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개나리가 피어난 걸보니 완전한 봄이 온 것 같습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봄이 소식으로 전해지는 것을 넘어 우리 안에 들어선 것과 같이 우리역시 영생의 문 안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습니다만 중단되지 않고 이어져왔지요.
이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여러분과 나 홀로목사를 묶어주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성령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귀신의 범주에 머무는 사람들조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난시간을 통해 확인한바와 같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있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거나 성령을 잘못인식하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잘못되고 왜곡된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나 성령을 깨우기 위한(하나 되기 위한) 제대로 된 방법을 배워야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적으로 알아야할 것이 성령이 심어진 과정과 왜곡된 가르침에 노출이 된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아야겠지요.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말해주었듯이 아담(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실 때 숨결(생명, 성령)을 불어넣었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태초에 하나님이 심어놓은 성령이 들어앉아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누구나가 담고 있는 성령을 드러내지 못하는 걸까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알아야할 점인데 성경은 여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해놓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성령을 드러낸 예수님과 같은 분을 만나야 성령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말해놓았을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사이비종교나 교주에 빠져 평생을 노력봉사하고도 성령과 하나 되기는커녕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자칭재림예수)
그러면 왜 누군가는 이런 잘못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걸까요.
그것이 바로 자신이 잘못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의 영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어떤 기독교종파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살아생전 예수님이 자신들을 데리고 영생의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부활하실 것을 믿고 있지만 만에 하나 예수님이 늦게 오시게 되면 하늘나라 안전한 곳에 올라 대기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날 다시 육신으로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왕국에 올라갈 거라고 합니다.
이렇게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유겠지만 이 같은 믿음이 가지는 의미는 자신들이 믿는 믿음의 형태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다는 겁니다.
이 같은 경우를 불교에서는 윤회한다고 말하지요.
다시 말하자면 윤회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윤회한다는 것을 그들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분들만 이럴까요.
특정한 종교나 단체에 속한 사람들치고 예수님을 팔아먹지 않는 종교나 단체는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경말씀을 자신들 편리한대로 해석합니다.
이런 일이야 누구나 하는 짓이니 그렇다할지라도 적어도 확실히 드러난 것들은 속여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자신(육신)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영생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이 같은 사실은 간과한 체 무조건 예수(재림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만약 이럴 것 같으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진리가 되어야하고 예수님살아생전 그 많은 제자들이 모두 영생을 얻어야겠지만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믿는다고 모두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지요.
여기에 대해 기록한 성경내용이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육신예수님을 믿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면 이때당시 예수님을 본 사람들 모두가 들어 올림 받아야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으며 예수님조차도 몇 사람만이 영생을 얻는다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예수님의 다음말씀을 인용하여 반박하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 말씀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말씀을 제대로 믿으려면 상반되는 두 가지 가르침의 공통분모를 찾아야합니다.
예수님육신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어느 한쪽은 거짓이 되어야하지만 성령이신 예수님을 대비해보면 두 가지 가르침 모두를 충족시키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역시 성령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되지요.
바로 이것이 나 홀로목사가 여러분에게 전해주고자하는 천국복음이자 성령이신예수님이 나 홀로목사 입을 통해 전해주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러한 영광도 여러분에게 믿음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아무리 성경말씀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방법을 말해놓은 경전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믿지 않는 바에는 어떤 효력도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이자 성령을 드러내지 못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거지요.
어쩌다보니 인연이 있어 나 홀로목사와 연분이 닿았다하더라도 불신감을 가지고 있는 이상 성령과 하나 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 홀로목사가 믿음이 없는 분들은 한시바삐 인연정리를 하고 오지 말아 달라 부탁드리는 거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은 귀신들린 자들로서 와봐야 고치기 어렵습니다.
나 홀로목사 알기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높은 가르침을 소화시킬 것이며 영생을 얻을 수 있겠냐는 겁니다.
지난시간에도 보았다시피 성령의 가르침을 무시하면 하나님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정말 나 홀로목사가 성령의 임하심으로 말씀을 전해준다고 믿는다면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자신들은 귀하게 여김 받길 원하면서 성경의 귀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존귀에 처해질 자격이 없습니다.
특히 영생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된 이들이라면 이 같은 일은 아주 기본적인 겁니다.
