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아들아!(105)

배가번드 2022. 2. 3.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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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서기(동네동장)가 전화연락이 왔어.

공장을 빨리 사거나 이사를 가라는 건데 벌써 몇 달째 그와 우리사이의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는 거야.

내가 이 공장을 지금은 살 여력이 없다만 어떻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내심 올해 안으로 공장을 사버려야겠다 별렀는데 엉뚱하게도 안사고는 안 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거지.

그러면 잘된 것이 아니냐고?

그렇긴 한데 문제는 돈 생길 곳이 없다는 거야.

돈도 없으면서 뭐 하러 사고자 마음을 먹었느냐고?

글쎄!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생각이라도 해야 뭔가 일이 만들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때문이랄까?

어찌되었건 모든 것이 준비되어야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어떠한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항시 길은 있는데 그 길이 내 눈에 보이지 않고 있는 것뿐일 거라 생각하거든.

그래서 마음을 먹었던 건데 어찌되었건 사지 않고서는 안 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어 가고 있는 거지.

더 이상 투자자들이 돈을 줄 것도 아니고 다들 포기를 하였지만 나만 이곳에 발목이 잡히다시피 하고 있는 거야.

아들아!

이러한 나의 무모함을 조금은 위로해주는 얘기가 있는데 들려줄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불만을 터트렸다는구나.

 

"하나님!

당신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도 않습니까?

도대체 당신은 있기나 한가요?

내가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밤낮없이 기도를 했는데 불구하고 왜 당신은 내 기도에 응답을 하지 않는가요?"

 

이러한 기도와 불평을 날이면 날마다 하자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대답을 해주셨어.

 

"!

이놈아!

시끄러워 못살겠네.

네가 그토록 복권에 당첨이 되고 싶으면 복권을 사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말이야.

복권 한 장 사지도 않는 놈이 나만 원망을 해!"

 

이 말은 어디까지나 지어낸 말에 불과하겠지만 나로서는 복권을 사는 심정으로 마음을 먹었다고 하면 적당한 핑계가 될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마음을 먹었던 것에 대한 응답이듯이 공장을 사지 않으면 안 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내가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모든 일들을 차곡차곡 진행 시켜 나가고 있는데 솔직히 마음은 늘 쫓기듯이 불안해.

그러나 우리들은 살아가야만 하고 사는 동안 무엇인가를 해야 하거든.

사람들은 말을 하지.

도를 닦는 사람들은 보다 초연해야하고 고통스러워해서도 안 되며 화를 내서도 안 된다고 말이야.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해.

만약 우리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대로 되어야 깨달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또한 하나의 조건이 생김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깨달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겠어?

마치 천국은 이런 곳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야.

내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천국을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속박되어지는 하나의 틀 때문이거든.

아무리 좋은 조건을 내걸고 장식을 해놓았다고 하더라도 규정된 하나의 틀 속에 머물게 된다는 것은 감옥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많은 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이나 극락이 나에게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거나 가고 싶은 곳이 못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거지.

비록 내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 괴롭고 험난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 것 일 때 나에게는 자유선택이 주어지게 돼.

이러할 때 내가 지옥의 불길조차 즐긴다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러나 피할 수도 없이 가서 다른 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즐거운 척을 해야 하는 거라면 그것은 지옥일수밖에 없는 거야.

그렇지 않니?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천국인것이 분명하지 않느냐고?

그래!

맞아!

천국이고말고.

단 한사람만이 천국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그 또한 천국임에 틀림이 없어.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천국이라 하더라도 내가 선택하는 천국은 아니야.

그렇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러한 천국을 갈 수 없다고 한다면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거지.

다시 한 번 바꾸어서 말하자면 그들이 주장하는 데로 해서 갈 수 있는 천국을 갈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야.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말하는 천국을 갈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권이 나에게 주어져 있다고 해야 보다 정확해.

내가 자유로움을 말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도 스스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겨져.

언젠가 수행자 한분과의 대화는 나를 아주 몹쓸 놈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그이유가 내가 자주 화를 낸다는 것 때문이었어.

