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오늘도 변함없는 하루가 지나고 있구나.
요즘 성경강연회를 다니느라 너와의 대화가 뜸했어.
일이 고된 탓도 있고 명상을 하는 친구들도 만나야하고 교회말씀도 열심히 들어야하는지라 너무나도 바쁜 매일을 보내고 있다 보니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거지.
안 그래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당신의 평상시 언행을 볼 때 결코 교회에서 말하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을 텐데 어떻게 다니시는지 무척 궁금했거든요.
내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어머니와 동생의 걱정을 들어주기 위해서이기도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상태가 어떠한가를 알아보고 싶어서이기도 한데 그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 하기 때문이기도 해.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과의 약속 때문인데 성경전체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기로 했거든.
중국에서 그와 같은 일을 마치려고 했기에 머물고자 노력을 했던 것인데 신은 이상하게도 나를 중국에서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만들었어.
그래서 신의 뜻은 더 이상 그와 같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받아들였고 호주 행을 결심했던 거지.
모든 일을 멈추고 호주의 시골 구석진 곳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을 했던 건데 신은 호주에서조차 살 수 없도록 내몰았으며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들었고 교회를 다니도록 만들더구나.
그리고 교회에서 뭔가를 발견하게 만들었으며 내가 할 일이 뭐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신거야.
도대체 그 할일이란 게 뭐지요?
그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인간들이 갖춰야하는 기본적인 삶의 형태며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닌가 말입니다.
그야 교회를 다니거나 믿음생활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이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형태는 아니야.
진정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란 일반적으로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은 아니거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 인간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는데 성경을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여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들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
그러기에 성경을 믿는 이들은 종파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거지.
물론 이 같은 일도 맞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이 유일하지는 않다는 말이야.
각자의 인식정도에서 바라보는 순종하는 삶이 형태를 달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틀려지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반드시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적인 게 아니라 각자의 인식정도에서 자신이 느낀 만큼 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아닐까해.
저기요.
잠시 만요.
한 가지 질문을 할까합니다.
말끝마다 신의 뜻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당신의 자유의지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요?
당신은 삶의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따른다고 했는데 당신이 말하는 신의 뜻이란 도대체 뭔가 말입니다.
신이 나타나서 말을 해주는 건가요?
아니면 당신생각을 신의 뜻이라고 여기는지요.
너는 아직도 내말을 이해를 못하고 있구나.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해주었지 않았느냐.
그러기에 하는 말이 아닙니까?
만약 당신의 말처럼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한다면 누군가 당신을 해치는 것도 신의 뜻이 되지 않겠냐는 겁니다.
벌써 몇 차례나 말을 했는데 불구하고 네가 이해를 못하고 있나본데 신의 뜻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유의지가 현실을 마주쳤을 때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느냐?
벌써 잊어버렸나 보구나.
하지만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성경에 나와 있는 말들이야말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모든 생활방침을 성경에서 찾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그러나 우리들이 알아야할 사실이 있어.
성경에 충실한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이겠지만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일들도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해.
언젠가 이야기 했듯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라는 말은 성경어디에도 없지만 잡아먹히는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 믿는 이들도 재앙을 피하지 못했음을 우리들은 알아.
그리고 우리들은 성경의 어디에도 전생이라는 단어가 없음도 알거든.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전생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수없이 많이 볼 수 있어.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게 되면 심판의 잣대를 남들에게 들이대지 않을 수 없음으로 인해 자신들이 심판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야.
언제가 교회 목사님은 방송에 나온 어린아이가 몇 개 국어를 줄줄 외는 것을 보면서 귀신들렸다고 단정적인 말씀을 하시더구나.
이것이 바로 성경말씀 외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식에서 나오는 소리거든.
만약 목사님 말씀대로라고 한다면 네 살 때 작곡을 했던 모차르트도 귀신이 들렸고 세상에 기적과 같은 일을 해내는 모든 이들이 귀신들린 사람이라는 말이 되지 않겠어?
이래서야 어떻게 사람들에게 성경을 믿으라고 큰소리치겠냐는 거야.
우리들은 흔히들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배웠으며 누군가의 말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면 꾸지람을 받아왔거든.
그러한 일들이 사실은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이 알아야 해.
그저 누군가의 말에 찬성을 하고 동조만 하게 되면 하나님이 부여하신 우리의 자유의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지 않겠어?
