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우리의 의로움을 위해 살아나신 예수.

배가번드 2024. 9. 2. 03:14
728x90

성령에 대한 믿음이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이 있음을 진정으로 믿게 되면 말과 생각과 행동까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직 영혼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며 영혼을 안다 해도 성령과 하나 되기까지는 많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거지요.

하지만 반석과 같은 믿음과 스스로를 바울과 같이 작은 자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즉시 성령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하나님을 밖에서 찾고 있거나 신령한 힘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영생의 하늘과는 거리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떠한 방법으로 성령과 하나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는지 오늘도 변함없이 배워보겠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창17:4)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17:5)

Neither shall thy name any more be called Abram, but thy name shall be Abraham; for a father of many nations have I made thee.

로마서 17절 말씀은 창세기를 인용하였으므로 함께 올렸습니다.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려면 성령일 때 외에는 없으며 열국의 아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인류의 믿음에 조상이 되려면 빛이신 성령으로 통일이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아브람이라 하지 않고 아브라함이라 한 대목은 깊이 있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브람의 뜻은 “존귀한 아버지”이고 아브라함의 뜻은 “백성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보게 되면 뭔가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아브람은 뭔가 인간과는 거리가 있는 존재로 느껴지며 아브라함은 사람들에게 친근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므로 이는 믿음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바울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4:18)

Who against hope believed in hope, that he might beco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according to that which was spoken, So shall thy seed be.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바라는 것에 반하여 바람(희망)을 믿었다는 것은(against hope believed in hope) 성령과 하나 되는 일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얻고자 노력할 때 얻게 되는 것이 물질세상의 이치라고 볼 때 성령은 사람이 희망하는 것들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거지요.

성령은 눈에 보이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음으로 바라는 바에 부합하지 않으며 오로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사실을 올곧게 믿었으므로 성령의 불씨를 전해줄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So shall thy seed be)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조상이 되려면 빛이신 성령과 하나 될 때 외에는 없으므로 바울은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과 하나 되려면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말합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4:19)

And being not weak in faith, he considered not his own body now dead, when he was about an hundred years old, neither yet the deadness of Sarah's womb: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4:20)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4:21)

And being fully persuaded that, what he had promised, he was able also to .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4:22)

And therefore it was imputed to him for righteousness.

사라의 뜻은 “열국의 어미, 백성의 어미”이며 원래 이름은 사래 이었고 그 뜻은 “영귀, 영화, 야훼는 자유롭게 하셨다”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과 같은 과정을 겪은 후에 이름이 바뀐 겁니다.

백세는 꽉 찬 숫자이므로 하나님과 하나 되었음을 뜻하며 이때 이삭(뜻: 비웃음, 웃음)을 낳게 됩니다.

육적 속성의 죽음을 통하여 영적인 완성을 이루었음을 말하고 있는 거지요.(만족의 마음은 웃음을 낳게 됨)

육의 속성을 죽이기 위해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지만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오히려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렸다고 하니 그 믿음이 실로 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믿는 것을 넘어서 확신했다고 합니다.(21절)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었던 거지요.(22절)(imputed to him for righteousness)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롬4:23)

Now it was not written for his sake alone, that it was imputed to him;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4:24)

But for us also, to whom it shall be imputed, if we believe on him that raised up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Who was delivered for our offences, and was raised again for our justification.

아브라함이 오로지 믿음으로서 영적 완성을 이루어 의로워 졌으므로 우리 또한 믿는 것만으로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23절)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워진 것을 믿는 이들이라야(believe on him that raised up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의롭다 여겨질 거라고(it shall be imputed) 했습니다.(24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육신이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성령으로 부활하셨음을 믿으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25절에서 예수의 육신은 우리들의 범죄를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한 겁니다.

만약 십자가 부활이 육신의 것이었다면 내어주었다는 말은 틀리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육신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바 부활은 영적부활이며 성령으로 되살아난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해서 4장을 모두 마쳤으니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할까 합니다.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 모두는 내적으로 성령을 영접하셨는지요.

이렇게 질문하면 누구도 감히 대답하려 하지 않는 것 같으니 수정해서 물어보겠습니다.

성령이 담겨있지 않은 육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이 같은 사실을 모를 수가 없으며 모른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적지만 확신을 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는 말씀을 드리며 4장의 막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