그 말에 내가 변변하게 대꾸를 하지 못하였지만 오늘에야 내 마음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아.

그 당시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기도 했고 그분의 수행관이 너무나도 고정되어 있었기에 자칫하면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피했던 거지.

언젠가 교수님 한분도 내 육신 스승님께서 카메라를 부수는 바람에 우리단체를 떠났다는 말을 한 적이 있거든.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행관이 너무나 고정되어 있다 보니 모든 주위의 상황들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고 들기 때문이야.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래야만 하고 깨달은 스승조차 자신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 하는 거지.

아들아!

내가 이러한 말을 하더라도 너는 결코 그들의 주장을 내가 반대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해.

내가 이들의 주장이 틀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말하는 거야.

언제나 마찬가지이지만 내 생각이 반드시 유일한 정답이라고 여기지는 않아.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하고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만약 결과가 내생각과 반대된다면 그 같은 결과가 바로 신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는 거지.

알아들었니?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하긴 그렇기도 하겠구나.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거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을 시작했는데 결과가 전혀 반대로 나오게 된 것조차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의 뜻이란 애초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우리들이 모든 순간이 신의 뜻이 아닌 것이 없다는 개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이원성의 벽을 넘어서야만해.

지나간 시간에도 말을 했지만 내가 좋은 뜻으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그 또한 신의 뜻이란 거지.

어떠니?

이해가 가니?

나 역시 신의 의지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할 때 보다 많은 그릇들이 선택한 경우가 내 앞에 도달한 것을 어찌 신의 뜻이 아니라 할 수 있겠냐는 말이거든.

이러한 결말을 내가 얻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최선을 다해 노력을 기울이고 결과에 순종할 수 있는 거야.

이제 조금 이해가 되지?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진리로 여겨도 무방하지 않느냐고?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소수의 사람들의 주장이 틀리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무조건 다수의 결과에 따라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거든.

만약 우리가 그러한 결말에 도달하여서 모든 것이 다수의 사람들의 주장대로만 움직여 간다면 사회의 빠른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을 거야.

너도 생각을 해보렴.

과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노력을 과연 몇 명이서 해 나왔는지 말이야.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주장한 결과 오늘의 과학이 발달을 하였고 종교가 변천하였어.

하지만 아들아!

여기에는 우리들이 알아야할 중요한 점이 있어.

소수의 주장이 중요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다수의 주장을 엎지는 못한다는 거야.

많은 이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점인데 소수의 주장이 관철되는 것은 다수가 소수의 주장을 수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지.

소수의 주장을 다수가 지지를 해줌으로 인해서 소수의 주장이 관철되는 것이지 절대 소수의 주장만으로 일이 성사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해.

소수의 주장이 아름답게 빛이 나는 것은 그때당시에는 효과가 없을지라도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바꾸어서 다수의 사람들이 동조를 해주어서 일이 성사되었기 때문인데 결국 소수의 고귀한 희생이 밑거름이 된 거야.

나 역시 이러한 점을 알기 때문에 결과가 좋지 못한 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다시 한 번 내가 옳다고 여겨지면 또다시 도전을 하는 거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한두 번 노력해보고 안되면 포기를 하거든.

구태여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여긴 탓이야.

정말 내가 옳다고 여긴다면 아마도 목숨을 걸지도 몰라.

이제 내가 하는 행동을 조금은 이해했으리라 생각해.

그렇지?

이러한 생각으로 내 앞에 놓인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의 해석을 낳는 거지.

내가 어차피 공장을 살려고 마음을 먹었던 만큼 이 같은 상황은 그야말로 축복이라 여겨야 마땅한 일이겠지만 알 수 없는 미래가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뿐인 거야.

이 같은 일의 결말이 어떻게 나던지 나는 그 속에서조차 신의 축복을 네게 말할 것을 약속하며 오늘 또다시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하도록 하자꾸나.