성경에 하나님께서 말씀하길 성경을 상고(詳考)하라고 했는데 그 말씀의 참된 뜻은 바로 우리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상세하게 살펴보고 따져 보라는 것이 아니겠냐는 거야.
상고라는 말의 의미를 누군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거라 말하는데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발상이라 생각해.
상고라는 사전적 의미조차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온 말이며 자신이 내리는 해석에 토를 달지 못하게 막으려는 얄팍한 수작에 불과하다 여겨져.
상고라는 사전적 의미는 상세히 참고하거나 검토하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성경말씀도 따져보고 살펴봐야하지 않겠냐는 거야.
이러한 내 생각을 성경이야기를 통해서 실행에 옮기고자 했던 것인데 그 같은 일 때문에 동생으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아야만 했어.
감히 하나님께 대적을 하려한다며 성경을 내 마음대로 받아들인다는 거지.
그렇다면 너도 마찬가지며 너희 교회 목사님 또한 제멋대로 성경을 받아들이고 있다 했더니 상당히 화가 나는 모양이었어.
나는 이럴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어서 씁쓸하다는 생각에 빠져들거든.
스승의 말씀을 목숨처럼 여기던 지나간 내 과거가 생각나기에 동생의 그러한 생각이 당연하다 여겨지기 때문이야.
하지만 동생과 다른 것이 하나 있는데 나는 언제나 지극히 긍정적인 동시에 지극히 부정적이거든.
극과 극이 맞닿아있기에 언제나 그 둘은 공통적인 결말을 창출해 내고 있어.
긍정과 부정은 한 몸이며 부정은 보다 큰 긍정을 창출해내는 밑거름이기에 심한 부정도 결국은 긍정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이 왜 중요한가하면 우리가 신의로의 회귀를 하기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산이기 때문이야.
왜? 라는 물음을 자신에게 던질 수 없는 자는 긍정적이라 말할 자격도 없으며 죽은 영혼이라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
왜?
그럴 수밖에 없지?
왜?
이렇게는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우리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는 거야.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정답이다 말할 때 저것이 정답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왜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하고 비판의 화살을 맞아야하지?
왜라는 강한 부정의 외마디 외침으로 구약의 시대를 종식시킨 예수님을 모시는 이들이 왜 아직도 왜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
가톨릭의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반항했던 마틴 루터의 왜는 오늘날의 개신교를 탄생시켰지 않았는가 말이야.
만약 변화를 원하는 내면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루터는 그저 계단을 무릎으로 기다가 죽었을 테지만 왜라고 과감하게 소리쳤어.
이제는 우리들이 외쳐야 하리라 생각해.
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될 수가 없지?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인간세상을 재미있게 내려다보고만 있는가 말이야.
이제 내려와서 인간들처럼 똑같이 가슴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살지 않는지 물어봐야하지 않겠냐는 거지.
나는 물어보았고 대답을 들었어?
이미 하나님도 예수님도 우리들과 함께 세상 속에서 뒹굴면서 살고 있다고…….
이것이 바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며 내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복음이야.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혹은 스승의 말씀이기에 조금도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는 하나님과 스승의 말씀은 이러한 것이라는 제한성속에 자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빠트리고 있음을 자각을 해야 하는데 불구하고 자신은 제대로 된 하나님말씀을 말하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게 왜 정당한 거지?
하나님의 말씀을 땅 끝까지 전파해야한다고 해서 이념의 전쟁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성경 안으로 끌어들여야한다는 해석을 하는 것이 정당하며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일이라는 지탄을 받아야만 하는가 말이야.
신약과 구약을 제멋대로 오가면서 여기다 갖다 붙이고 저기다 갖다 붙여서 자신들의 성경해석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를 즐겨하면서 심판하기를 중단하라는 하나님말씀은 적용범위를 넓히지 못하는가 말이지.
그 옛날 예수님이 구약의 구태를 넘어서서 외쳤던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 성경을 넘어서서 보다 확장된 사랑을 외치는 것이 왜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하고 지옥을 가야하는 대역죄를 범하는 것인가 생각해 봐야하지 않겠어?
이것은 비단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말이 아니야.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이 생각해봐야할 문제이며 스스로에게 던져야할 화두라 생각해.
이것을 보다 피부 깊숙이 느껴보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
언젠가 이스라엘에서는 아주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지역의 군사시설물들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하달 받은 이스라엘 조종사들이 명령을 거부한 거야.
자신들이 폭격해야 할 곳이 군사시설인줄 알았는데 막상 현장에 도착하여보니 민간인들이 사는 지역이었거든.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폭격을 할 수 없다고 거부를 하고 돌아와 버린 거지.
