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성령을 드러내어 존귀에 처해지라.

배가번드 2025. 7. 1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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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에 인용된 구약을 상고하는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7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주기를 가리키는 숫자이지요.

그런 만큼 오늘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깨닫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사말은 접어두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창13:14)

 

롯의 뜻은 ‘덮개, 감추어진’이고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이며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이러한 뜻을 대입하면 육신에 감추어진 성령이 드러나 존귀에 처해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내재하신 하나님(성령)께서 육신 아브람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뜻이지요.

영안을 뜨게 되면(눈을 들어) 방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해놓은 겁니다.

이렇게 받아들이게 되면 다음 내용도 자연스럽게 해석이 됩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5)

For all the land which thou seest, to thee will I give it, and to thy seed for ever.

 

영원하다는 말은 육신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씨는(thy seed) 육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씨를 뜻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내용은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13:16)

And I will make thy seed as the dust of the earth: so that if a man can number the dust of the earth, then shall thy seed also be numbered.

 

아브람의 자손은 혈육이 아니라 성령의 불씨를 전해 받은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땅의 먼지와 같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다면(if a man can number the dust of the earth) 네 후손들의 숫자도 셀 수 있을 것이라(thy seed also be numbered) 했으니 셀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성령으로서 만물 안에 깃들게 된다는 것을 먼지에 비유한 겁니다.

이어지는 내용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어야함은 물론이지요.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7)

Arise, walk through the land in the length of it and in the breadth of it; for I will give it unto thee.

 

땅을 통과하여(through the land) 종과 횡으로 걸어라 했으니 영의 몸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해가 되어야 다음내용역시 올곧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13:18)

Then Abram removed his tent, and came and dwelt in the plain of Mamre, which is in Hebron, and built there an altar unto the LORD.

 

헤브론의 뜻은 ‘친교, 동맹’ 이고 마므레의 뜻은 ‘강하다’입니다.

이러한 점을 대입하여 해석하면 성령을 깨달은 아브람이 또다시 육신 안에 머문다는 뜻이 됩니다.

즉, 성령이 깨어나도 육신으로 살아야하므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상태를 육신과 동맹을 맺었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강한 믿음아래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뜻에서 마므레 평원에서 거주했다 한거지요.(dwelt in the plain of Mamre)

이 말씀은 ‘평상심이 도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과도 같은 뜻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3장16절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점이었으며 똑같은 내용이 창세기 17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17:6)

And I will make thee exceeding fruitful, and I will make nations of thee, and kings shall come out of thee.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And I will establish my covenant between me and thee and thy seed after thee in their generations for an everlasting covenant, to be a God unto thee, and to thy seed after thee.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8)

And I will give unto thee, and to thy seed after thee, the land wherein thou art a stranger, all the land of Canaan, for an everlasting possession; and I will be their God.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은 지금의 팔레스타인을 가리킵니다.

만약 성경의 내용을 액면대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점령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성경의 약속은 틀린 것이 됩니다.

물론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이들도 아브람의 자손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내용을 지금까지 믿고 있는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물론이고 기독교역시 성경의 내용을 액면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모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요.

사실 알고 보면 팔레스타인 분쟁은 형제간의 싸움이나 다름이 없으며 성경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종교에서조차 전쟁이일어나는 마당에 종교가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같은 이슬람교이지만 수니파와 시아파의 전쟁이 그러하며 카톨릭과 개신교사이에 있었던 전쟁 또한 그러합니다.

이모두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성령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타종교와의 합일점을 찾지 못한다면 명백하게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며 갈라디아서에 인용된 구약의 강해를 모두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