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태복음22.

배가번드 2016. 5. 2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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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목사의 성경해석을 기다리는 여러분!

여러분의 하루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요.

홀로된 나 홀로 목사는 성경을 아내삼고 애인삼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만 시간이 넉넉지 않아 오래 함께하지는 못하고 있는데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성경과 함께하고 있지요.

나 홀로의 자유로움을 오로지 성경을 붙들고 지낸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떤 때는 집중이 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영감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때가 가끔은 있습니다.

너무 피곤하거나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럴 때가 왕왕 있는데 할 수 없이 성경책을 덮어두고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1편의 글이 나오려면 2주 가까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하루에 1편씩의 글을 썼던 적도 있는데 이제는 체력적으로 힘이 드는 것 같군요.

두세 시간정도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눈이 침침한 것은 둘째 치고 어깨가 상당히 아파옵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점은 사무직종사자들도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겠다는 것이고 육체적 노동일을 하는 내가 오히려 좋을 수도 있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 몸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12시간이상을 현장에서 보내야하는지라 성경에 집중하는 시간이 짧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 할 수 있지요.

나 홀로 목사의 성경시간을 기다리는 분들이 지루해하실 것 같아서 해본소리이며 재촉하지 말라는 뜻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서론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14:1)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14:2)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14:3)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14:4)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14:5)

마침 헤롯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14:6)

헤롯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14:7)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14:8)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14:9)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14:10)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14:11)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14:12)

 

언젠가 언급을 했듯이 헤롯왕은 로마시대정부에 의해서 팔레스타인과 그 인근지역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은 이 두메 왕조를 뜻합니다.

그중에서도 헤롯대왕은 B. C 47년 유리시스 케사르에 의해 임명받은 유대총독 안티파스의 둘째아들인데 B. C 4년에 70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이후로 성경에 나오는 여러 명의 헤롯들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헤롯대왕의 아들들입니다.

예문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로 헤롯 안디바(안티파스)이지요.

헤롯이 죽자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 왕이 되어 BC 4-AD 39년까지 다스렸던 사람입니다.

사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영적인 일과는 무관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는지라 언급을 해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고 있는데 실상을 보자면 그다지 중요할 것이 없다는 것이 나 홀로 목사의 개인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명암을 달리할 수 있으며 절대적 진실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지요.

영적인 공부를 하는 많은 이들이 선악의 경계가 허물어져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말들은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전혀 적용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 짓기 때문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선악의 경계가 시비를 가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진실과 거짓을 구분 짓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진정한 의미에서 음양의 조화를 논할 수 있게 되며 그때서야 비로소 영생을 안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경우를 두고 문자에 사로잡혔다하며 논리의 바다에 빠져있다고도 하는데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완전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있다 할 수 있지요.

혹자(或者)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지식에 비추어 깨달은 사람을 가리기도 하지만 영생의 세계에서는 세상 것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어찌 보면 진정한 각자(覺者)는 아주 바보 같은 사람일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 관심이 없어 지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기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유식한 사람 중에 깨달은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겠지만 지식의 유무가 깨달음의 척도일수는 없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할에 대한 문제이기도한데 어떤 이의 역할이 스승이라고 한다면 세상지식도 많이 알아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세상에 널려있는 그 많은 지식을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지금 예문으로 올린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몇 가지의 전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을 화가들이 다투어 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 살로메는 팜므파탈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지요.

팜므는 프랑스어로 여성이며 파탈은 운명적이라는 뜻이니 권력을 가진 남성을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 같은 일을 볼 때 흘러간 과거의 일이 어떠했던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할 것입니다.

성경해석도 마찬가지여서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도 있으며 나 홀로 목사의 성경해석이 유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얼마든지 더 좋은 해석을 해낼 수 있으며 전혀 다른 내용으로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이모든 일이 가능한 이유가 우리 모두의 내면에 하나님이자 성령이신 창조력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켜드리기 위해 한 말씀 올렸는데 각설하고 본문에 충실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문을 보신 분들은 대개가 이 내용을 그저 요한이 무엇 때문에 죽었는가에 대한 일을 기록해놓은 것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나 홀로 목사는 그렇게만 여기지는 않습니다.

우선적으로 헤롯은 양심의 심판을 받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는데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의 행위들을 보는 순간 자신이 무고하게 죽인 선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으로 여기게 되지요.

