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목사의 성경강해시간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많은 의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눌러 참고 여기까지 따라 와준데 대해 참으로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분들 중에는 직접적으로 불평을 하신 분들도 있고 때로는 간접적으로 비웃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 모든 분들의 생각이 틀리다고 볼 수는 없으며 나 홀로 목사의 성경해석이 부동적인 진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각자의 인식정도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똑같은 해석이 나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지요.
이곳을 방문하시는 많은 분들이 말하길 우리교회의 말씀을 들어보라고 권하시는데 저로서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며 나 홀로 목사의 말에 동조 해달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몇 번에 걸쳐 말씀을 드렸다시피 성경을 보는 각도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많은 종파가 생긴 이유가 그렇다고 했던 만큼 이곳은 나 홀로 목사의 전용공간입니다.
동조를 하건 그렇지 않건 자유이지만 나 홀로 목사에게 자신의 믿음과 같기를 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진정 자신이 믿는 성경말씀이야말로 진리이며 다른 종파의 교리들은 엉터리라고 주장하시고자 한다면 그분은 이곳을 방문할 자격이 없으며 자유롭게 떠나시기를 간곡하게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벌써 종교는 통일이 되었을 것이며 단하나의 종교만이 남았을 겁니다.
굳이 타종교와의 통합을 말하지 않더라도 크리스천들끼리 화합을 하고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나 홀로 목사는 지금 당장 목숨을 걸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단한가지의 방법으로 통일될 수 있는데 지금 나 홀로 목사가 그러한 길을 열고자 하는 겁니다.
자신 안에서 성령을 만나게 되는 순간 온 세상에 숱하게 갈라져있는 모든 종교가 통일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는 거지요.
외적으로 나누어져있는 모든 것들이 내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 확신하며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마15:1)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15: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15:3)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마15:4)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마15:5)
But ye say, Whosoever shall say to his father or his mother, It is a gift, by whatsoever thou mightest be profited by me;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6)
And honour not his father or his mother, he shall be free. Thus have ye made the commandment of God of none effect by your tradition.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왔다고 말한 것은 전통적으로 성경적이고 성지와 다름없는 고장임을 일부러 밝혀두고자 한 겁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기존의 유대교에서 전통되어오는 유전(遺傳)의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지적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거지요.
4절 말씀은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인용하신 내용인데 먼저 보고난 뒤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long upo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as the LORD thy God hath commanded thee;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and that it may go well with thee, i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이 내용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10계명 중의 하나인데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해야하는 이유가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고 한 것은 일종의 윤회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윤회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사람이 죽어서 또 다른 사람 몸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정신의 일부가 유전된다는 의미입니다.
피가 생명이니 자손대대로 유전이 된다는 말이지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인식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약의 다음구절들을 보면 이해가 가리라 여겨집니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7)
And he that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surely be put to death.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20:9)
For every one that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be surely put to death: he hath cursed his father or his mother; his blood shall be upon him.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모세의 율법들에 대해 어떠한 생각들을 하셨습니까?
나 홀로 목사는 오랫동안 구약의 말씀들을 부정적으로 보며 살았습니다.
인애(仁愛)를 주장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라하니 잘못된 것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겪어보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싶은 사람들도 허다하게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약의 율법들이 그 시대에 필요했던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오늘날에도 때에 따라서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사형집행을 반대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적어도 유전적 요소를 없앨 수 있는 화학적 거세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거세는 또 다른 폭력을 야기할 수 있기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만 화학적 거세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며 빠른 시일 내에 실행이 될 거라 믿습니다.
유전적요소를 뿌리부터 없애야만 점점 더 흉포해지는 세상을 진정시킬 수 있으며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거지요.
나 홀로 목사가 말하는 화학적거세란 성욕을 억제한다는 의미보다는 더 이상 자손을 낳지 못하는 차원의 것이라는 것을 사족처럼 달아두고자 합니다.
약리작용에 의한 성욕억제는 또 다른 측면으로 욕구불만이 표출되기에 부작용이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거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구약속의 율법을 오늘날까지 여과 없이 적용시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는 있으나 찬성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이란 시대마다 달리 적용되어져야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오늘날에는 현시대에 맞는 율법들이 적용되어야 마땅한 겁니다.