이 같은 일을 목사님들에게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지 않니?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했다고 박수를 칠거라 생각해.
하지만 말이야.
이 같은 일을 성경적인 해석을 하자면 하나님말씀을 위반하였다고 볼 수 있거든.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구약을 믿는 사람들인데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방인들이며 처 죽여야 할 대적이라 볼 수 있지 않겠어?
만약 지금 한국사회의 목사님들이 이스라엘 조종사들의 행동에 잘했다고 박수를 친다고 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해석을 위반하는 것이 되는 거야.
성경에 충실 한다고 해서 현실상황을 생각지도 않고 따른다고 한다면 결과가 어떠할지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나는 일이지 않겠냐는 거지.
하나님이 우리들안에 자유의지를 심어놓으신 것은 성경말씀을 상고하여 언제든지 그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하신 것이지 누군가의 해석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거든.
자신도 성경을 모두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목사님 말씀을 불변의 진리라고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자신들 내면에 들어앉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라는 생각을 왜 못하는가 말이야
자신의 말도 다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스승의 참된 말씀조차 상고해 보지도 않고 왜 스승의 녹음기가 되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거든.
아들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게 살더라도 너는 그렇게 살지 말기 바라.
왜냐하면 말이야.
하나님은 절대 그러한 것을 원치 않으시거든.
하나님이 우리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우리가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도록 원하시기 때문이야.
우리들이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인지를 알고 자신과 하나라는 사실에 다가설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심어 놓으신 거지.
이러한 내말도 얼마든지 부정될 수가 있으며 그러한 부정이 너에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좋아.
다만 그 같은 부정이 긍정을 창출하지 못하게 되면 너는 그저 나를 부정하는 사람에 그치게 될 거야.
그것은 그야말로 불행한 일이 되거든.
우리들의 자유의지는 우리를 성경에 묶어 놓을 수도 있으며 성경을 세상을 향해 활짝 열어 놓을 수도 있어.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할 거야.
“성경은 이미 열려져있고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
내말은 그게 아니거든.
성경에 대한 해석을 달리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장하라는 말이야.
하나님을 성경 안에만 가두지 말고 나만을 사랑하고 타인을 미워하는 신으로 만들지도 말며 내안에도 타인들 안에도 공히 머무는 신으로 만들라는 거지.
성경에서 말하는 대적이란 비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부정성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남들을 향한 심판의 잣대를 내려놓을 수가 있으며 우상이라는 말 역시도 타인들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타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을 멈출 수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의 구약을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기위해 마련된 예고편에 불과한 듯 말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
구약은 인간이 탄생되기까지의 과정과 인류의 성장과정을 기록해 놓은 동시에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해 놓은 거야.
그리고 신약은 예수님 생존당시에 함께 지내거나 혹은 그 시대의 제자들이 만들어놓은 기록들로서 자신의 깨달은 바를 말해놓은 것이지 오늘날의 일부 기독교인들의 말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 지옥을 갈수밖에 없다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해.
지금은 내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기에 성경의 해석을 보류를 하고 있지만 조만간 다시 한 번 더 시작을 할 거야.
진정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종교와 이념을 달리해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분명히 성경 안에는 기록되어있음을 밝히고 말겠어.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동생은 심하게 나를 나무라거든.
감히 내가 하나님께 대적하려 한다는 거야.
정말 웃기는 발상이 아닐 수 없어.
나는 이미 너와의 대화에서 밝혔듯이 우리들이 신이 아닐 수 없음을 말해왔는데 새삼스럽게 왜 내가 하나님께 대적을 할 필요가 있겠어?
내가 성경말씀을 해석하려는 진정한 목적은 우리들의 시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방법을 성경이 말해놓은 사실을 발견하려는데 있거든.
그저 목사님의 말씀대로 죽게 되면 저절로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뜬금없는 성경해석에서 벗어나려는 거야.
물론 이 같은 말도 사실이긴 하지만 목사님의 말처럼 인격체의 하나님을 말한다면 그야말로 거짓이 될 것이고 영이신 하나님을 말한다면 그야말로 사실이 될 거라 생각해.
목사님의 말처럼 인격체의 하나님이 될 경우는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복과 영생을 약속하지만 우상을 섬기는 이들은 모조리 지옥에다 처넣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어?
솔직히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들의 이러한 성경해석을 보면 그야말로 가슴이 아파서 뛰쳐나오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자신들의 성경해석이 남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동시에 자신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저기요.
