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요한복음27.

배가번드 2022. 5. 2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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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시간을 기다려주시는 여러분 반갑습니다.

마지막 포스팅을 한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는 만큼 인사말은 줄이고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요.

오늘은 상고해야할 내용이 많은지라 성경 속으로 속히 들어가야 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요19:1)

Then Pilate therefore took Jesus, and scourged him.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요19:2)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요19:3)

 

1절에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을 했다(scourged him) 했지만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2절과 3절을 보면 채찍질을 한 게 아니라 여러 가지로 괴롭혔지요.

아마도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했다는 것을 강조하기위해 이렇게 번역한 것 같긴 합니다만 요한복음에 기록된 내용으로는 그다지 심한 대우는 받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아무리 사람의 마음이 조석으로 바뀐다지만 18장에서 예수님을 놓아주려 애를 쓰던 사람이 갑자기 채찍질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러면 다른 복음서에는 이 상황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마27:26)

Then released he Barabbas unto them: and when he had scourged Jesus, he delivered him to be crucified.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마27:27)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마27:28)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마27:29)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마27:30)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27:31)

 

마태복음 역시 scourge를 채찍질한 것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복음은 마태복음을 보고 번역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장면에서 곧바로 십자가에 못 박으려 끌고 나가지요.(31절)

하지만 요한복음은 다르게 기록합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요19:4)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요19:5)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요19:6)

 

다른 복음서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려 끌고나갔는데 유독 요한복음만 빌라도가 다시 예수를 데리고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하려 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지요.

4절을 보다시피 빌라도가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내용을 삽입한 겁니다.

그리고 5절에 면류관과 자색 옷을 입힌 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같은 빌라도의 처사에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은 극명하게 반대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 외칩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반응에 빌라도는 또다시 죄가 없다 말하며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직접 십자가에 못 박으라 말하는데 자신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같은 빌라도의 말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죽을 죄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19:7)

 

그런데 7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유대인의 법에 하나님 아들이라 말하면 죽여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어디에도 하나님 자녀라고 말하면 죽여야 한다는 내용은 없지요.

그러면 도대체 요한복음의 저자는 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야만 합니다.

잠시 퀘스천마크를 쳐두고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요19:8)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요19:9)

 

8절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다는 사실에 두려워하며 예수께 어디로부터 왔느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다음과 같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요19:1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요19:11)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 했으니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인데 대답을 않는지라 자신에게 예수님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권한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10절)

이러한 빌라도의 오만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러한 권한을 주신 거라 말해줍니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죽이고 살리는 권한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자신을 넘긴 이가 더욱 죄가 크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11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기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줌으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간접적으로 가르쳐주는 거지요.

하나님이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권한을 빌라도에게 주었는데 예수님을 죽이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죄를 짓고 지옥을 갈수도 있고 선을 베풀어 천국도 갈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다는데 빌라도로서는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2)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요19:13)

 

12절을 보면 빌라도가 필요이상으로 겁을 먹고 있습니다.

로마총독으로서 사람하나 죽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겁을 먹는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봐야합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말에 태도를 바꾸게 되는데 박석이란 곳에서 재판 석에 앉았다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생각하여 생각을 돌이켰음을 말해줍니다.

앞서 겁을 먹었던 것은 영혼의 세계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이 소리치자 가이사의 충신인 자신의 위치가 생각났던 겁니다.

가바다의 뜻이 “무겁다, 힘세다, 존귀하다, 영화롭다”이며 빌라도의 뜻이 “창을 가짐”이라는 사실을 볼 때 본인의 본분인 로마총독의 위치로 돌아간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 뭔가 특별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맞지요.

과연 그러한지 마태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보겠습니다.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마27:19)

When he was set down on the judgment seat, his wife sent unto him, saying, Have thou nothing to do with that just man: for I have suffered many things this day in a dream because of him.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옳은 사람(공정한, 정의로운)이라고 말했습니다.(just man)

예수님을 정의로운 사람이라 말할 정도면 빌라도의 아내는 보통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요.

이 내용은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살려주려고 노력했던 겁니다.

그러면 물질세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창을 가진) 빌라도는 예수님을 어떻게 심판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요19:14)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요19:15)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요19:16)

 

유월절은 장자의 재앙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경을 읽어본 분들은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장자(長子)가 죽는 재앙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피해간일을 알겁니다.

그렇지만 장자가 가지는 의미는 첫 사람 아담을 기리자는 거지요.

태초에 처음으로 창조된 아담은 완전한 존재였다는 뜻이며 피는 곧 생명이니 성령을 뜻합니다.

모세는 단순하게 어린 소나 양을 잡아먹는 방식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가르침을 올곧게(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성령이 심어질 수 있게 뜻을 담아 기록해 놓은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이들은 구원을 약속받는다는 의미로 유월절 행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액면대로 보자면 무교병을 먹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유월절이겠지만 담긴 뜻은 이렇습니다.