보다 긍정적으로 볼 때 예문으로 올린 레위기 20장9절 말씀가운데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더 이상 유전이 되지 않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부정적으로 보게 되면 비인간적일 수 있는 이 내용이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상당히 과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1~6절까지의 말씀은 어떤 내용으로 받아들여야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내용을 완전히 알고 계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데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유전되어오던 관습을 지킬 것을 주장하자 구약의 내용 중에 담겨있는 유전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신 겁니다.
이 같은 일을 보면 그 당시 사회를 연상(聯想)해 볼 수 있는데 부모를 공경하는 일조차 하나님을 위한다는 말 한마디면 공경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음을 알 수 있지요.
오늘날의 교회역시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만 위하면 모든 일이 다 된다고 여기고 있는데 예문의 내용을 보자면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뭔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부모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하셨는데 지금의 내용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여기서는 이 말을 저기서는 저 말을 하셨을까요?
이것은 그저 적당히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잠시 찾아본 후 이유를 밝히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
마태복음 17편에서 설명을 했듯이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위치에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자체만 보아서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받아들인다 해서 틀릴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란 하나님과 마찬가지이니 하나님만 위한다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길 수도 있는 거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성경해석이 틀리다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나 홀로 목사가 지금껏 누누이 주장해왔던 것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안에 성령이 들어있으며 인간의 육신이 성전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하는 겁니다.
우리인간들이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세상법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이런 까닭에 불교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법(佛法)은 세간법(世間法)을 떠나지 않는다”
나 홀로 목사는 오랜 시간 불교계통의 선법(禪法)을 공부했었습니다.
그곳에서 참 많은 일을 겪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약간의 영적인 깨달음을 얻고 나면 위아래가 없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불성(佛性)을 깨닫고 나면 나이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부모 같은 분들에게도 함부로 대하거나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움박질 하는 것을 숱하게 보았지요.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는데 오늘날에야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러한 점을 미리 아시고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주셨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할지라도 부모를 홀대하거나 세상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일러주셨으니 진정한 크리스천들이라면 명심해야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들이 알아야 할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사람처럼 한분이 따로 있어서 온 세상을 떡 주무르듯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태여 설명을 하자면 모든 생명체들이 그의 일부분이며 삼라만상이 그분께 속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해야 정확하겠지요.
예문에서 보았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이 인식하는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인격체가 따로 있어서 정말 숭배 받고자 하고 자신을 공경하길 바란다고 한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가 맞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아니라고 하시니 하나님이라는 객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지요.
하나님은 편재하시고 무소부재하신분이니 성령으로 만물 안에서 생동케 하는 분이시며 인격체가 될 경우는 예수님과 같이 자신 안에서 성령을 완전히 드러낼 경우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결국 우리자신이 성령을 드러냄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체가 되는 거지요.
아직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분들이 더러 있겠지만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거라 여기며 다시 한 번 더 성경 안으로 뛰어들겠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마15:7)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15:9)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마15:10)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아(외식하는자)하고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다고했는데 이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르치지 않고 인간의 두뇌에서 나오는 말로써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씀하신 내용인데 잠시 보고 난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맹인이 되고 맹인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사29:9)
Stay yourselves, and wonder; cry ye out, and cry: they are drunken, but not with wine; they stagger, but not with strong drink.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사29:10)
For the LORD hath poured out upon you the spirit of deep sleep, and hath closed your eyes: the prophets and your rulers, the seers hath he covered.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사29:11)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사29:12)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29:14)
Therefore, behold, I will proceed to do a marvellous work among this people, even a marvellous work and a wonder: for the wisdom of their wise men shall perish, and the understanding of their prudent men shall be hid
9절을 보시면 번역의 오류가 보이고 있습니다.
분명히 너희 자신 안에 머물라(Stay yourselves)했는데 이 말은 어디로 도망가 버리고 난데없이 맹인이 되라는 말을 삽입시켜놓았습니다.
아마도 10절에 눈을 감기셨다는 말 때문에 이렇게 번역해 놓은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진정한 뜻을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제넘게 나 홀로 목사가 해석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자신 안에 머물라 그리고 놀라워하고 외쳐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왜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옳으냐하는 것은 다음구절이 말해주는데 하나님께서 예지(叡智)와 선견(先見)의 능력을 가리셨다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바로 자신이라고 하는 육신의 범주아래 놓여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위해서 자신들안에 머물라고 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자신의 진짜모습이라고 알고 있는 한 영의 세계를 알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거지요.
