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드러난다는 말은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뜻이며 성령은 곧 빛입니다.
빛은 생명의 불꽃이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떨기나무숲에서 보았다는 불꽃은 성령이지요.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 한 것은 성령(빛)을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자신의 진정한 주인은 성령이며 성령은 곧 빛이라는 사실을 말해놓은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모든 종교가 하나의 길로 통하는 것이며 예수의 말씀 또한 진리가 되는 거지요.
불교도들이 흔히 염하는 나무아미타불역시 무량한 빛에 자신을 귀의(歸依)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을 볼 때 빛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끔씩 주변을 보면 체험이 별거 아니라는 분들이 있는데 어찌 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런 말은 체험 못한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체험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에게 체험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물론 체험을 못했다고 해서 내면의 성령이 근본적으로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살아생전 성령을 만나지 못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체험은 구도자에게 찾아오는 시험을 이기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체험은 호랑이를 만났을 때 옆에 피할 수 있는 나무와 같다 말하는 겁니다.
누구나 평온한 가운데서는 신을 믿고 신께 감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곤경에 처해지면 믿음은 어디론가 사라지며 감사보다 원망이 앞서기 마련이지요.
이런 까닭으로 체험이 중요하다 말하는 것이며 믿음을 유지시켜주는 버팀목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곤경에 처해지면 신께 했던 맹세까지 허물어진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압니다.
이럴 경우 그야말로 십년공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고 맙니다.
이럴 때 신을 체험한 사람은 쉽게 이겨낼 수 있지요.
자신 안에 신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으니 시련은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신의 안배라 여기며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적체험이 없는 사람은 곤란지경에 처해지면 그 당장 자신을 비관하며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심할 경우에는 수행을 포기하게 됩니다.
따라서 체험이 별거 아니라는 말은 체험한 이가 스스로를 자만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봐야합니다.
체험 못했다고 위축될 필요도 없고 주눅이 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교만과 자만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석한 두뇌에 의존하면 영의세계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영에 대한 체험은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지만 체험을 못했다면 범사에 그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늘 감사하는 마음에 감사하는 일이 더해진다는 것은 알아도 실천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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