인과응보의 법칙을 엄격하게 적용받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한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저질렀던 어떠한 잘못들이 의식의 깊은 곳에 잠재해 있다가 특정한 일을 맞이하게 되면 되살아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함부로 맹세를 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오는가 보여주기도 하며 자신의 체면 때문에 영적으로 어떠한 지경에 처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헤롯이 만약 육적인면보다 영적인면을 드높이 생각했더라면 감히 세례 요한을 죽이지 못했을 것이지만 자신이 왕이라는 생각과 사람들 앞에서 약속한일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그와 같은 엄청난 짓을 저질렀던 겁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심지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수행자들조차도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물질적인 가치관을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자체가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은 보다 깊숙이 잠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과 똑같이 만들었다고 성경에 기록해놓은 이유가 모든 사람들안에 하나님의 숨결이자 하나님 자신인 성령이 들어있기 때문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하기에 내재한 성령이 드러났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평소 살아가는 태도를 보아야 알 수 있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여기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두 사람의 크리스천이 있다고 가정해보고 이 두 분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가려보자는 겁니다.

만약 한사람이 행동을 함에 있어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좋지 않은 일을 한다고 하면 이분은 분명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성령을 불어넣어주었으며 우리들안에 성령이 들어있음이 믿어진다고 한다면 그 어떤 잘못된 행동도 할 수가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물론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 즉시 참회가 이루어져야하며 혹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모른다 할지라도 곧바로 하나님의 징계가 주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안 된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믿는다 할 수도 없는 겁니다.

심한경우에는 버림받은 자식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는 거지요.

이미 몇 번이나 성경을 통해 확인한바 이기에 더 이상 강조할 필요는 없겠지만 헤롯왕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더 되새기게 만들기에 언급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았던 성경말씀은 우리들에게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또한 걸음 더 성경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14:13)

When Jesus heard of it, he departed thence by ship into a desert place apart: and when the people had heard thereof, they followed him on foot out of the cities.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14:14)

And Jesus went forth, and saw a great multitude, and was moved with compassion toward them, and he healed their sick.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4:15)

And when it was evening, his disciples came to him, saying, This is a desert place, and the time is now past; send the multitude away, that they may go into the villages, and buy themselves victuals.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4:16)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14:17)

And they say unto him, We have here but five loaves, and two fishes.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14:18)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14:19)

And he commanded the multitude to sit down on the grass, and took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es, and looking up to heaven, he blessed, and brake, and gave the loaves to his disciples, and the disciples to the multitude.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14:20)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14:21)

 

예전에는 이 같은 기적을 두고 실제적인 일로 보는 이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생명의 떡이라 말씀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현실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여기에도 몇 가지 새겨볼만한 일들이 있는데 먼저 13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배를 타고 떠났다는 것이 강조되어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이 구원의 배를 타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한 것이며 빈들(a desert place)이란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마음을 비유한 것입니다.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왔다는 말은 아직까지 영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구원()의 말씀을 전해준다는 말을 듣고 모여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14절에 병자를 고쳐주었다는 말은 잘못된 인식들을 바꾸어주었다는 말로 봐야합니다.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에 해당하는 영어를 보게 되면 he healed their sick 인데 직역을 해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다가 되지요.

환자들을 돌봐주셨다는 말을 하지 않고 구태여 그들의 병이라 한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병이라는 말이며 사람마다 같지 않은 인식을 가졌음을 나타낸 거라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5절에 저녁이 되어 날이 저물어졌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지만 그다지 성과가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는 말이며 그들에게 마을로 내려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갈 길로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까지 들어본 많은 이들이 나 홀로 목사가 제멋대로 성경을 본다 말할지 모르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 홀로 목사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they may go into the villages, and buy themselves victuals)라고 말한 부분을 직역해 보면 그들로 하여금 마을로 들어가 그들 자신의 먹을 것을 사먹게 하는 것이 어떠냐가 됩니다.

원래 그들이 먹던 것을 먹게 한다는 말은 말씀전하는 것을 포기하자는 말이 되는 거지요.

사람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게 되자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말을 했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16절에 너희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제자들이 말씀을 전해주라고 한거지요.

17절의 제자들 대답이 재미있는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했지요.

너무나도 유명한 오병이어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는데 여기에도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실지로 떡이라고 써진 영어단어 loavesloaf의 복수형으로 속어로 쓰일 때는 두뇌나 머리로도 쓰이며 fish는 명사로 쓰일 때는 물고기이지만 동사로는 낚시하다가 됩니다.

19절을 보게 되면 지금의 나 홀로 목사의 말이 타당성을 넘어서 확신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5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는 말은 특별한 가르침을 7제자들에게 전해주었다는 말이며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수했으며 많은 제자들은 다시 대중들에게 말씀을 전해주었다는 말이지요.

12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올곧게 믿고 제자가 된 이가 12명이었다는 말이며 여자와 어린이외에 오천 명이 먹었다는 것은 비록 그 당장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생명의 말씀으로 예수님과 인연을 맺은 이가 그만큼 많았다는 말입니다.