성령을 드러내는 것이(하나 되는 것이) 목적일 경우 성령이 드러난 사람으로부터 성령을 나누어받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모른다면 나 홀로목사의 성경강해를 들을 자격이 없는 거지요.
어떤 금전적인 요구도 하지 않고 오로지 믿음만가지고 따라오라는데도 믿음이 없다면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야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성령과 하나 되는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10:21)
In that hour Jesus rejoiced in spirit, and said, I thank thee, O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that thou hast hid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prudent, and hast revealed them unto babes: even so, Father; for so it seemed good in thy sight.
이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고(thou hast hid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prudent)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신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거지요.
지혜는 깨달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권과도 같은데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에게는 성령이 드러내지 않고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신다고(hast revealed them unto babes) 했으니 말입니다.
사실 여기에 쓰인 지혜는 깨달음을 얻은 이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을 깨닫기(드러내기)전의 지혜를 가리킵니다.
육신의 범주아래 놓인 두뇌의 명석함을 뜻하는 거지요.
성령은 두뇌(육신)의 범주를 넘어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갖춘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는 것을 말하기위해 지혜와 슬기라는 단어를 사용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부분에 당신(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표현했습니다.(it seemed good in thy sight)
머리회전이 빨라 성경을 달달 외워도 성령을 깨닫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또 어떤 사람이 성령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을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눅10:22)
All things are delivered to me of my Father: and no man knoweth who the Son is, but the Father; and who the Father is, but the Son, and he to whom the Son will reveal him.(KJV)
"All things have been committed to me by my Father. No one knows who the Son is except the Father, and no one knows who the Father is except the Son and those to whom the Son chooses to reveal him."(NIV)
여러분이 보시는 한글성경은 NIV를 번역한내용입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KJV는 많이 다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이가 없고 까지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부분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가 아버지인지 아들 외에는 모른다고 했는데(and who the Father is, but the Son) 그이유가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and he to whom the Son will reveal him)
조금 더 풀어서 해석해보면 아들과 그를 드러내려는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모른다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who the Father is, but the Son, and he to whom the Son will reveal him)
종합해보면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넘겨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 인줄 알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을 드러내려는 제자들까지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음내용을 보면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10:23)
And he turned him unto his disciples, and said privately, Blessed are the eyes which see the things that ye see:
제자들에게 비밀스럽게 말씀하시길(said privately) 너희가 보는 눈은 복이 있다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보았을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21절 서두에 나옵니다.
성령 안에서(성령과 함께) 기뻐하실 때(In that hour Jesus rejoiced in spirit)라고 했으니 제자들이 성령을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거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4)
과거에 선지자들이나 임금들조차도 성령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인즉 성령이 드러난 분과 함께 있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선지자들이나 왕들이 하나같이 원했던 것은 살아생전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은 그분들이 살아생전 예수님 같이 성령이 드러난 분을 만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제는 확실하게 이해가 가셨으리라 믿고 다음내용을 보겠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
And, behold, a certain lawyer stood up, and tempted him, saying, Mast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율법사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물려받을 수 있는지를(to inherit eternal life) 물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영생)을 나누어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앞서 우리가 보았듯이 성령이 드러난 분에게는 성령을 나누어줄 권한이 주어진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에 대해 율법사가 시험을 한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
당신이 율법사인 만큼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어있고 그 내용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율법사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10: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10:28)
이 내용은 신명기(6:5)에 나오는 말씀으로서 율법사다운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요.(27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네 말처럼 행동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하셨던 겁니다.(28절)
그런데 율법사는 신명기 내용에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10:29)
율법사는 자신이 성경에 대해 능통함으로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노라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조차도 확신을 못하는 내용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말씀이었던 겁니다.(레19:18)
도대체 이웃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가 하는 것이 의문이었던 거지요.
거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아주 길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10:30)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눅10:31)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10:32)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눅10:34)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10:35)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10:36)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7)
30절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갔다고 한 것은 영적인 여정을 뜻합니다.
예루살렘은 널리 알려진 대로 평화의 터전이자 성전을 뜻하며 여리고는 “종려의 성읍”이라는 뜻과 함께 “생명의 원천”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에덴에서 쫓겨날 때 가져 나올 수 있게 허락받은 식물중의 하나이지요.
