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함부로 심판한 죗값은 받아야 한다.

배가번드 2024. 6. 7.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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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인(忍)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그렇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만 가지면 영생을 얻을 수 있지요.

상대방이라면 어떨까를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할 줄 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양한 경험을 해보았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세세생생 살아오는 동안 다양한 경험을 했으므로 상대방 기분까지 헤아릴 줄 아는 겁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상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타인들의 행동을 함부로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은 함부로 지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당할 때의 기분을 알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억지로 만들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많은 수행서적을 통해 선지자 및 현인들의 행동에서 확인되는 겁니다.

일예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있을 때 사부대중이 모여 설법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동안 아무 말씀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신통제일 목건련이 대중의 마음을 살펴보니 그중에 도둑이 있었지요.

이점을 알고 난 목건련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당신 때문에 부처님이 설법을 하지 않는다며 화를 내자 석가모니께서 오히려 목건련을 나무랐습니다.

 

“너는 어찌 그 사람 스스로가 뉘우칠 수 있는 시간을 뺐었느냐”

 

아마도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들은 도둑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대중 앞에서 창피를 주어도 무방하다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나 죄를 짓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볼 때 타인을 용서하는 일은 곧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일을 몸소 보여주신 적이 있지요.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요8:4)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요8:7)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1)

 

율법과는 무관하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세상법과 하나님 법이 다름을 보여주신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용서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요.

성령과 하나 된다는 것은 너와 나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의미로서 빛이신 성령과 하나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 욕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누군가를 교육시키기 위해 대중 앞에서 창피를 주어도 된다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역시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누구의 잘못을 함부로 지적하지 않으며 정말 해야 되겠다 싶으면 조용히 불러 조심스럽게 말해줍니다.

이렇게 말해주어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것이 사람이지요.

하지만 이런 이들 일수록 남의 잘못을 얼음 알 같이 지적하며 자신은 완벽하다 여깁니다.

누구도 아닌 내가 이렇게 살았으므로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 나 자신임을 이제야 압니다.

사실 내가 교회에 나가 귀신들린 사람 취급당하며 지냈던 지난 십 수 년의 세월은 그동안 내가 지은 죄를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알게 모르게 나 역시 숱한 사람들을 귀신들린 사람취급하고 함부로 판단한 적이 있을 겁니다.

내가 아는 점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데 내가 모르고 지은 죄는 또 얼마나 큰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손가락질을 당하면서까지 교회 집회에 참석을 했으며 동생이 권할 때마다 어김없이 교회를 나갔습니다.

물론 성경연구를 위한 목적도 있었고 동생가족이 걱정되어서 뭔가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지만 역지사지를 깨닫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집회에 참석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목사님께서는 여러 사람과 상담한 일을 예로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과의 대화 내용을 집회에 참석한 이들에게 말하며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했던 거지요.

그런데 그때 내가 황당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개인이 상담한 내용을 어떻게 대중들 앞에서 공개할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생각지도 않은 채 마치 그 사람이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될는지 생각도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겁니다.

나 역시 하나님을 만났으므로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여실하게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던 셈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도대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숱하게 많은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라는 말이며 그런 이들이 기록한 성경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본인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창피하게 여기고 오히려 배워야할 것을 본 사람을 귀신들린 것으로 치부해버린다는 것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다고 볼 수 없다 여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시간관계상 하나님을 만난 상황을 모두 예로 들 수는 없고 야곱의 경험만 가져와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32:30)

And Jacob called the name of the place Peniel: for I have seen God face to face, and my life is preserved.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창32:31)

And as he passed over Penuel the sun rose upon him, and he halted upon his thigh.

 

브니엘의 뜻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했지만(I have seen God face to face)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합니다.(my life is preserved)

그리고 31절에서 하나님을 얼굴을 지날 때 해가 올라 왔다고 했는데 이는 내적체험을 말하는 것으로 빛이신 성령을 보았다는 겁니다.

환도뼈는 히브리어로 보면 허리에 해당하며 생식 기능을 나타냅니다.

빛이신 성령은 생식기능과는 무관하다는 뜻으로 환도뼈(대퇴부)에 그가 멈춘다 한거지요.(he halted upon his thigh)

그렇지만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말해놓았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구약과 신약의 내용이 합일점을 찾으려면 빛이신 성령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지혜안을 열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형상에 머무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니 더 이상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헛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고 말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보았다는 사람을 함부로 심판한 죗값은 받아야 함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나라면 절대 함부로 판단하여 스스로를 망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심판받기 싫은 사람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