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목사

마가복음8.

배가번드 2019. 7. 20.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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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문전에서 여러분의 건강과 영적인 성장을 걱정하는 나 홀로목사 인사드립니다.

오늘은 여러분께 한 가지 물어볼까합니다.

여러분은 성경내용을 얼마나 믿습니까?

정말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왜 이렇게 묻느냐하면 저 같은 경우에는 나 홀로목사를 시작하기전만 하더라도 100% 믿지

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내면의 느낌에 따라(vision을 포함) 나 홀로목사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 길이 정말

제가 걸어가야만 하는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기에 성경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습니

.

그러나 가끔씩 저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은 그저 지나쳐버리기에는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오곤 합니다.

언젠가 꿈속에서 누군가를 자전거에 태우고 절벽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외길을 왜 걸어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국에는 문에 도달하였고

그를 내려놓는 것이 꿈의 전부였지요.

양옆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무서울 법도 하건만 그저 무심하게 걸어가고 있었으며

오히려 뒤 자석에 타고 앉아있던 사람이 무서워서 뒷자리를 심하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꿈이라고 해버리기는 너무나 생생해서 아직도 그 느낌이 선명합니다.

어떠한 이야기 전개도 없이 무작정 절벽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으니 무척 놀라웠지요.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했을 때 아무도 믿지 않았고 나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 점

더 의미부여를 하기 힘들었으며 그 일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뒷좌석에 탔던 사람조차도 믿지 않는데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들이 믿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힘든 일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에 더 이상 생각지 않으려 했으며 비전이란 사람의 생각과

집착이 만드는 것이라 여기기로 했지요.

이런 이야기가 성경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겠지만 나 홀로목사의 길을 걷겠다는 생각

과 동시에 이러한 체험을 한지라 무관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홀로 걸어가는 나 홀로목사에게 주어지는 영적동반자이자 천국의 문까지 대동(帶同)하고 가

야할 동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기에 실망을 하고 한동안은 성경을 한편에

밀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용솟음치고 올라오는 나 홀로목사로서의 길을 가야한다는 사명감은 성경으

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락지 않았지요.

결국 성경을 다시 펼쳐들었고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성경만 들여다보고 살수는 없는 일이며 우선적으로 민생고해

결부터 해야만 했기에 직업을 구했지요.

낮으로는 일하고 밤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는 강행군을 시작하게된 것이 20118월이었으니

벌써 6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6년이라는 세월은 무척 긴 시간이며 벌써 신약의 대부분을 마쳐야

했겠지만 퇴근 후 2~3시간밖에 들여다 볼 수 없는지라 이정도로밖에 속도를 낼 수 없습니

.

하지만 놀라운 것은 성경을 읽을수록 놀라운 일을 발견하는 것은 물론 세상사가 성경말씀대

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더군요.

예전에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여기던 구약의 내용들조차 속 깊은 뜻을 알고 보니 완벽하게

이세상의 일들을 묘사해놓았으며 창조의 역사까지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았습니

.

물론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경의 해석은 아닙니다.

어쩌면 나 홀로목사의 눈에만 보일 수 있는 내용을 보자면 지금의 지구를 만든 이는 분명

고도로 발달한 외계문명의 존재(하나님으로 불리는)들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영적인 사람들)안에 내재하는 영혼은 그들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의 본체인 우리의 영혼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외계인들과 하나입니다.

그들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그 누군가를 그들은 압니다.

우리가 알 수도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해도 믿지 않을뿐더러 괜히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 분명하기에 때가되면 말씀드

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굳건하게 서고난후에는 우주의비밀이 저절로 여러분 앞에 열리게 되지만

아직 믿음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면 무엇을 준들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믿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에 관한 마태복음의 내용을 읽어보며 시작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

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이 내용은 영의 세계를 말씀해 놓은 것이며 자신의 영을 깨닫게 되면 삼라만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말해놓은 겁니다.

영의 세계를 알면 이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고 영을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

는 내용입니다.