이어지는 구절들 모두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말씀은 성령을 모르고 육신의 범주아래 놓인 자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있는 자들이 하는 말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수준이 영적이지 못함을 빗대어 하신말씀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니 다음구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마15:12)
Then came his disciples, and said unto him, Knowest thou that the Pharisees were offended, after they heard this saying?
성령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말을 하면 사람을 잘못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며 이러한 예수님 말씀에 바리새인들이 상처를 받지 않겠는가 하고 제자들이 묻자 이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 하셨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15:13)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마15:14)
하나님의 성령이 심어지지(드러나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며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자 역시 같은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마15: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15:16)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마15:17)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15:18)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15:19)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20)
앞서 말한 대로 육신을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은 두뇌차원에서 말을 할 것이니 하는 말마다 영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며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을 현혹하여 타락에 물들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마15:21)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마15:22)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마15: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마15:24)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마15:25)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15:26)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15:27)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8)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다는 것은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가셨다는 겁니다.
가나안지방의 여인이라 했으니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올리겠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예수님생존 당시에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었으니 이방여인이지요.
이러한 점을 보더라도 다 같은 가나안 지방이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같은 용어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문을 보면 예수님의 반응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구해달라는 가나안여인의 요청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 이스라엘사람들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이방인을 위하지는 않겠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말하길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떡을 취하여 개들(이방인)에게 던짐이 옳지 않다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크나큰 시험이라 할 수가 있지요.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샐쭉거리며 돌아설 일이지만 가나안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더욱 낮추며 개들(이방인)도 주인 상(하나님, 성령과 하나 된 예수)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크다 칭찬하시고 딸의 병을 낫게 해주었지요.
사실 이것은 딸의 병이 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축복이 내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겸손을 가르치는 말씀이기도합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출 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이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이 내용을 가볍게 여길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겸손은 어디로 도망가 버리고 자존심 상해하며 등을 돌리고 말지요.
나 홀로 목사가 몸을 담았던 수행단체에서 이와 같은 일을 너무나 많이 겪어보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결코 쉽지 않은 행동인데 이정도의 겸손이라면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정도입니다.
예문으로 올린 성경의 이 구절들은 바로 이러한 점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겁니다.
다음은 어떤 교훈이 우리를 기다릴지 성경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마15:29)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마15:30)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15:31)
앞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예수님께서 높은 인식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것을 산에 올랐다 했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의 힘을 빌려 환자들을 낫게 하셨지요.
이 내용 역시 앞서 예문으로 올린 21~28절까지의 내용이 이어지는 것으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마15: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마15:34)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마15:35)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마15:36)
And he took the seven loaves and the fishes, and gave thanks, and brake them, and gave to his disciples, and the disciples to the multitude.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마15:37)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마15:38)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마15:39)
지난시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것같이 이방인들의 고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사흘 동안을 이방의 마을에서 복음을 펼쳤지만 성과가 없었다는 말이며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에는 믿음이 없으니(광야) 말씀(떡)이 들어 먹히질 않는다고 했지요.
그때 예수님은 오병이어(五餠二魚) 때와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대중들에게 말씀을 전해주라고 했으며 그때서야 제대로 된(광주리에 차게) 제자 일곱 명을 거둘 수 있었고 예수님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 수천 명이 되었다는 겁니다.
아마도 이러한 나 홀로 목사의 말을 듣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반발을 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군중들을 모아놓고 사흘만 굶겨 보시라는 겁니다.
아마도 난리가 나도 보통난리가 아닐 거라는 거지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예수님과 같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들 모두가 예수님의 12사도들이 되어도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요?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정도가 있어야지 이성을 잃어버리고 맹종이 되어서는 곤란한 겁니다.
아마도 어떤 분들은 말을 하겠지요.
예수님과 함께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저절로 불러지며 잠을 자지 않아도 졸리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물론 특별한 몇몇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수많은 대중들을 한꺼번에 며칠을 굶긴다고 한다면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나 홀로 목사는 과거에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잠도 자지 않고 수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로 인하여 무엇을 얻었느냐는 것을 말하라면 굶는 사람의 심정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할 수 있으며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밥을 굶게 되면 배고픔을 느끼며 잠을 자지 않으면 피곤해지곤 합니다.
성령과 함께한다고 해서 먹지 않아도 되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라 영이라 봐야합니다.