그러니까 네고모와의 성경강연회를 끝마치고 중국을 가기위해 서울로 향하던 중에 대전센터를 잠시 들리게 되었을 때였어.

중간지점이기도 하였고 동수 몇 분을 만날 일도 있었기 때문에 방문을 하였었는데 도착하여보니 사저한분이 센터주방에서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지.

일견하기에도 부유해 보이는 50대 중반은 넘긴 것 같은 사저님이셨는데 명상을 마친 후 식사 준비 중인 것 같더구나.

처음 뵙는 분이라 말을 걸기도 어색했지만 잠시 후 합류한 스님 한분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합류를 하게 되었던 거야.

그런데 가만히 듣다보니 그 전날 저녁부터 스님과 밤새워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한 해답을 스님께 하소연을 하며 대답을 얻었으면 했는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모양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지.

 

도대체 어떠한 일이었는데 밤을 새워서도 해결을 보지 못했는지요?

스님이라면 도를 몇 십 년은 닦았을 텐데 어떻게 해서 그분의 고민을 해결해주지 못했습니까?

 

우선 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너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구나.

어째서 너는 스님이라면 모든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이분의 일을 말하기에 앞서 수십 년을 수행하면 사람들의 모든 고민을 해소 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너의 생각부터 고쳐주어야 할 것 같구나.

모름지기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업장이 모두 다 달라서 어떠한 스승 한사람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해 줄 수는 없는 거야.

만약 그러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세상에 단한사람의 스승만 보낼 테지만 알다시피 이 세상에는 스승들이 넘쳐나거든.

 

만약 그렇다면 왜 당신 육신의 스승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 믿고 있는 건지요?

왜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라 말하며 예수님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

또 다른 종교역시 그 같은 주장들을 하나같이 하지 않는가 말입니다.

 

오호!

이것 봐라.

너도 이제는 심도 있는 질문을 다하는구나.

아주 좋은 질문을 했으니 좋은 답을 주어야겠지?

아들아!

지난시간에도 잠시 말을 했지만 우리들이 대상으로 삼는 신들과 나 사이에는 둘만이 존재한다고 하지 않았니?

그러할 때 우리들은 거기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만 되는 거야.

나에게는 믿음의 대상이 육신 스승님이 될 것이고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될 거라는 거지.

그렇지 않니?

바로 이러한 까닭에 각자가 믿는 신이나 스승은 최고가 되어야만 하는 거야.

이것은 다른 어느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최고가 되는 길이거든.

이와 같은 생각은 그야말로 중요할 수 있어.

너도 기억날 거야.

언젠가 내가 상대방은 나의 거울이라 한 적이 있지?

그것처럼 내가 신으로 모시고 있는 대상들이나 스승이 사실은 나자신안에 내재한 신이나 스승을 일깨우기 위한 도구라 할 수 있거든.

그러한 연유로 내가 최고로 모시는 스승을 위한 찬미가는 사실 내재한 내면의 스승께 드리는 찬미가가 되는 거지.

이러한 인식을 가진 자들은 어떠한 사람이나 사물 속에서도 최고의 신만을 보게 되는 거야.

그래서 이세상의 수많은  깨달은 이들이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겠니.

흔들리는 나뭇잎 속에서도 신을 보고 흘러가는 시냇물에서도 신을 보며 공중을 나는 새, 들판의 갈대, 허공속의 구름과 흩어지는 바람에서조차 신을 본다고 노래하는 거지.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신이 최고의 신이 되도록 하는 것은 좋은데 이 같은 인식이 내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외면을 향하게 되면 비교를 하게 되거든.

결국 이러한  분리의식에서 나오는 비교는 대상을 적대시 하게 되며 서로의 주장을 강하게 함으로 인해 급기야 전쟁까지 일으키게 되는 거야.

이러한 무지한 행동 모두는 우리들이 하나라는 의식을 갖지 못한데서 오는 분리의 개념의 산물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면에 집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겠어?

나 자신이 속해져 있는 종교의 신이나 스승을 항상 의심하고 최고로 여기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인거지.