따라서 14절 말씀은 깊은 뜻이 있다고 봐야합니다.

완전해지기 위해 준비하는 날이라는 뜻에서 유월절을 예비한다 했고 육시는 부활의 숫자 6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부활을 통해 완전해지기 위한 준비의 날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너희 왕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사람들의(하나님의 백성) 왕이 예수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물질세상의 왕인 가이사만을 인정하고 영적으로 왕인 예수를 거부했다고 합니다.(15절)

그러자 빌라도는 더 이상 예수를 풀어줄 수 없음을 깨닫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어야만 했지요.(16절)

여기까지 읽어본 결과 위 내용은 하늘의 것보다 땅의 것을 사모하는 믿음이 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 했으니 좀 더 지켜보겠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요19:17)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요19:18)

 

위의 내용은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요한은 스쳐 지나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요.

잠시보고 난후 돌아오겠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23:39)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눅23:40)

But the other answering rebuked him, saying, Dost not thou fear God, seeing thou art in the same condemnation?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눅23:41)

And we indeed justly; for we receive the due reward of our deeds: but this man hath done nothing amiss.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눅23: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악인 중 한사람은 예수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메시아)라면 자신과 우리들도 구원해보라 했지요.(39절)

그러자 다른 한사람은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동일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말합니다.(Dost not thou fear God, seeing thou art in the same condemnation?)

똑같이 십자가형에 처해졌지만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입니다.(40절)

그래서 자신들은 악한행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라 했고 예수님은 잘못이 없다 한 겁니다.(41절)(this man hath done nothing amiss)

그러면서 예수께 간청하기를 당신의 왕국에 임할 때 나를 생각하시라 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된 분으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지요.(42절)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거라 말씀하신 겁니다.(43절)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말하기위해 누가가 일부러 삽입한 내용입니다.

사실 이 내용의 사실여부를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요한은 빌라도의 입을 통해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했던 과정을 말해왔지요.

이제 결말을 향해 나가는 중이니 다시 한 번 더 요한복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요19:19)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요19:20)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요19:21)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요19:22)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인정하고 십자가위에 패를 붙였다고 합니다.(19절)

이렇게 한 의도는 많은 유대인들이 볼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 말로 기록했던 겁니다.(20절)

이러한 빌라도의 의도를 눈치 챈 대제사장들이 항의를 했지만 빌라도는 묵살하고 자신의 뜻대로 써 붙였습니다.(21,22절)

빌라도가 비록 민란을 걱정하여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했던 거지요.

그렇지만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혔고 이제는 돌이킬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과연 십자가에 못이 박힌 예수님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궁금합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요19:23)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요19:24)

 

위의 내용은 시편을 인용한 겁니다.

잠시 보고난 후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시22:17)

I may tell all my bones: they look and stare upon me.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22:18)

자신의 뼈를 종류별로 말할 수 있을 정도면(I may tell all my bones) 사람들이 찢어 발겨서 뼈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는 말이지요.(17절)

 

그만큼 사람들에게 공격과 핍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8절에 겉옷은 물질적인 것들을 가리키며 속옷은 체면이나 위신을 뜻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불이익과 멸시와 조롱당한다는 것을 제비뽑는데 비유한 겁니다.

시편 22장 내용전체를 보면 구도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구약을 인용한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성경말씀대로 이루기 위해서라는 점을 알리기 위함이지요.

달리 표현하자면 성경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일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러한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19:26)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

 

이 내용 역시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요한입니다.

성령과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일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지요.

그러면 또 어떤 지혜로운 가르침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19:28)

 

이 내용은 시편69장을 인용한 겁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69:21)

They gave me also gall for my meat; and in my thirst they gave me vinegar to drink

 

시간관계상 69장 전체를 볼 수는 없지만 대략의 내용은 구도자가 시험받는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쓸개를 음식물로 주고 목마를 때 식초를 준다는 것은 괴로움과 쓴맛을 뜻하지요.

또한 이 내용은 육신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기도하기에 육을 악으로 규정짓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깊은 뜻이 담겨있지만 사람들은 제대로 된 뜻을 보지 못하고 액면만 보는 탓에 요한은 이렇게 기록해 놓은 거지요.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요19:29)

Now there was set a vessel full of vinegar: and they filled a spunge with vinegar, and put it upon hyssop, and put it to his mouth.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29절에 신포도주라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은 식초가 가득한 그릇(a vessel full of vinegar)이라 했습니다.

해융은 솜처럼 생긴 해초인데 거기에다 식초를 머금어 마시게 한 겁니다.

