 것인가 내일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 말은 우리가 꽃과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어.
꽃은 신을 찬양할 줄도 모르고 신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음에도 하나님이 보호하시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들인 우리가 보호 받지 못할까?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또는 불경을 믿지 않는다고?
성모마리아를 믿지 않아서?
아들아!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내 자식임에 틀림이 없듯이 내가 어떤 종교를 믿는다 해도 하나님의 자식이 아닐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야.
설사 사이비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이 세상모든 것에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여정을 여기서 쉬어가자꾸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