 

아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마세요.

어떻게 하는 짓이라고는 최고인 것 같지 못한 행동만 일삼고 존경심이라고는 안 보이는 단체나 스승을 어떻게 최고라 여길 수 있다 말입니까?

 

아들아!

이러한 많은 물음들은 사실 아무런 필요가 없는 거야.

내가 말을 한 것은 우리들이 최고라고 여겨서 선택한 종교나 스승의 경우를 말했음이고 만약 중간에 그러한 신뢰가 금이 갔다면 얼마든지 다른 길을 가면 되지 않겠니?

 그 자리에 서서 얼쩡거리며 스승이나 단체를 괴롭히고 자신도 괴롭히는 짓을 하는 거냐 이 말이거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얼마든지 많은 기회를 주시지 않았니?

주위를 둘러보렴.

마치 종교 전시장이나 다름이 없는 세상에다가 스승들도 입맛에 맞게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니?

얼마든지 골라잡으면 돼.

사과 맛이 싫증나면 바나나 맛, 그도 싫증이 나면, 복숭아, 오렌지, 또 그조차도 싫증이 나면 요즘 한참 뜨고 있는 석류음료도 있어.

괜히 자신이 먹고 있는 과일이 맛이 있느니 없느니 하며 불평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는 거야.

이러한 점을 깨달아야만 모든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완벽함을 알 수가 있고 내 선택이 최고인 것과 동시에 다른 이들의 선택 또한 최고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게 되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지.

아들아!

어째 스님과 대화하던 보살님은 어디로 가버리고 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여기쯤에서 신을 퇴출시키고 다시 한 번 대전센터의 스님과 사저님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해.

스님의 밤을 새운 상담에도 만족을 못한 그분의 질문은 이러했어.

원래 사저는 입문을 하기 전 불교신자로서 모 사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하시던 분이셨다는 거야.

하는 일마다 워낙 잘되고 자신이 맡은 일이 너무나도 잘 풀리는 바람에 절에서는 관음보살로 통했다더구나.

그러한 분이 입문과 동시에 모든 일들이 꼬여들고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었다지 않겠니?

게다가 가족들과의 관계 역시 틀어질 대로 틀어져서 개선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하였어.

그러면서 덧붙이길 스승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계시는데 왜 제자들은 하나같이 되는 일이 없는가 묻기도 하였지.

그분의 하소연을 듣다보니 나 자신의 신세나 별반 다를 바 없기에 절로 한숨이 나오고 있었거든.

한참을 듣다가 조용하게 말씀을 드렸어.

 

사저님!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서 명상을 하십니까?

스스로 부처가 되기 위해서 명상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한 목표를 가지신분이 어떻게 자신에게 오는 어려움을 마다하시려고 하는지요?

처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나 쉬운 것 같으면 수행을 할 필요가 뭐있겠는지요?

목표를 크게 잡았으니 어려움도 당연히 클 밖에요.

스승님께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스승님의 문제일 뿐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지 육신의 스승을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직까지 과정에 있는 사람이며 스승은 목적을 이룬 분인데 어찌 같을 수가 있겠으며 스승께서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모든 것들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는 일을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해요.

게다가 우리들은 스승의 겉모습만 보고 있을 뿐 진정으로 스승님이 받아야하는 고통을 모르지 않습니까?

 

이러한 나의 말에 그분역시 상당히 수긍을 하는 것 같았고 조금은 마음이 풀어진다고 하더구나.

사실 내가 그분에게 말을 했다기보다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을 내면의 신이 그분에게 하는 형식을 빌려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네가 알려나 모르겠어.

앞서 너와의 수많은 대화 역시 사실은 너에게보다 나 자신에게, 혹은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였던 모든 순간들도 사실은 내가 들어야할 말이었거든.

그날도 그분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더욱더 고마운 일이었지.

그분이 아니었다면 내마음속 깊숙이 자리한 모든 불평들이 쌓여만 갔을 거야.