이런 까닭으로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영생을 향해 걸어가는 구도자를 뜻한다고 봐야하는 겁니다.(30절)
영적인 길을 걷다보니 제사장도 만나게 되었고 레위인도 만나게 되었던 거지요.(31,32절)
33절에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성령을 깨달은 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뜻은 “지키는 산” “살피다”입니다.
우리를 높은 곳에서 지키고 살피는 이는 하나님이며 성령을 깨달은 분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여기는지라 예수님이 바로 사마리아인으로 봐야한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강도만난 사람을 치료해주고 주막에 데려다가 극진히 보살펴주었으며 끝까지 책임져주었던 겁니다.(34,35)
이렇게 까지 지극정성을 다하는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예수께서는 한 가지 더 말씀하시기를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인용되어진 레위기 19장18절 내용을 봐야 되겠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
Thou shalt not avenge, nor bear any grudge against the children of thy people, but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I am the LORD.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웃의 범위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부분에 내가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것은 이 말씀의 대상 모두가 하나님자녀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한다면 원수를 갚으려하거나 원망하지 않게 되는지라 이웃사랑하기를 자신의 몸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명백히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자 모세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주고자했던 가르침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로서 성령을 깨달은 사람이 행할 바를 말씀하신 겁니다.
영적인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성령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강도만난 이와 마주친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행동한다는 말씀이기도합니다.
영생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이(구도자)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성령을 깨달은 사람이 모른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달리표현하자면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영적인 길을 걷는 이상 성령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정도면 소도 알아들으리라 생각되는바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10:38)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10:39)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10:40)
But Martha was cumbered about much serving, and came to him, and said, Lord, dost thou not care that my sister hath left me to serve alone? bid her therefore that she help me.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눅10:41)
And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her, Martha, Martha, thou art careful and troubled about many things: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2)
But one thing is needful: and Mary hath chosen that good part, which sha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38절에서 42절까지의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으로 누가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주기위해 만들어낸 비유의 말씀입니다.
겉보기에는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초빙하여 바쁜 가운데 동생이 돕지 않아 화가 난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38절 말씀을 보건데 마르다는 영적인 길을 걷는 구도자중 한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39절에서 마리아라는 동생을 등장시킨 것은 비유의 가르침을 주기위해 설정된 것이지요.
왜냐하면 40절을 보게 되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가르침을 듣기위해 앉아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길을 걷는 사람치고 말씀을 듣고 싶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일을 하고 누군가는 말씀만 듣는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處事)이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41절과 42절에서 마르다가 많은 일로 인해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한가지만으로도 족하며 빼앗기지 않는다 했다는 것은 이 말씀이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42절에 몇 가지만 하든지라는 말은 영어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며 정확하게 해석하면 하나가 필요하다입니다.(But one thing is needful)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필요한 한가지며 좋은 것이고 빼앗기지 않는다 했으니 무엇을 빼앗기지 않겠는지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성령이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마르다의 뜻은 “숙녀, 여주인”이며 마리아의 뜻은“가장 높으신 분, 존귀한 분, 권력 있는 귀부인” 등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누가가 주고자한 가르침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구도자(마르다, 여주인)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마리아처럼 말씀에 집중해야지 물질적인 일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물질적인 일에 관심을 쏟게 되면 단순하게 집주인(마르다)의 위치에 머물게 되며 영적 가르침에 집중하게(받아들이게)되면 마리아처럼 존귀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지요.
여기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40절 초반부에 마르다가 준비할일이 많아 분주했다는 부분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But Martha was cumbered about much serving
보시다시피 마르다는 많은 서빙으로 방해(장애)를 받았다고(cumbered)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싶었으나 예수님을 대접해야했기 때문에 장애가 생겼다고 하면 말이 안 되지요.
그런 까닭으로 준비할일이 많아 분주했다라고 번역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 내용은 영적인 가르침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들기 위해 누가가 만들어낸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말입니다.
한글성경처럼 번역해서 안 될 것은 없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가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본을 제대로 알아야하기에 언급해보았습니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성경이나 경전을 통해 얻어야할 것은 우리의 영적 성장일 뿐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발전은 아닙니다.
지금 보시는 이 내용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물질이나 육적인 봉사를 독려하기위해 인용하곤 하지만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란 걸 알아야합니다.
이해가 충분히 되셨으리라 생각하며 이쯤에서 10장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