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속을 썩여도 인내하며 끝없이 사랑하기에 이런 말이 생겨났지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부모라고해서 자식을 무조건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속상할 때는 자식을 매로서 다스리는 것만 봐도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되라고 때리는 매는 사랑의 매라고 하지만 때로는 부모역시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자식을 때리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모의 매라고 해서 사랑의 매라고만 말하기는 어렵지요.
이러한 점을 볼 때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신과 같다는 말은 다시 한 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합니다.
우리가 행동을 잘못하면 부모에게 혼이 나야하듯이 신에게도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할 겁니다.
이래서 우리가 신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더라도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덕목(德目)이 있는 법이지요.
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으며 다만 믿음만 가지라고 합니다.
신의 속성이 사랑이고 빛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신을 향한 믿음을 가지는 이유는 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우리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도를 통해 얻어지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신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면 신을 불신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존재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움직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신이 없다면 우리가 마음먹은 것은 이루어져야합니다.
우리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안 된다는 말은 뭔가의 힘이 따로 작동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 힘을 믿는 이들은 신의 손길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되돌아가서 내가 어떤 일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적대관계에 있는 누군가 있을 경우 내가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마음먹은 대로 된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만 않았을 뿐 신은 여전히 존재하며 쉼 없이 세상만사를 움직이고 있는 거지요.
다만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신은 정확하게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합니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이거나 신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사고(思考)의 폭을 넓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구도자로서 신을 믿고 있는 사람이고 상대방은 불신자인데 불구하고 왜 신은 내편을 들지 않느냐는 쪽으로 상념의 방향을 틀어보자는 겁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면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아짐으로 축약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내 목표점은 영생이며 상대방의 목적지는 물질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은 나에게 물질보다는 하늘의 영광을 주시기로 결정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일을 틀어지게 만듦으로 인해 내가 지었던 과거 업장을 씻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지었던 죄업을 씻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요.
역설적이긴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사실이며 축복과 저주가 하나라는 점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중요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손해가 훗날에는 내 이익으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업을 위해 친구 집을 담보로 해서 대출을 했고 큰 성공을 했다고 칩시다.
성공을 거두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적당한 선에서 치사(致謝)하고 넘어가려 했다면 죽일 놈이라 욕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재판을 해서 이긴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 셈이지요.
물론 반드시 이렇게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의 목표점은 영생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무당을 내세워서라도 물질을 취하려 할지라도 나는 그런 일과는 무관해져야한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무당을 내세워서 뭔가를 쟁취하려고 할 때 나는 신의 뜻에 맡기는 여유를 보인다면 신은 더 큰 선물을 안겨줍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일 때가 있고 침묵하고 조용히 있어야할 때가 있는 겁니다.
물질을 두고 쟁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무엇이 떠나가고 무엇이 다가왔는지를 봐야한다는 겁니다.
본인이 그토록 믿어마지 않았던 신령한 존재를 넘어서는 그 무엇인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며 외부에서 보았던 신의 힘이 내안에 있음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기회가 왔음을 알아야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본인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준 원수 같은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순간이 오지 않았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진정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며 부모의 내리사랑과 신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거지요.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매를 때리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신의 손길이 담긴 것이었음을 알게 될 때 진정으로 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생각에 부모가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 것 같더라도 함부로 심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그 부모의 마음과 내 마음까지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부모의 실수가 결국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현재의 이 순간을 주어지게 만들었음을 인식할 수 있어야지요.
현재의 내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큰 공신은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이며 나와 함께한 가족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한 겁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두 번 다시없는 죄인일지라도 우리에게는 그를 심판할 자격이 없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심판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른 이의 경우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부모와 신의 사랑은 이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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