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나사렛 예수를 본받으라.

배가번드 2025. 11. 25.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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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육적 속성을 넘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관조자의 시각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켜보는 이의 입장에 설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꿈을 꾸는 나를 인식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는 뜻이지요.

물론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봐서는 안 되며 완전히 삼자적인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핵심의 가르침이며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의 뜻은 ‘초소, 망루, 지켜보다, 파수꾼‘으로서 예수가 성령과 하나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는 습관이 필요한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자신의 변명에 능해서는 곤란하며 하나님이신 성령이라면 어떻게 볼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다툼이 벌어졌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재하신 성령에 대해 알고 나면 생각이 많이 달라져 성령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지요.

하나님이라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생각하고 다음으로는 그 하나님이 내안에서 내행동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다음으로는 성령이 내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내면에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인들 대다수는 내재하신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며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다고 말하지만 알고 보면 아직까지 한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내재함을 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만 그 하나님을 자신 안에만 살게 하면 마왕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바 있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지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령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성령을 따르려면 육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부정하라는 뜻입니다.

요약하면 철저하게 성령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말하라는 거지요.

사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어떤 이에게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육적속성을 완전히 죽여야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멀쩡한 목숨을 버릴 수도 없으므로 무척이나 힘든 일이지만 성령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언젠가 이런 일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채식식당에 종사하는 분들끼리 다툼이 벌어졌는데 저마다 나에게 자신의 입장을 호소했던 겁니다.

주방장은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말을 했고 지배인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으므로 모두가 타당성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누구의 편도 들 수가 없었기에 그저 한발 양보하라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일반적인 식당의 경우라면 사장이 명령을 내리면 모든 이가 따르지만 영적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보니 저마다 자신의 주장을 하였고 누구의 말에도 복종하지 않으려다 보니 일어난 일이었지요.

결국 깊은 명상을 통해 얻은 해답은 식당의 종사자들은 그 일을 통해 영적완성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고 나로서는 식당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도 양보를 하지 않는 그 식당은 문을 닫고야 말았는데 이러한 다툼의 주역들은 지금도 세상을 통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나 역시 중보자의 역할을 하기위해 지금도 노력중입니다.

저마다 못 다한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중이며 각자의 등급에 따른 경험을 해가며 전쟁 같은 영적투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은 비단 종교단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 어느 곳에나 적용되는 일이며 우리가 일생동안 겪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 같은 경우 일을 하다 다툼이 일어나면 항상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하나님이신 성령은 이 같은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고려하여 행동하게 됩니다.

당연히 처음에는 육신의 감정차원에서 생각하여 행동하지만 돌아서면 내행동을 스스로 돌이켜 성령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바 있지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5:23)

Therefore if thou bring thy gift to the altar, and there rememberest that thy brother hath ought against thee;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4)

Leave there thy gift before the altar, and go thy way; first be reconciled to thy brother, and then come and offer thy gift.

 

우리가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도 같습니다.

우리의 영육 모두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제사인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형제를 교회에 국한시킨다면 이 말씀은 교회에만 적용되겠지만 그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 말할 수 없지요.

삼라만상 안에 하나님이신 성령이 담겨있으므로 우리가 상대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다 같은 자녀로서 우리의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든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나 같은 경우에는 다툼이나 언쟁이 일어나면 근본 원인부터 살펴봅니다.

지금 내가 속해있는 곳은 건설 현장이므로 일단은 건물을 잘 짓기 위해서 모인 겁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트러블도 생기는 것이고 간섭현상으로 인해 피해를 주고받기도 하는 거지요.

그래서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그 당장은 불평을 하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크게 언쟁을 하며 다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봤자 이미 엎어진 물과 같은데 싸워봐야 피차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와도 어지간해서는 다투지 않습니다.

일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이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지라 구태여 언쟁을 해가면서까지 내주장을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을 해도 되고 저러한 방식으로 해도 되는데 구태여 내 방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일은 신앙생활에도 적용됩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든지간에 내재하신 성령을 깨우기만 하면 되는지라 구태여 내해석이 유일하다 말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지난 20년 세월을 초보자의 자리에서 복음말씀을 줄곧 들어왔지요.

요즘도 나에게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무조건 교회를 나가서 말씀을 경청합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하나님말씀을 전해주겠다는데 못 들어줄 이유가 없으며 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 동생네 식구들이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가정이 파탄나기라도 하면 모를까 바람직하게 살아가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으며 혹여 잘못된 길일지라도 그들을 건져내기 위해서라도 동참해야한다 여깁니다.

지금껏 지켜본 결과 내 동생은 교회에서 행복을 찾은 것처럼 보였으며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므로 아주 바람직한 신앙인이라 생각됩니다.

비록 동생 눈에는 내가 걱정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동생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다만 영생을 얻은 사람답게 좀 더 폭넓은 사랑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조차 관용의 마음으로 보듬어 주신 예수님을 닮았으면 합니다.

이것이 내 욕심인줄 알고 있으나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드리며 오랜만에 교회나간 소감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