예수님조차 먹고 잠을 잤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오늘날의 크리스천 중에 일부는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타인들은 물론 자신들조차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라했으니 지금의 예문은 나 홀로 목사의 주장이 옳은 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이야기하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앞 구절은 마태복음이고 다음구절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입니다.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셨으니 자신의 말씀을 실천하고 계신 겁니다.
신명기에서 말하는 만나(manna)의 영문 뜻은 신이주시는 음식, 마음의 양식인데 히브리어 뜻은 “이것이 무엇이냐?”입니다.
원래 만나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이 출애굽기 16장인데 여기에도 아주 깊은 뜻이 담겨있지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출애굽기를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도움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그것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한사람의 구도자가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려 놓은 것으로서 애급은 이방인(우상숭배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구도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각가지 고난과 역경들을 묘사해 놓은 것이지요.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구약의 출애굽기도 다루어 볼 테지만 지금은 시간관계상 약식으로만 인식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데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이러한 점을 모두 아시는관계로 비유로서 밝혀놓으셨으며 오늘날의 우리들이 좀 더 쉽게 성경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 각 복음서를 통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누군가는 아직까지도 나 홀로 목사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데 뭣 하러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겠냐고 반문하겠지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분들을 위해 한 가지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존해 있을 당시 인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석가모니가 머물고 있던 어떤 마을에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여 양민을 괴롭히는지라 마을사람들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쫓아 달라 요청을 했지요.
불쌍한 마을사람들을 위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나서서 산적들을 설득했지만 여전히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또다시 마을사람들이 부처님을 찾아와 재차 부탁을 하자 이번에는 석가모니께서 신통제일 목건련에게 지시를 하지요.
“목련존자여!
네가 가서 산적들을 설득하라”
지시에 따라 목건련이 산적들을 만나 설득을 했고 그제야 산적들이 마을을 약탈하길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목건련은 부처님께 이렇게 묻지요.
“부처님께서 가셔서 설득이 안 되던 산적들이 어떻게 제자인 제가 가서 설득을 할 수 있었는지요?”
그때 석가모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련존자여!
가래가 할 일과 호미가 할 일이 따로 있느니라.”
이곳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쉽게 말씀드리자면 유치원생들에게는 보모가 필요하고 대학생들에게는 교수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 확인했다시피 이방인들이란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니 그들에게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이 어떻게 통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비유의 말씀을 몰라 해석을 해주어야 이해를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주 없는 이방인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냐는 거지요.
그런 까닭에 신통을 보여 병자들을 낳게 하고 치유의 기적을 보여주어야 했던 겁니다.
사실 환자들을 낳게 한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환자들의 믿음에 달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예수님께서 무분별하게 마구잡이식으로 낫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병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인과로 인한 것인데 함부로 낫게 만드는 것이 인과의 법칙에 어긋난다 할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했는가를 보기위해 일부러 시험을 했던 것이고 그러한 시험을 통과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병자를 낫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알고 보면 병은 몸의 균형이 깨어져서 오는 것인데 병의 근본 원인은 인식에 달려있습니다.
참고삼아 말씀드리자면 우리 몸은 일곱 바디로 이루어져있다고 하지요.
인간들의 몸은 마치 일곱 줄의 현이 조화를 이루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이중에 어느 한 줄이라도 너무 팽팽하거나 느슨하게 되면 불협화음을 내게 되며 이것이 병의 원인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좋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몸 안의 여러 인식체인 일곱 바디가 균형을 잡게 만들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 홀로 목사가 성경을 들여다본 결과 예수님께서 낫게 해준 대부분의 병자들이 이러한 상태의 환자들이었고 기적을 일으켰던 환자들 대부분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이었지요.
이미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시기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아직 믿음이 영글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음속에 의심만 가득한 이들에게는 그 무엇도 주어 질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제 아쉽게도 작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 같군요.
마태복음 16장에서 다시 만나길 희망하며 오늘의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이가 하나님이라면
나조차 그가 만드신 것일 진데
어찌나만 하나님과 따로 일 수 있으랴.
하여 누군가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 말하건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비웃더라.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하나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불신하니
그 말과 행동이 일치점이 없구나.
하나님을 믿는 이의 하루는 하나님이 열고
하나님이 닫지만
믿지 않은 이의 하루는
제가 열고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