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시는 여러분께 하늘의 영광이 함께 함을 보며 요한복음의 마지막강해를 시작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경강해는 그렇게 간단한 작업이 아닙니다.
온갖 어려움이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시험은 계속되었지요.
코로나로 인한 여러 가지 상황도 하나의 어려움을 작용했으며 무엇보다도 심한 감기몸살로 인해 해를 넘길 뻔 했습니다.
그렇지만 머리카락 한 올까지 헤신바 되신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마지막장을 문을 열게 되었으니 하늘의 영광이 함께 함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음입니다.
나 홀로목사와 함께 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하늘의 영광을 찬양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21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요21:1)
After these things Jesus shewed himself again to the disciples at the sea of Tiberias; and on this wise shewed he himself.
디베랴의 뜻은 “좋은 관찰”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은 앞으로 나올 내용을 잘 관찰하라는 뜻이지요.
앞에서도 보았듯이 요한은 깊은 뜻을 담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1장의 내용에도 다른 뜻을 담아 기록했을 겁니다.
긴 이야기가 필요 없으므로 지금당장 확인해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요21:2)
There were together Simon Peter, and Thomas called Didymus, and Nathanael of Cana in Galilee, and the sons of Zebedee, and two other of his disciples.
시몬의 뜻은“응답하셨다. 들음” 이고 도마의 뜻은“쌍둥이”이며 나다나엘의 뜻은 “하나님이 주심”입니다.
이렇게 뜻을 대입하여 생각해보면 성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은 베드로와 예수님과 쌍둥이 같은 도마,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나다나엘 등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이라는 점을 알 수 있지요.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서 무엇을 할까 궁금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21:3)
Simon Peter saith unto them, I go a fishing. They say unto him, We also go with thee. They went forth, and entered into a ship immediately; and that night they caught nothing.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요21:4)
But when the morning was now come, Jesus stood on the shore: but the disciples knew not that it was Jesus.
여기에서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한 것은 성령이 함께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빛이신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3절)
그래서 4절에 아침이 다가오자 예수님이 해변에 서있었다 한거지요.
성령이신 예수와 함께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렇게 기록해놓았습니다.
그러면 빛이자 성령이신 예수님이 나타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확인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요21:5)
Then Jesus saith unto them, Children, have ye any meat? They answered him, No.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요21:6)
And he said unto them, Cast the net on the right side of the ship, and ye shall find. They cast therefore, and now they were not able to draw it for the multitude of fishes.
5절은 조금 깊이 생각해봐야합니다.
예수께서 물고기(fish)가 있느냐하지 않고 고기(meat)가 있느냐 한 것은 분명히 담긴 뜻이 있는 겁니다.
meat는 고기로 볼 것이 아니라 골자나 알맹이가 있느냐를 물었다고 봐야하는 거지요.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을 건져 올리는 것을 물고기 잡는데 비유했다고 생각하면 구원을 받게 만든 이가 얼마나 되느냐를 물었다고 봐야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한사람도 건지지 못했다는 말씀에 성령이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을 들어올리기도 벅차게 건졌다는 말이 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같은 나 홀로목사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겁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요21:7)
Therefore that disciple whom Jesus loved saith unto Peter, It is the Lord. Now when Simon Peter heard that it was the Lord, he girt his fisher's coat unto him, (for he was naked,) and did cast himself into the sea.
베드로가 주님이라는 말에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것은 믿음을 말해줍니다.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을 벗었다고 표현했으며 성령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서자 자신의 본분을 생각하고 과감하게 세상에 뛰어들어 사람건지는 일에 나섰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어부의 코트를 둘렀다 한 겁니다.(he girt his fisher's coat unto him)
겉옷이라 번역한 것이 무언가 어색하다는 점이 다음내용에 나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요21:8)
And the other disciples came in a little ship; (for they were not far from land, but as it were two hundred cubits,) dragging the net with fishes.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요21:9)
As soon then as they were come to land, they saw a fire of coals there, and fish laid thereon, and bread.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요21:10)
Jesus saith unto them, Bring of the fish which ye have now caught.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요21:11)
Simon Peter went up, and drew the net to land full of great fishes, an hundred and fifty and three: and for all there were so many, yet was not the net broken.
8절을 보게 되면 다른 제자들은 작은 배로 잡은 고기를 육지로 옮겨오는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베드로가 뛰어든 바다는 육지로부터 90미터쯤(200큐빗) 떨어진 지점이 됩니다.
육지와 이정도 떨어지면 사람이 물에 옷을 벗고 들어가도 위험한데 베드로가 겉옷을 입고 들어간다는 것을 말이 안 되지요.
따라서 이 내용 역시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바다) 약속의 땅으로 옮겨온다는 의미로 해석해야합니다.
그래서 육지에 올랐을 때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있다 표현한 겁니다.(9절)
숯불은 성령의 불꽃을 비유했고 생선은 구원받은 사람, 떡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유한거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10절에 예수께서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말씀하신 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몇이냐를 묻는 것이며 예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가 세어본 사람숫자가 153명이었음을 11절은 기록하고 있는 거지요.