실로 비밀이 커다할 것인데 이미 나 홀로목사는 말해놓았지요.

눈이 밝은이들은 보았을 것이고 아직 영안을 뜨지 못한 분들은 못 보았을 겁니다.

아직 못 본 분들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도 비밀의 문은 수시로 열릴 테니까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비밀의 문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6:1)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

6:2)

 

이 내용은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마음상태로 믿어야하는가를 말해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2절을 보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으며 사람들이 예수

님의 지혜와 권능의 힘을 보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람들은 곧바로 의심하기 시작했는데 왜 그런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

.

 

사람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6:3)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가르침에 놀라워하던 이들이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라는 것을 소상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직업은 물론 가족관계까지 아는지라 더 이상 믿음이 생기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배척당했던 거지요.

여기에 대한 비유의 이야기를 지인을 통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은 한 스님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친지들은 물론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

들에게 법을 전해주려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먼 길을 걸어 마침내 고향마을 어귀에 도달했을 때 큰 고목나무아래 동네어르신들이 모여

있었지요.

스님께서는 마음속으로 법을 전하려고 왔는데 오히려 잘되었다싶어 다가가서 공손하게 인사

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대뜸 어르신들이 알아보고는 인사말을 건네더랍니다.

 

! 그래,

너 개똥이 아니냐

내가 너 업어주던 옆집 순덕이 엄마야.

너 기억나지?

너 오줌 싸고 우리 집에 키 덮어쓰고 온 일 말이야.

 

이사람 저사람 모두들 큰스님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하는 통에 법문을 펼치기는커녕

대충 대답만 간신히 하고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이래서야 어찌 법문이 먹혀들어 갈 것인가 싶었던 거지요.

이와 똑같은 일을 예수님께서 겪으신 겁니다.

예수님은 이일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6:4)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

6:5)

 

역시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느끼셨군요.

오히려 큰스님보다 더욱더 크게 실망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법을 펼치시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왕국으로 이끌기 위해서이며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천국복음을 전해주는 이는 메시아라 여겨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알기를 옆집 아이 정도로 아는데 어찌 믿음과 존경심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

?

이런 까닭으로 예수님은 아무 권능도 행하실수 없었던 겁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병을 고치기만 했지요.

그런데 말을 하고보니 이 내용은 우리가 아주 깊게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엄청 대단한 일인 것 같은데 5절을 보면 아주

하찮은 소일거리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환자를 돌보신 것은 하나님권능과는 무관한 일로서 치료방법을 알고 계

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권능은 무엇이겠습니까?

.

맞습니다.

당연히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이렇게 보면 4절과 5절 내용은 믿음이 없으면 구원이나 영생 또한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지요.

이미 몇 차례나 확인했다시피 영생이란 이세상일들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얻기 힘듭니다.

물질을 영보다 값어치 있게 여긴다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일인데 예수님 고향 분들은 인간적

인측면(육적인)과 세상법도를 중시 여겼던 겁니다.

이러한지라 예수님말씀이 먹히지 않았던 거지요.

여기오시는 여러분들도 스스로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과연 영적인일을 육적이고 물질적인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제가 아는바에 의하면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조차 쉽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많은 이들이 자신들은 영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구절을 보시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6:6)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상히 여기셨다고 했을까요?

마가가 이렇게 기록해놓은 것은 예수님은 영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 여기고 있지

만 일반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수준에서는 당연한일이 일반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우회적으

로 표현한 겁니다.

특히 예수님의 친지들이나 가족들은 혈연을 중시여기기에 예수님을 그저 가족의 일원으로밖

에 볼 수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영의 세계에서는 가족이나 혈육은 중요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다 같은 하

나님의 품성을 나누어받은 형제라는 것을 아는지라 인식의 차이가 컸던 겁니다.

이런 이유로 고향을 벗어나 여러 지방을 다니며 가르치셨던 거지요.

