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고 거듭나라.

배가번드 2025. 10. 22.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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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연구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가 모두 구약을 믿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보니 사람이 생각하는 진리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며 잘못된 믿음이 사람을 얼마나 망쳐놓는지도 알게 됩니다.

아마도 믿음의 길을 걷는 대다수의 종교인들은 자신은 그렇지 않다 말하겠지만 알고 보면 본인역시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서 배웠다시피 근대사의 가톨릭에서는 천당행 표를 팔기도 했으므로 잘못된 믿음이 어떻게 타락의 길을 걷게 하는지 알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내재하신 성령을 모르기 때문이며 육신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찍이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눅17:20)

And when he was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하나님 왕국이(The kingdom of God) 눈으로 관찰되는 것이(not with observation) 아니라 했으니 육신의 눈이 아닌 영안으로 봐야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희 안에 있다 했으니 내재하신 성령을 가리키는 겁니다.

육신은 성전이요 성전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영안은 지혜안을 가리키는 것으로 육신의 몸이 아니라 영체의 몸, 즉 성령을 뜻한다고 보면 됩니다.

내재하신 성령을 깨닫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막9:2)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9:3)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막9:4)

And there appeared unto them Elias with Moses: and they were talking with Jesus.

 

2절에 엿새는 6을 가리키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고 거듭났다는 뜻입니다.(3×2=6)

그리고 베드로의 뜻은 ‘반석’이고 야고보의 뜻은‘발뒤꿈치를 잡는 자’이며 요한은 ‘여호와의 은혜가 깊으시다’이므로 반석 같은 믿음과 성령의 내재하심을 아는 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예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뜻이 됩니다.(예수의 뜻; 하나님이 구원해주신다)

발뒤꿈치를 잡는다는 말은 우리 안에서 육신을 제어하는 성령을 뜻하는 겁니다.(야곱과 에서의 비유)

정리하여 보면 구원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반석 같은 믿음으로 내재하신 성령을 일깨워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을 깨닫고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높은 의식세계로 올라가 빛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이며 영안을 열어 영체를 볼 수 있었던 거지요.

시대를 달리한 성인들을 한 번에 보았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빛의 세계를 가리키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제대로 이해가 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6:27)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6:2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9)

And yet I say unto you, That even Solomon in all his glory was not arrayed like one of these.

 

26절 말씀은 삼라만상 안에 성령이 내재하심을 아는 이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공중의 새가 하나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지만 그조차도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대단한 가르침인지요.

이러할진대 자신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과 공격을 가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죄악 중에 죄악인겁니다.

그리고 27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길 원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으며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주기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고 느낄 새도 없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27절에서 염려하지 않아도 키를 자라게 한다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28절에서 우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보살핀다는 뜻으로 들에 백합화가 자라남을 비유하고 있는 겁니다.

이 같은 말씀 모두는 성령을 깨달은 사람의 것으로 일반인들의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 자신이 거듭난 사람이라면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러므로 29절은 우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성경을 오해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살아생전 솔로몬은 수없이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물질로는 더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고 산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풍요는 모두가 물질적인 것들로 영적으로 보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야말로 귀한 것이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을 예로 들어 어떤 목회자는 솔로몬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성경을 잘못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솔로몬이 기록한 전도서를 진리의 말씀이라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전도서는 진리의 핵심을 말하고 있으며 만고불변의 가르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물질보다 영을 소중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피 같은 돈을 복음을 위해 바치라고 하지요.

물론 십일조를 해야 교회가 유지가 됨으로 당연히 성전 세는 내어야겠지만 지나치게 헌금을 요구하는 일은 성령에 대해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같은 일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 본인들이 걱정해야할 일입니다.

내재하신 성령을 깨닫지 못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며 완성을 위해 또다시 세상을 와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나마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짐승 같은 짓을 하고 산사람은 짐승으로 태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상세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에는 사람 같은 짐승도 있고 짐승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라 해서 다 같지 않으며 짐승이라 해도 다 같지 않으니 어느 것 하나 하느님 손길이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타인을 이용하는 행위는 짐승으로 태어나는 지름길이라는 말씀을 드리며 물러갑니다.

 

회개하고 용서받고 싶은 이만 들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