그러한 말을 자신에게 해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해석이 옳고 당신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그야 당연하게 그렇지.
진실이란 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길 때만 진실일수가 있으니 내말에 동조를 하지 않으면 내말은 진실이지 못할 거야.
하지만 우리들이 알아야할 일이 있어.
지금 우리들은 내일기장에 들어와 있으며 내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있거든.
그런데 누군가는 내일기장에 들어와서 내 생각이 틀리다고 욕을 퍼붓고 있으며 내 생각은 귀신들린 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 여기고 있어.
내말이 틀리다 싶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고 내일기장에서 멀어지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불구하고 들여다보면서 비판을 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만약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면 목사님들은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더 점검을 해봐야해.
내가 진짜 귀신이 들렸다고 한다면 성경의 말씀으로 중무장된 목사님들이 득실거리는데다가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그렇게나 쉽게 들락거릴 수 있겠어?
이 같은 일이 가능하려면 몇 가지의 경우가 있는데 한 가지는 그들의 힘이 내안에 있는 귀신보다 약하거나 아니면 내안의 귀신이 너무나도 착한 귀신이어서 성령조차도 받아들이는 경우일거야.
이것도 아니라면 내가 귀신에 들린 이는 아니라는 말이 되는 거지.
가끔씩 목사님은 강연도중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귀신들린 자라는 말씀을 쉽게 하는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그들이 말한 구원을 반납하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꼭 나를 지목해서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야.
아들아!
내가 걱정이 되는 것은 내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지금과 같은 인식이 지구멸망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야.
가끔씩 목사님은 기독교의 목사님들과 가톨릭의 신부님, 불교의 스님들이 화합을 하고 아랍세력들과 이스라엘이 화합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설교하시는데 정말 위험한 발상이거든.
세상의 평화를 해치는 일일뿐 아니라 자신들을 해치는 일인데 그와 같은 일이 순전하게 하나님을 성경 속에 가두어두었기 때문이라 생각해.
똑같은 성경을 공부하는 성직자들이 타종교와 화합을 하는 것은 성경을 안보기 때문이라 말해버린다면 그야말로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현실을 망각하는 행위라 봐야하지 않겠어?
이세상이 너무나 악하므로 세상이 멸망을 해야만 한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이 세상에 뭐 하러 태어났을까?
그저 숫자만 채우려고 태어났을까?
아니면 그들의 말대로 많은 이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하나님이 그들을 태어나게 만들었을까?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은 심각한 모순에 직면해야만 해.
만약 온 곳이 있다고 한다면 갈 곳도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또다시 올수도 있다는 말이 되거든.
이러한 이유로 우리들은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지.
이것은 어디까지나 목사님의 말씀에 근거한 결론인데 그분은 분명하게 이세상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없음을 말했고 우리들은 육적인 존재 일뿐 아니라 영적인 존재라고 했거든.
육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이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들이 죽게 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확실하게 알 수가 있어.
진정한 우리들의 영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이며 살아있는 동안 우리를 움직이던 육체는 흙으로 빚어져 만들어졌던 땅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조상들이 말한 대로 죽게 되면 영은 온 곳으로 돌아가고 혼백은 흩어지며 육신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겠어?
그렇다면 우리들이 죽게 되면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목사님의 말씀은 사실이겠군요?
그것이 사실이 되려면 우리들은 몇 가지 생각을 해봐야해.
왜냐하면 말이지.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아야하지 않겠어?
그야 당연하지요.
그렇다면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거든.
성경 속에 머무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지 아니면 성경을 믿지 않는 이들조차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지 말이야.
성경에는 이러한 구절도 있는 것으로 알아.
“심판 받지 않으려거든 심판을 하지 말라.”
만약 목사님의 말씀처럼 죽어서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산다고 한다면 상급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거든.
주님과 하나가 되는데 어떻게 상급의 차별이 존재하겠으며 상급이라는 말이 왜 필요하겠어?
이래서 내가 아직도 등급이 있고 상급이 있다고 한다면 아직은 완전치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이며 성경의 해석을 달리해야한다고 말하는 거야.
아들아!
오늘도 시간이 많이 흘렀고 신과의 약속된 시간이 왔구나.
내일 또다시 맞이해야하는 삶의 현장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이 세상을 통해 무엇인가를 하기를 원하시고 계시니 자신이 처한 현실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오늘은 여기에서 작별을 하자꾸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