지금은 우리들이 삼자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영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생각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이러한 일을 닥치게 되면 예수님가족처럼 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본인들이 영적으로 높은 인식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영적인일은 세속적이고 육적인일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아야하며 영이 물질보다 더욱 귀하

다는 것을 인식해야만합니다.

그럴 때라야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거지요.

이만하면 믿음이 생기려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하는지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여겨지는

바 눈을 성경 속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6:7)

 

미리 말씀드렸듯이 12제자는 하나님과 성령으로 연합된 이들을 가리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3)이 사람의 몸(4)과 완전히 연결된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영적각성상태가 완전해진 제자 12명을 불러 말씀을 전하려 보냈다는 뜻에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정말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케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성령이 드러나면 영

이 깨끗해진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성령이 있음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것

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둘씩 보내는 이유는 서로 의지하라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위해

서입니다.

두 사람의 증인(하나님을 증거)이 대상을 만나게 되면 3이라는 숫자가 만들어지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겁니다.(이때 대상은 숫자에 관계없이 하나로 본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삼인행(三人行)

필유아사언(必有我師焉)이니라.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말은 공자님께서 하신말씀인데 성경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같은 이치를 알고 계셨기에 제자들을 둘씩 보냈던 거지요.

참으로 세심하게 배려하신듯합니다.

또 어떤 일을 제자들에게 명하셨을지 궁금해집니다.

함께 보시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6:8)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6:9)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분명 마태복음에서는 똑같은 내용이 달리 기록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마가는 이렇게 기

록 했을까요.

마태복음 내용을 다시 가져와 보겠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

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10:10)

Nor scrip for your journey, neither two coats, neither shoes, nor yet staves: for the

workman is worthy of his meat.

 

마태오는 신발이나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 했는데 마가는 신발과 지팡이는 가져도 된다 했습

니다.

성경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이 내용을 보고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겠지만 이는 마가가 마태복

음의 내용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한 겁니다.

가만히 보면 마태오는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갖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여별로 가지지

말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neither two coats, neither shoes, nor yet staves)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성경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을 위해 언급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지라는 뜻에서였지요.

말씀을 전하는 것은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일이며 (for the workman is worthy) 하나님으로

부터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말해준겁니다.

무엇을 잔뜩 준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안배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복

음전파에 나서라는 겁니다.

이런 뜻을 잘 알고 있는 마가는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서 기록했습니다.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6:10)

 

이 말씀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지요.

마가복음의 내용만으론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마태복음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

And into whatsoever city or town ye shall enter, enquire who in it is worthy; and

there abide till ye go thence.

 

마가는 아무집이나 들어가면 거기 머물라고 했지만 마태오는 먼저 합당한 자를 찾아내라고

(enquire who in it is worthy)했습니다.

여기저기 물어보고(enquire)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한 후 그 집에 머물라는 말이지

.

마태오와 달리 마가가 기록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말씀전하는 사람을 집에 들여놓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있기에 가능했다는 말

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는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던 겁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6:11)

And whosoever shall not receive you, nor hear you, when ye depart thence, shake

off the dust under your feet for a testimony against them.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니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말은(shake off the dust under your feet) 인연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지요.

족적(足跡)을 남겨서 훗날 심판의 날에 증거로 삼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만 봐서는 이 뜻을 제대로 음미하기 힘든 지라 동일한 내용의 마태복음을 보겠습니

.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

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10:1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소돔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0:15)

예문으로 올린 마태복음 내용은 결코 악담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복음을 전해보고 듣지 않으면 인연 없음을 깨닫고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음에 이르면 소돔과 고모라땅이 멸망을 당하듯이 영적인 죽음에 이른다는 말입

니다.

이 같은 뜻을 잘 아는 마가인지라 마태복음과는 약간 달리 기록했던 겁니다.

천국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된다는 말

이지요.