한글 성경에 이렇게 기록해놓은 것은 다른 복음서를 참고한 것 같은지라 잠시 보도록 하지요.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마27:34)

They gave him vinegar to drink mingled with gall: and when he had tasted thereof, he would not drink.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막15:23)

And they gave him to drink wine mingled with myrrh: but he received it not.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눅23:36)

 

마가복음만 포도주로 기록되어 있을 뿐 나머지 성경에는 식초로(vinegar)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도를 발효시키면 식초가 되는지라 틀리지는 않겠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할 대목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고 합니다.(wine mingled with myrrh)

몰약은 진통효과가 있으며 상처치료제로 쓰이기도 하는 한약재로서 과거에는 엄청나게 귀한 대접을 받던 물품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에 기록된 쓸개 탄 포도주도 몰약을 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게다가 더욱 이상한 장면은 누가복음에 군인들이 나와서 신포도주를 주었다는 겁니다.

말로는 희롱하면서 주었다지만 예수님에게 진통을 감할 수 있게 배려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과연 이것이 느낌에 그칠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요19:31)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요19:32)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요19:33)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요19:35)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요19:36)

 

안식일이 큰 날이라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31절)

그렇지만 군인들이 다른 사람의 다리는 꺾었는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32.33절)

다리를 꺾는 이유는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인데 예수님만 죽은 것을 확인하고 꺾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은 분명히 군인을 매수했다고 봐야하며 앞서 누가복음23장36절에서 군인이 신포도주를 준 것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준 것으로 봐야합니다.

그렇다면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나왔다는 내용을 숙고(熟考)해봐야겠습니다.(34절)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으로 창으로 찔렀는데 심장이 아니라 위를 찔렀다는 것을 요한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왜 심장이 아니라 위를 찔렀음을 구태여 말해놓았을까요.

그리고 왜 자꾸만 이것이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35절)

이 같은 의문에 대해 요한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내용이 기록된 구약을 보도록 하지요.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출12:46)

 

이미 수차례 나 홀로목사가 말해왔듯이 유월절은 이방의 마음에서 믿음의 마음으로 옮겨간 일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출애굽기의 이 내용을 인용한 것은 예수님이 유월절의 희생양의 표본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유월절행사가 어린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구약에 기록된 유월절의 진정한 뜻을 말해주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또 다른 구약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19:37)

 

이 내용은 구약의 스가랴서를 인용한 겁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스12:10)

And I will pour upon the house of David, and upon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the spirit of grace and of supplications: and they shall look upon me whom they have pierced, and they shall mourn for him, as one mourneth for his only son, and shall be in bitterness for him, as one that is in bitterness for his firstborn.

 

구약은 너무나 심오한 비유와 은유로서 기록되어있으며 스가랴의 내용도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깊이 있게 연구하며 상고해야하지만 시간관계상 간략하게 관련구절에 대한 설명만 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히브리어의 뜻입니다.

다윗은 “사랑받는 자”이고 예루살렘의 뜻은 “평화의 기초”이며 성전으로 쓰이는 단어이지요.

따라서 이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이와 성전의 기초를 닦는 이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준다는 것은 성령을 심어준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전의 기초를 닦는 이들이 가장 간구하고 은총으로 여기는 것은 성령이지요.

성령이 부어지게(심어지게, 깨어나게) 되면 자신들이 과거에 찔렀던(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신 성령이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they shall look upon me whom they have pierced)

그렇기 때문에 독자를 위하여 애통해하고 장자를 위해 통곡을 한다 했습니다.

독자의 의미는 유일하신 하나님(성령)을 뜻하고 장자는 완전한 첫 사람 아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이 부어지면 참회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이렇게 묘사한 겁니다.

바로 이런 점을 요한이 말하고자 한거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렇게 많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또 어떤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 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19:38)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9)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40)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요19:41)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요19:42)

 

예수님의 제자인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서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갔다고 합니다.(38절)

여기에서 특기할 점은 이일 후라고 한 것은 이틀 후가 아니라 앞에 일이 일어난 후를 가리킵니다.

다리를 부러트리지 않고 창으로 위를 찌른 후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왔다는 대목입니다.(39절)

몰약은 강력한 마취와 진통에 특효가 있는 약품이고 침향은 알로에를 가리키는 것으로 상처치료제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원폭피해자의 치료제로 쓰이는 알로에는 상처회복에 특효가 있지요.

예수님이 죽었다면 이렇게 많은 약제가 필요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이렇게 한일이 유대인의 장례법에 따른 것이라며 연막을 쳐놓았습니다.(40절)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일부러 이렇게 말해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치료제를 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새 무덤이 있다 하며 가까워서 예수를 거기에 두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요한은 이런 일을 말하기위해 이 내용을 기록해놓은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겁니다.

유월절에 일어날 일을 미리 예고하는 거지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아마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놀라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기대하시기 바라며 오늘의 시간은 여기서 마무리 할까 하는데 마치기전에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이 내용을 다른 복음서에는 어떻게 기록되어있는 보시라는 뜻에서 올려놓으려 합니다.

비교해보면 아마도 많은 점을 깨닫게 될 겁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27:57)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마27:58)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마27:59)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마27:60)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27:61)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막15:44)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막15:45)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15:46)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막15:47)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눅23:52)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눅23:53)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23:54)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눅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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