2천 년 전만 해도 그물이 오늘날처럼 발달한 것이 아니어서 이정도 숫자의 물고기를 잡으면 금방 터져 비린 다는 점을 요한이 앎으로 그물이 터지지 않았다고 구태여 기록해 놓은 것이며 이 말씀이 비유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물이 터지지 않았음을 일부러 기록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또다시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타당함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21:12)
Jesus saith unto them, Come and dine. And none of the disciples durst ask him, Who art thou? knowing that it was the Lord.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요21:13)
Jesus then cometh, and taketh bread, and giveth them, and fish likewise.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21:14)
This is now the third time that Jesus shewed himself to his disciples, after that he was risen from the dead.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조반을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셨다면 제자들이 누구냐고 물어볼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제자들이 성령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모든 이들을 통해 성령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온 세상을 통해 역사하심을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들의 입을 통해 말씀의 떡을 세상 사람들에게 먹이는 권능을 주시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 영생의 길을 걸어갈 제자들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13절)
이렇게 나타나신 것이 성령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위해 요한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기록한거지요.(14절)
달리표현하자면 구도의 첫걸음에는 육신예수만을 보게 되고 믿음의 깊이가 깊어져 지혜안(영안)이 어느 정도 열리면 육신예수님을 볼 수도 있고 성령의 예수도 볼 수 있으며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여 예수와 성령으로 연결이 되게 되면 삼라만상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에도 성령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가 많은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당부의 말씀을 하셨을지 보겠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So when they had dined, Jesus saith to Simon Peter,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He saith unto him, Yea, Lord; thou knowest that I love thee. He saith unto him, Feed my lambs.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21:16)
He saith to him again the second time,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He saith unto him, Yea, Lord; thou knowest that I love thee. He saith unto him, Feed my sheep.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7)
He saith unto him the third time,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Peter was grieved because he said unto him the third time, Lovest thou me? And he said unto him, Lord, thou knowest all things; thou knowest that I love thee. Jesus saith unto him, Feed my sheep.
15절에서 17절까지는 동일한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15절에는 혈육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묻고 있으며 16절은 베드로가 성령과 하나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성령이신 예수님이 베드로 안에서 되살아나있기에 주께서 아신다고 한거지요.
즉, 베드로는 성령이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17절에서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물었던 것은 앞서 본 것과는 좀 더 차원이 높은 질문으로 성령이 삼라만상을 운행하고 있음을 베드로가 아느냐를 확인한 겁니다.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를 물었던 거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주께서 이모든 것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대답에 성령이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Verily, verily, I say unto thee, When thou wast young, thou girdest thyself, and walkedst whither thou wouldest: but when thou shalt be old, thou shalt stretch forth thy hands, and another shall gird thee, and carry thee whither thou wouldest not.
18절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생이 보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젊어서는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다니며 스스로를 옭아맵니다.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누군가의 말을 믿고 따르기를 쉽게 하지요.
여기에 진리가 있다하면 그리로 몰려가고 저기에 진리가 있다하면 그곳에 쫒아가 매달리기를 즐겨합니다.
육신 안에 성령이 거하심을 알지 못하기에 이렇게 헤매는 겁니다.
그렇지만 어느 땐가 인연이 닿아 성령을 깨닫고 나면 행동이 달라집니다.
성령이 삼라만상을 움직이므로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잡지 않게 되지요.
물론 이것은 일반인들의 경우이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이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는 젊어서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스스로를 성령에 묶어놓고 여기저기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손을 내밀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묶도록 내버려둘 거라고 합니다.(thou shalt stretch forth thy hands, and another shall gird thee)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힌 것처럼 타인의 몸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에 몸을 맡긴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19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9)
This spake he, signifying by what death he should glorify God. And when he had spoken this, he saith unto him, Follow me.
베드로는 네로황제 치하에서 순교했는데 자신은 예수님처럼 똑바로 십자가에 달릴 자격도 없다하여 거꾸로 매달린 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기 싫어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위해 죽을 수 있음을 영광스럽게 여겼던 겁니다.
철저하게 성령이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에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요21:20)
Then Peter, turning about, seeth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following; which also leaned on his breast at supper, and said, Lord, which is he that betrayeth thee?
이 내용에 나오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는 유다입니다.
유다가 예수의 품에 안겨 주를 파는 자가 누군 인지 물었던 내용이 마태목음에 나옵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마26:25)
Then Judas, which betrayed him, answered and said, Master, is it I? He said unto him, Thou hast said.
위 내용을 보건데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되살아나신 예수께서 유다를 데리고 나타난 겁니다.
여기에 대해 베드로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요21:21)
Peter seeing him saith to Jesus, Lord, and what shall this man do?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22)
Jesus saith unto him, If I will that he tarry till I come, what is that to thee? follow thou me.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요21:23)
Then went this saying abroad among the brethren, that that disciple should not die: yet Jesus said not unto him, He shall not die; but, If I will that he tarry till I come, what is that to thee?