이 내용을 잘못 받아들이면 성경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멸망하거나 지옥 간다는 말을

함부로 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 내용을 잘못 인용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영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영적인 멸망을 맞이하기 때문에 강한 표현을 했던 것이

며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구태여 복음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한지라 발에

먼지를 털어 내라는 말로서 인연 없음을 설한 거지요.

누군가 심판받는다 말하더라도 정말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믿음이 확고히 서있다고 한다

면 전혀 흔들림이 없을 겁니다.

여기에서 오늘날 개신교도들의 잘못된 복음전파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말씀을 받아들일 때까지 지속적으로 권하라고 시키는데 그이유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옥가기 때문이란 말을 합니다.

그런 분들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천주교나동방정교회,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기독교, 등등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있는데 이

들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면 이중에 한 가지만 믿어도 천국을 가지 않겠습니까?

나 홀로목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다들 자신들의 교리가 최고라고 말하며 다른 곳

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래서야 어찌 제대로 된 하나님자녀들이라 할 수 있겠

는지요?

틀린 교리를 가르치기 때문이라 말씀들 하시는데 그러면 자신들의 교리가 옳다고 누가 말합

니까?

스스로가 그렇게 여기고 있을 뿐 타인들이 옳다고 여겨주거나 하나님이 직접 인정해주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망발을 함부로 하는지 참으로 궁금

합니다.

자신들이 천국 간다는 확신을 하는 것은 좋지만 타인들에게 함부로 지옥 간다는 말을 하게

되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을 알아야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 홀로목사는 인연 있는 이들만 이곳을 오라 말씀드리고 있으며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나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설(私設)이 길었던 것 같습니다.

절미(截尾)하고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6:12)

And they went out, and preached that men should repent.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6:13)

 

회개하라 에 해당하는 영어단어는repent입니다.

이단어의 뜻은 회개하다 뉘우치다 이지요.

그런데 주목해볼 것은 회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타노에오’(metanoeo)이며 그 뜻은 돌이

키다 인데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있던 자가 돌아온다는 의미와 생각을 고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하게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껏 잘못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돌이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잘못된 생각을 돌이킬 줄 알아야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귀신을 쫒아냈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 즉 깨끗지 못한 영(잘못된 인식)을 고친다는 의미이

며 기름을 발라 고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줌으로서(기름부음) 고쳤다는 겁니다.

간단한 내용에 대단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읽어볼수록 마가의 지혜로움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지혜로운 말씀이 이어질는지요.

함께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6:14)

And king Herod heard of him; (for his name was spread abroad:) and he said, That

John the Baptist was risen from the dead, and therefore mighty works do shew

forth themselves in him.

어떤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6:15)

Others said, "He is Elijah." And still others claimed, "He is a prophet, like one of

the prophets of long ago."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6:16)

 

가만히 들여다보면 헤롯왕은 스스로의 양심에 심판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가가 이내용안에다 뭔가를 심어놓았음이 보여 집니다.

14절에서 헤롯왕이 세례요한이 살아났다는 것을 말했는데 불구하고 16절에 반복해서 말했

지요.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14절 내용은 마가가 헤롯왕이 말한 것처럼 꾸며서 부활에 대한 비밀을 말해놓은 겁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은(John the Baptist was risen from the dead) 부활을

뜻하며 이런 능력이 그 안에서 작동한다는 것은(mighty works do shew forth themselves

in him) 성령의 임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15절에 어떤 이는 엘리야라(He is Elijah)하고 어떤 이는 옛 선지자중의 하

나라고(like one of the prophets of long ago)한다 기록한 거지요.

성령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러한 이치를 아는 것이며 영의 세계는 시공이 없다는 것을 마가

는 말해놓은 겁니다.

이 내용은 성령을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16절이야말로 헤롯왕의 인식정도에서 느끼는 감정 그대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도대체 헤롯왕과 세례요한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6:17)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6:18)

 

내용을 보니 요한이 입바른 말을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왕족끼리만 혼인하는 풍습이 만연

할 때인지라 근친결혼은 예사로운 일인데 왜 그랬을까요?(빌립은 헤로디아의 친삼촌)

추측컨대 요한은 성경말씀을 근거로 하여 반대하였을 거라 여겨집니다.