시간관계상 비교할 수 있는 다른복음서 내용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마가복음630절과 누가복음910절을 살펴보면 상당부분이 다르게 기록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비유의 말씀이므로 그렇게 기록해 놓은 것이며 보다 타당성 있는 해석은 우리들의 몫이라 할 수 있지요.

만약 아직도 누군가가 오병이어를 액면그대로 믿고 싶다고 한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며 그러한 분들의 주장을 조금도 반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나 홀로 목사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될 것이며 동조하고 싶지 않거나 반대의사를 밝히고 싶으신 분들은 오실 때 자유롭게 오셨던 것처럼 갈 때도 그렇게 자유롭게 떠나시기 바라며 다음구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14:22)

And straightway Jesus constrained his disciples to get into a ship, and to go before him unto the other side, while he sent the multitudes away.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갔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 구분지어 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으셨다는 것은 이미 영생에 속해져있는 이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세상에 남겨진바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것이지요.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14:23)

And when he had sent the multitudes away, he went up into a mountain apart to pray: and when the evening was come, he was there alone.

 

이미 여러 차례 보았다시피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는 말은 높은 인식의 세계로 들어가셨다는 말이며 기도를 한다는 것은 깊은 묵상(명상)에 들어가셨다는 말입니다.

명상이란 눈을 감고 생각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한다면 이보다 깊은 기도는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깊은 명상을 하신 것이며 높은 인식의 세계로 들어가신 겁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구원받은 제자들은 또다시 고난을 받고 있으니 다음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14:24)

But the ship was now in the midst of the sea, tossed with waves: for the wind was contrary.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세상으로 들어가 세파에 시달리게 되자 고난과 역경을 마주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14:25)

And in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 Jesus went unto them, walking on the sea.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14:26)

And when the disciples saw him walking on the sea, they were troubled, saying, It is a spirit; and they cried out for fear.

 

밤 사경이란 아주 칠흑 같은 밤을 나타내는 것인데 앞도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한다 할 수 있지요.

이러한 험한 지경에도 성령과 하나이신 예수님은 그 위를 자유롭게 걸어오셨다는 말이니 세상(바다)과는 무관한 삶을 사시는 분이라는 말이며 세파에 믿음이 흔들리는 제자들을 구하러 오셨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제자들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능력을 보았으므로 유령이라 소리쳤지요.

사실 유령이라 해석해놓은 spirit은 성령이라 봐야합니다.

이야기의 흐름상 이렇게 해석한다 해서 안 될 것은 없지만 성령이라 해석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유령이건 성령이건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말이 중요하지요.

여기에는 하나의 수행 상 비밀이라 할 수 있는 점이 심어져있는데 우리들이 영생으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하는 산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분명히 눈이 밝은이는 알아볼 것이니 하나의 숙제로 남겨두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불현 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데 지난 시간에 요나서를 보면서 우리들이 알았던 사실이 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밥이 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미가를 올렸지요.

그 내용 중에 지금예수님 제자들의 상황과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잠시 보시죠.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2:3)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만큼 믿음이 깊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이만큼 우리 인간들은 역경이나 고난을 이겨내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나약해지는 제자들을 위로하기위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14:27)

But straightway Jesus spake unto them, saying, Be of good cheer; it is I; be not afraid.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나하면 제자들이 자신을 똑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영으로 보는지라 안심을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만약 예수님께서 숭배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나는 너희와는 다른 존재이므로 나와 하나가 될 수 없다 말씀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도 똑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신거지요.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여기에 대한 보충설명이 있을 것 같으니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14:28)

And Peter answered him and said, Lord, if it be thou, bid me come unto thee on the water.

 

용기 있고 성질이 급한 베드로는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맞는다고 한다면 나 역시 세파를 이겨낼 수 있을지 시험해 보겠다는 겁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시는데 결과가 궁금해집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14:29)

And he said, Come. And when Peter was come down out of the ship, he walked on the water, to go to Jesus.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14:30)

But when he saw the wind boisterous, he was afraid; and beginning to sink, he cried, saying, Lord, save me.

 

처음에는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세파에 맞서는 것 같았지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고난과 역경은 베드로의 믿음을 침몰하게 만들었지요.

결국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자신 안에 성령이 깨어났는지(심어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차이라고 봐야하며 믿음의 차이라고 봐야합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14:31)

And immediately Jesus stretched forth his hand, and caught him, and said unto him, O thou of little faith, wherefore didst thou doubt?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14:32)

And when they were come into the ship, the wind ceased.

 

여러분은 이 구절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 홀로 목사는 참 오랜 세월을 이렇게 생활해 나왔습니다.