이렇게 속을 털어내고 서울에 도착하여보니 L사형의 모습이 보이더구나.교통사고가 난 다리의 후유증으로 절룩거리고 있었어.

볼 때마다 다리를 절고 다녔기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는데 그날따라 사형의 다리가 신경이 쓰이는 거야.

느낌이 이상해서 슬쩍 바지를 걷어 올리며 살펴보니 잔뜩 부어있는 것이 아무래도 안에서 곪는 것 같았어.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부러진 다리를 볼트로 조여 놓았는데 뼈가 붙고 나서 제거해야 하는 볼트를 제때 수술을 하지 못해서라고 하지 않겠니.

수술비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마치 내 다리가 아픈 것 마냥 가슴이 아파오는 거야.

다리가 저지경이 되도록 수술을 못했다는 것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서울동수들을 만날 때마다 도와줄 것을 호소를 했더니 때아니게 모금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사형이 수술을 받게 되었던 거지.

아들아!

내가 왜 이러한 말을 이토록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너는 알겠니?

내가 한 좋은 일을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실망스럽구나.

그러면 무엇 때문에 지난 간일을 새삼 되새기려 하느냐고?

그것은 말이야.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거든.

처음 내가 이일을 모 동수에게 말씀을 드렸을 때 그분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겠니?

금방 그들은 자신들이 수술비를 댈 것처럼 나섰고 또 다른 동수들과 협조를 하여 정말 수술을 해주었어.

그런데 이일이 있고나서 내게 돌아온 화살은 내가 너무 남의 일에 간섭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거야.

그리고 수술을 받은 사형의 평상시 행동까지 문제를 삼게 된 것이었지.

그분의 가족관계와 재산정도, 그분의 평상시 행동까지 문제를 삼으며 말이 많았었는데 참으로 사람들의 수준이 여실하게도 드러나더구나.

사람이 당장 아프면 도와주어야 마땅한 일이지 그분의 부동산여부까지 파내어서 어쩌자는 건지 몰라.

차라리 그런 마음이라면 돕지 않는 것이 맞지 않겠니?

내가 아무리 도와주길 권하더라도 돕지 않으면 그만일 것을 도와주고서 웬 뒷말들인가 이 말이거든.

나중에는 나까지도 원망을 하는데 정말 할 말이 없었어.

나보고는 왜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를 하는가 하는 건데 한마디로 웃기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지.

그분들의 말대로라면 돈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도 불쌍하다고 생각하거나 말조차 못해야 한다는 소린데 그것이 과연 수행자들로서 할 말일까 싶더구나.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도움을 필요하면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것이 맞는 것이지 언제 그 사람이 돈이 있는지 없는지 살필 것이며 부동산 유무를 조사할 것이고 돈 많은 친척이 미국에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볼 건가 말이야.

아들아!

이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이며 진정 깨닫지 못해서라고 생각해.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절대 그들이 도와주어야만 한다거나 돕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거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도와주었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이고 절대 후회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리고 언제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고 했는가 말이지.그저 불쌍하니까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만 했을 뿐이었어.

그러한 내말에 결정은 자신들이 해놓고 결과가 좋지 못한 것을 두고 후회를 하며 나까지 원망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거야.어떤 이들은 내게 이런 말도 하더구나.

 

"당신이 돕고 싶으면 당신이 벌어서 당신 돈으로 도우시오"

 

차라리 이런 말이 더 확실하고 좋았어.

되지도 않는 자비심을 내세웠다가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부자였다는 생각에 괜히 도왔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돕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 아닌가 말이지.

이래서야 어찌 인과를 벗어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야.

만약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얼마든지 그분의 생각이 맞는다고 볼 수 있겠지만 세상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운 해탈을 목적으로 한다고 본다면 이와 같은 생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

진정 이들이 해탈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수행자라면 어떠한 불이익의 순간이나 어처구니없는 순간조차 신의 완벽한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순간이 온 것을 감사하게 될거라는 것을 말하며 오늘의 우리 대화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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