형의 아내는 동생이 이어받을 수 있어도 동생의 아내를 형이 취하라는 말은 성경에 없기 때

문이 아닐까합니다.

그렇다 해도 죽일 것 까지는 없었을 것 같은데 어찌된 일일까요?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6:19)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6:20)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

로 더불어 잔치할쌔(6:21)

And when a convenient day was come, that Herod on his birthday made a supper

to his lords, high captains, and chief estates of Galilee;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6:22)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6:23)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

리를 구하라 하니(6:24)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

를 원하옵나이다 한대(6:25)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6:26)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

을 목 베어(6:27)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6:28)

And brought his head in a charger, and gave it to the damsel: and the damsel gave

it to her mother.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6:29)

 

!

이럴 수가…….

너무 놀라워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놀라워하는 것은 요한이 죽음을 맞이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마가라는 사람이 이 내용

속에 엄청난 것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타락한 인간이 향락에 빠져 사람을 죽인 것으로 보이지만 속 깊은 내용을

살펴보면 사람이 영적이지 못하고 타락하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가를 말해놓았습니

.

19절에 등장하는 헤로디아는 육신적으로는 헤롯의 부인이지만 영적으로는 헤롯 안에서 작

용하는 사탄의 힘을 상징합니다.

기회만 닿으면 영적인 길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0절은 헤롯 내면에 영적인 성품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과 같은 성인(예수님으로부터 엘리야라 칭함을 받음)을 알아본다는 것은 그 내면에 성

령을 담고 있기 때문이고 번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육적인면과 영적인면이 내면에서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마음에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는 것을 21절은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회좋은날이(a convenient day was come) 왔다는 것은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일 찬스가

왔다는 말이지요.

이는 곧 헤롯의 내면에서 영적인면이 죽고 육적이고 물질적인 이방의 마음이 승리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과 잔치를(a supper to his lords, high captains,

and chief estates of Galilee)벌렸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빠졌다는 것을 표현한

겁니다.

그리고 특히 주목할 부분은 갈릴리의 귀인들인데 이는 영생을(영원한 해탈)얻지 못하고 윤

회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방의 고장인 갈릴리(Galilee)의 뜻은 원, 순회, 지역, 등입니다.

이어지는 22절의 내용은 타락한 헤롯에게 더욱 심한 사탄의 시험이 오게 됨을 말해줍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사탄의 힘이 작용하는 여인을 상징하며 헤롯이 여색에 빠져들었다는 거지

.

이정도로 타락하게 되면 헛된 맹세까지 하게 된다는 것을 23절이 보여줍니다.

급기야 사탄(물질적이고 육적인 힘의 대명사)은 헤롯의 마음속에 심어진 성령의 힘까지 잘

라내라고 시킵니다.(24,25)

이미 약해져버린 헤롯의 마음은 육적이고 물질적인 힘인 사탄에 굴복하여 성령의 불씨마저

포기하고 맙니다.(26,27)

처녀아이가 그 어미에게 요한의 머리를 주었다는 것은 헤롯의 마음속에서 잘라져버린 성령

의 힘은 사탄에게 바쳐진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28절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지냈다고 한 것은 본래품성

의 근원인 성령은 결국 영적인 길을 걷는 이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마가는 어떻게 이렇게 지혜롭게 말해놓았을까요?

사실 이 내용은 헤롯개인의 일이라기보다 우리 구도자(수행자)들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각종 유혹들의 실체와 결과들을 총망라해서 기록해놓은 겁니다.

헤롯이라는 이름에다 자신의 이름을 대입해보면 정말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나 역시 이러한 시험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절로 기도를 하게 되지요.

오늘도 변함없이 평탄한 영적여정을 마무리 할 수 있게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마가복음6장의 반을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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