물질적 어려움은 물론 정신적 고통과 늘 함께하며 살아나왔는데 그때마다 내 몸을 떠받쳐주는 거대한 힘을 느꼈지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함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이 내안에 계신다는 믿음하나가 촛불이 되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절망적인순간마다 희망의 불꽃이 되어 차갑게 얼어붙으려던 마음을 녹여주곤 했었지요.

한때는 방황한 적도 있었고 타락의 길을 헤맨 적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을 걷게 되고야말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반항도 있었으며 나 자신의 육신을 학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교도소를 일곱 번을 가도 모자랄 정도의 죄를 저질렀으며 실지로 수감생활(收監生活)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도 절대 놓치지 않았던 것은 내재한 신에 대한 믿음이었으며 그 신은 하나밖에 없는 유일신이자 절대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거나 특정한 종교단체에 속해져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외형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내적인면에 초점을 맞추기 바랍니다.

깨달은 스승의 역할이란 우리들의 진면목(성령)을 깨닫게 만들어주는데 있는 것이지 숭배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종교가 존재하는 목적도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거나 완전한 해탈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데 있는 것 일뿐 교세확장을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바치게 하거나 천당행 표를 파는데 있는 것은 아닌 겁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도 보여주셨다시피 베드로에게 너도 할 수 있으니 물위를 걸어라 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나에게 있는 성령이 너희에게도 있으니 그 믿음을 가지고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베드로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은지라 세상(바다)에 빠져들게 될 것을 예수님이 다시 건져 올리신 거지요.

이 같은 일은 오늘날의 구도자들이 마음속깊이 새기고 있어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험난한 지경에 놓일지라도 자신 안에 성령이 함께 있음을 확신한다면 결코 두렵지 않을 것이며 무난하게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나약한지라 때로 유혹에 빠질 수도 있으며 다리를 헛짚어 넘어질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다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다면 분명히 하나님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을 31절과 32절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함께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는 말은 성령과 하나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령과 함께 하게 되면 모든 어려움이 그친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또 다른 누군가는 이 말씀을 두고 하나님을 믿으면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긴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더욱 큰 어려움이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며 역량이 큰사람일수록 하나님이 더욱 큰 짐을 지워주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내용도 성경에는 있는 걸로 알지만 아직은 관련구절이 나오지 않은 관계로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덧붙이고 싶습니다.

정말 자신의 내면에 성령이 있음을 확신한다고 하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며 그조차도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이러할 때라야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인데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보겠습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14:33)

Then they that were in the ship came and worshipped him, saying, Of a truth thou art the Son of God.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감사하며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들은 33절에서 왜 신의 아들(Son of God)이라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왜 앞서 본 성경내용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인자(Son of man)라고 했을까요?

이러한 이유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달리말하자면 우리들 모두(사람의 아들)가 신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해놓은 겁니다.

결코 예수님만을 하나님처럼 떠받들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미 여러 차례 말해놓았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고 14장의 나머지 부분을 보고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14:34)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14:35)

And when the men of that place had knowledge of him, they sent out into all that country round about, and brought unto him all that were diseased;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14:36)

And besought him that they might only touch the hem of his garment: and as many as touched were made perfectly whole

 

35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약간 이상한점이 보입니다.

한글성경에는 그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 알고라고(And when the men of that place had knowledge of him) 했는데 영어성경을 보면 약간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거지요.

이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예수님이 성령과 하나 되신 이 인줄 알고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똑같은 말이긴 하지만 풍기는 뉘앙스가 다르다는 말이며 감동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36절을 보게 되면 나 홀로 목사가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알게 되는데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해도 나았다는 말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성령으로 인식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며 사람들의 병이 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의 시간도 믿음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15장에서는 과연 어떠한 내용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며 마치겠습니다.

 

 

구도자여!

네 깊은 마음속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네 삶의 파편들이

보이지 않고 있다면

너는 아직 구도의 길을 시작조차 않았다.

 

구도자여!

주변에 네 가슴을 후벼 파는 소리를 하는 이가 있는가?

 

만약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면

그대는 기뻐해도 좋으며

이제 구도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알라!

 

구도자여!

네 귀에 달콤한 속삭임은

네 영혼을 지옥에 빠트리는 소리이니

그 사람을 경계하라!

 

인식의 강바닥에 가라앉은 쓰레기를 휘저어놓아야

자신이 신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줄 알게 되나니

그제야 네 안의 신이 모습을 드러내리라!

 

귀에 즐겁고 마음에 흡족한 말만 쫒아 다니면

네 자신이 높아져 더 이상 내려올 곳도 없어질 것이니

그곳이 바로 마왕이 사는 곳임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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