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감사의 마음은 믿음보다 중하다.

배가번드 2024. 10. 25.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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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연구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원래 바울은 22절 말씀만 인용하였지만 원뜻을 제대로 이해하기위해 몇 구절 더 올렸습니다.

시편저자(著者)로 알려진 다윗은 멜기세덱(의의 왕)의 등급에 오른 인물이지요.

그런 인물이 썼다는 시편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역시 멜기세덱의 반열에 들 수도 있으므로 집중적으로 상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사말을 줄이고 본문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69:17)

And hide not thy face from thy servant; for I am in trouble: hear me speedily.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시69:18)

Draw nigh unto my soul, and redeem it: deliver me because of mine enemies.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 내용은 깊은 뜻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구도자가 환난 중에 있는 것을 구원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원수로 인해 나를 구원하시라는 말은 육신이 죄 값을 받고 있으므로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Draw nigh unto my soul)

무엇보다도 환난 중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시69:19)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69:20)

 

하나님 손길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나의 내면은 물론 상대방의 마음속까지도 모두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윗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19절)

그리고 육신적으로 우리를 이해하고 불쌍히 여길 자가 없다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요.

사람이 기댈 곳은 오로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20절)

이 같은 말씀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자신주변을 살펴보면 가슴깊이 이해가 됩니다.

처자식은 물론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조차도 내 마음을 제대로 아는 이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69:21)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시69:22)

 

얼핏 생각해보면 부모 형제들이 쓴 것이나 신 것을 주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이는 그런 말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들 모두는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 적이고 물질적인 관점에서는 음식은 물론 돈이나 재물을 주면 좋아 하겠지만 그러한 것들 모두는 영혼이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는 쓸개와 식초에 다름없다는 겁니다.(21절)

그래서 바울은 22절에서 밥상이 올무가 되고 평안이 덫으로 작용한다 말한 거지요.

이 같은 해석은 육적인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을 가져야 가능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우리가 성경말씀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게 됩니다.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시69:24)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69:25)

Let their habitation be desolate; and let none dwell in their tents.

 

액면대로 보면 마치 저주를 퍼붓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으며 성령을 깨닫기 위해서는 육신의 속성이 허물어져야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거처(habitation)와 장막(tents)은 육신을 가리키며 영혼이 일시적으로 머물고 있는 곳에 불과함을 깨달으라는 뜻이지요.

다음 내용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무릇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시69:26)

For they persecute him whom thou hast smitten; and they talk to the grief of those whom thou hast wounded.

그들의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 주의 공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시69:27)

Add iniquity unto their iniquity: and let them not come into thy righteousness.

 

육신에 초점이 맞춰진 사람들은 두들겨 맞고 슬픔에 빠져있는 이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것이라 핍박하지만 속뜻을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26절)

육신으로 지은 죄를 없이 하려고 하나님께서 치시고(thou hast smitten) 상하게 하신다는(hou hast wounded) 점을 일반인들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죄악에 죄악을 더한다고 27절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Add iniquity unto their iniquity)

죄를 씻겨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것을 비웃는 것은 공의로운 하나님을 몰라서이지요.

오로지 사랑의 하나님만을 생각하는지라 두들겨 패고 부상을 입히는 하나님의 공의를 볼 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다윗은 공의로 들어오지 않게 하라 말하고 있습니다.(let them not come into thy righteousness)

그러므로 이어지는 내용역시 같은 시각으로 봐야합니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시69:28)

 

마치 저주를 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는 경고의 말씀으로 공의로운 하나님을 모르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구도자가 갖추어야할 마음가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시69:29)

But I am poor and sorrowful: let thy salvation, O God, set me up on high.

 

육신의 가난함과 비통함을 올곧게 받아들이겠으니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을 드높이시라는 겁니다.

바꾸어 표현하면 구도자가 당하는 슬픔과 가난은 영혼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지극한 찬송을 바치고 있습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시69:30)

I will praise the name of God with a song, and will magnify him with thanksgiving.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31)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확장한다고(magnify him with thanksgiving) 한 것은 자비와 사랑만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30절)

축복과 재앙을 동시에 주시고 그조차도 크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되니 확장된 하나님을 찬양하여 노래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31절에 언급되는 소는 구도자의 육신을 가리키며 뿔은 강한 믿음, 발굽은 한결같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즉, 강하고 곧은 믿음보다 전체이신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세 번째 시간을 마쳤으니 네 번째 시간에 만나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