분명히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사실인데 예수님을 따라 나타났으니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런데 예수님말씀이 이 사람을 머물게 할지라도 상관 말라고 하셨습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21:24)
This is the disciple which testifieth of these things, and wrote these things: and we know that his testimony is true.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21:25)
And there are also many other things which Jesus did, the which, if they should be written every one, I suppose that even the world itself could not contain the books that should be written. Amen.
24절을 보건대 우리가 지금까지 본 내용이 유다에 의해 증거되고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 유다 등이 모두 이런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며 유다의 말을 진실이라 여겼다는 뜻이 됩니다.(we know that his testimony is true.)
그렇다면 유다가 자살한 사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다시 한 번 더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마27:3),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마27:4)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마27:6)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마27:7)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마27:8)
Wherefore that field was called, The field of blood, unto this day.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마27:9)
Then was fulfilled that which was spoken by Jeremy the prophet, saying, And they took the thirty pieces of silver, the price of him that was valued, whom they of the children of Israel did value;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마27:10)
And gave them for the potter's field, as the Lord appointed me.
액면대로 보자면 유다는 분명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목매어 자살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을 보건대 분명히 자살하지 않았지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살 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을 기록한 것이 될 터인데 성경의 특성상 그럴 수는 없으며 분명히 담긴 뜻이 있을 겁니다.
예문으로 올린 마태복음9절과 10절은 스가랴서를 인용한 것으로 유다가 자살한일에 대한 담긴 뜻을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보고난 후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슥11:12)
And I said unto them, If ye think good, give me my price; and if not, forbear. So they weighed for my price thirty pieces of silver.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11:13)
And the LORD said unto me, Cast it unto the potter: a goodly price that I was prised at of them. And I took the thirty pieces of silver, and cast them to the potter in the house of the LORD.
위 내용은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목자임을 나타내는 글입니다.
은 삼십은(30) 스가랴가 삼위일체(3) 하나님이 완전함을(0) 깨달았다는 뜻이지요.(12절)
그래서 13절에 나오는 토기장이는 하나님으로 봐야하는 겁니다.
사람의 몸을 성령을 담는 그릇으로 본다면 토기장이는 당연히 하나님이 맞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토기장이의 밭 값이란 예수님의 가격이 목자로서 합당하다는 뜻이 되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대제사장 및 장로들과 유다사이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모종의 거래가 성립되어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요한이 의도적으로 밝혀놓은 거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 8절에 피밭이라는 말의 뜻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흘린 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을 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는 겁니다.
밭은 생산을 의미하며 피는 생명, 삶 등의 뜻과 함께 성령을 뜻한다고 봐야합니다.
장자의 재앙을 넘어설 때 문설주에 피를 바른다는 것은 성령으로서 이마에 인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는 제사장들의 행태를 볼 때 예수님은 물론이고 제자들 몇몇은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십자가 사건은 조작된 연극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며 희대의 사기극으로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연극을 했다 하더라도 이 같은 연극으로 말미암아 수없이 많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다녀간 이후로 일어난 구원의 역사만 하더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아직도 구원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껏 나 홀로목사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전모를 밝히고자 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좀 더 폭넓고 깊이 있는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자 함이었던 겁니다.
예수님이 저 멀리 하늘에 있다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내면에 성령으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함이지요.
성경을 연구하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가받은 가짜 목자들도 많습니다.
스가랴서 11장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가짜 목자들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팔아먹는 장사꾼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구약속의 선지자들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으며 그들의 말로가 어떠할지 기록해놓았지요.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슥11:17)
Woe to the idol shepherd that leaveth the flock! the sword shall be upon his arm, and upon his right eye: his arm shall be clean dried up, and his right eye shall be utterly darkened.
못된 목자로 번역된 the idol shepherd 는 직역하면 우상양치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성령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드는 오늘날의 엉터리 목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의 팔에 칼이 놓인다는 것은 심판받는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으며 우편 눈이 어둡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여 빛이신 성령을 보지 못한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의 가르침에 노출된 불쌍한 영혼을 위해 나 홀로목사가 지금껏 노력해 왔던 것이며 이제 그 마지막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성경강해의 마지막은 아니며 4복음서의 마지막일 뿐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생활상에서 적용되는 것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지요.
부디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이 지난 10여년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셨길 바라며 성령이 역사하시는 삶속에서 하늘의 영광을 찬양하는 매일이 되길 바라며 요한복음을 마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아름다움을 보는 인생아!
어찌하여 소나기 내리듯 퍼붓는 하늘의 은총은 보지 못하느냐.
풍금소리에 흥겨워하고 비파소리에 신나하는 인생아!
어찌하여 네 귀를 울리고 마음을 흔드는 천국의 나팔소리는 듣지 못하느냐.
한푼 두푼 모은 통장을 흐뭇해하는 인생아!
어찌하여 하늘의 통장에 잔고 없음을 슬퍼하지 않느냐.
네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에 감사하는 인생아!
어찌하여 네 영혼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만드는 이에게 감사하지 아니하느냐.
하찮은 벌레에 지나지 않는 인생이여!
영이 떠난 육신은 세상에 머물지 못하고
육을 벗어난 영 또한 세상에 머물지 못하나니
이비밀이 실로 크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