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내가 그 사람처럼 되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생겨난 거지요.
상대방의 입장에서서 생각하는 것이 이해의 첫걸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만으로 상대방을 올곧게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결국에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에 대해 알아보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식에 대해 생각해보면 됩니다.
아들과 며느리의 입장과 딸과 사위에 대한 생각을 해보면 나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방송에서 이런 일에 대해 다룬 적이 있는데 사람들은 누구나가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지요.
그날 패널로 나오신 연세 많으신 여성 몇 분은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서 아들 편을 드는 쪽이었는데 딸의 입장에 서자 입장이 완전히 바뀌는 겁니다.
며느리가 아들에게 잔소리 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것은 물론 가사 일을 돕는 일에 부정적이던 이들이 딸을 도와주지 않는 사위 욕을 하는 것을 보며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패널로 나오신 이들이 아들과 딸 모두를 가진 분들이라 그나마 자신의 이기심을 볼 수 있었지만 딸이나 아들 하나만 키우는 이들은 자신의 한쪽에 치우친 마음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날 참석한 토론자들조차 자신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 확인할 정도였으니 평상시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역할을 바꿔가며 윤회를 하는 것이며 수많은 생을 통해 사랑의 완성을 만들어 갑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치고 음양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음양의 도리가 내 삶에서 실천되는 이는 드뭅니다.
빛과 어둠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을 알아도 질투와 미움조차 사랑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힘들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험에 관한 문제이며 직접 사랑을 해봐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이지요.
따뜻한 해가 온 누리를 비추듯이 바다가 모든 것을 포용하듯이 타인의 잘못을 이해와 용서로서 감싸 안으며 사랑하라는 말은 입 달린 이들 모두가 말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렇게 살아가는 이는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살수가 없는 겁니다.
천국을 느껴보려면 지옥을 경험해야하듯이 진정으로 사랑을 하려면 반드시 질투와 미움을 경험해야합니다.
비교대상이 없다면 자신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서있는 내 위치가 천국임을 안다는 것은 지옥을 경험했기에 가능한 거지요.
마찬가지로 상대방을 지극히 사랑하면 질투와 미움이 감정이 생긴다는 것은 경험을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원론적으로 태양이 비추듯이 사랑하라는 말은 실생활에 크게 도움이 안 됩니다.
상대방은 개떡같이 노는데 나만 찰떡같이 논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대방을 놀리는 거나 다름없지요.
예전에 이런 일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공무과장이 잔소리를 심하게 하는 바람에 맞대응하지 않으려고 조회시간에 땅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듣고만 있었는데 자신을 놀린다고 여겼는지 더욱 심하게 갈구는 겁니다.
자신 말을 우습게 여기냐는 말이었지요.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생각해서 다음부터는 경청하는 것은 물론 지시하는 데로 따라가려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는지 연일 잔소리를 했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참고 견디다보니 어느덧 공사는 마무리가 되었고 인연도 끝나게 되었는데 그 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지요.
어차피 연극인데 맞으면 아프다는 시늉을 해야 하고 잘못한일은 사과도 하고 변명도 해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너는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않다 말하거나 웃는다면 상대방을 약 올리는 것과 같은 거라는 사실은 경험해봐야만 아는 일입니다.
그래서 역지사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되어야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면 이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에게 맞추는 거라는 것은 사랑해보면 압니다.
지극히 사랑하면 상대방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고 그에게 속해지고 싶은 것은 당연한 거지요.
우리가 신을 지극히 사랑하여 신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한다고 해서 무조건 복종하고 따른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위선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상대방을 속이며 신을 속이는 짓인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자연스러워야하는 것이며 다툼과 미움조차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되어야합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서로가 인연이 있어야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랑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박수를 치려면 두 손이 마주쳐야하는 겁니다.
누군가의 사랑방식은 내가 알 수 없으나 나는 사랑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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