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지난번 약속대로 내가 몸을 담았던 식당주방으로 돌아가서 오늘의 얘기보따리를 풀어보도록 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래를 하며 설거지를 하는데 주방장을 맡고 있던 사저가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칼 장수할 때 생각이 안나요?”하는 것이 아니겠니.
워낙 정색을 하고 말을 하는 통에 섬뜩하기도 하고 이 무슨 가당찮은 소린가 싶어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 또 한 번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이와 같은 사저의 말에 괜히 짜증이 났던 것은 무엇인가 그 사저가 나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자체가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만약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가 나에게 물어왔더라면 보다 친절할 수 있었을 텐데 평상시 내가 생각하던 여성상과는 거리가 한참이 먼 사람이라서인지 퉁명스러운 대답을 했던 거지.
게다가 이사저가 바로 앞서 얘기한 적이 있었던, 한반도의 전쟁이 일어나는 비전을 보고 중국으로 피난을 갔던 분이었거든.
그런데 이 같은 내 두뇌의 생각과는 달리 느낌은 그 사저가 나의 전생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물어봐야겠다 싶은 거야.
내가 그렇게나 내 과거 전생이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생의 잘못이 있기에 이생에서 이렇게나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어.
그 사저가 몇 번에 걸쳐 반복해서 말하는 걸로 봐서는 분명하게 나의 전생을 보는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에 한번은 마음먹고 물어보았지.
“내 전생을 안다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나왔는지요?
내 전생이 무엇이었습니까?”
따지듯이 물었더니 확실한 대답은 않고 그냥 내 모습에서 스쳐 지나가는 영상을 보고 말했을 뿐이라고 하더구나.
사저의 얘기가 황당하게 생각이 되지 않았던 것은 내가 그 당시까지 겪었던 많은 일들이 그분의 말씀이 맞을 수도 있다는 결론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아들아!
이 같은 내 말을 설명하기위해 내가 겪었던 많은 일들을 다시 되돌려볼 필요가 있으니 좀 더 먼 옛날로 얘기를 돌려서 이와 같은 전생을 알아보도록 해.
혹 너는 가위라는 말을 들어보았니?
왜 팔다리를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 목을 누르는 것 같은 일말이야.
언젠가 한번은 가위를 심하게 눌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1981년 인 것 같아.
새벽 두시가 넘어 들어온 숙소에서 분명하게 전등불을 끄고 잠이 든 것 같았는데 가슴이 답답해서 눈을 떠보니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어.
눈을 전부 뜨지는 못하고 게슴츠레 뜰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잠이 덜 깨거나 눈이 부셔서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내 목을 조르면서 내 몸 위에 올라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눈은 물론 고개조차 옆으로 돌리지 못할 정도였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기운을 쓸 수가 없었던 거야.
옆에 분명히 사람이 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보지도 못하겠고 소리도 칠 수 없는 답답함에 애타하는데 눈을 억지로 내리깔아 보니 발아래에 웬 처녀가 댕기머리를 한 체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고 있지 않겠니.
그것을 보는 순간 내 위에서 목을 조르고 있는 이는 그 처녀의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그 처녀에게 뭔가 잘못한 것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었어.
모르긴 해도 나 때문에 자살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나를 짝사랑한 처녀를 내가 무관심해하자 비관해서 자살을 했다는 나름대로의 소설이 내 머릿속을 채우는 순간 우리방과 붙은 곳에 위치한 욕실에서 세숫대야를 발로 걷어차는 소리가 심하게 났었지.
그 소리와 함께 그토록 심하게 내목을 조르던 할머니와 발치께 자리하던 처녀의 모습도 사라졌고 나를 누르던 힘도 사라졌는데 깨고 나니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더구나.
한마디로 십년은 감수한 셈이었어.
언제나처럼 새벽 출근시간에 깨우기가 미안해서 사장님께서는 매일같이 낡은 세숫대야를 발로 차고 있었거든.
그날 사장님이 우리를 깨우기 위해 낡은 세숫대야를 발로 차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괴롭힘을 당해야 했을지 몰라.
이날 이후에도 가위에 눌리는 일이 한동안 지속이 되었고 그때마다 내용은 달랐지만 결과는 항시 엄청난 고통을 겪고 난후에야 풀리곤 했는데 언젠가 이와 같은 가위울림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게 되었어.
어떻게 해방되었는지 궁금하지?
사실 이러한 가위눌림으로부터 해방된 얘기는 오늘의 주제와는 조금 동떨어진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뒤로 미룰까 하다가 나와 같이 고통 받는 이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시간을 내는 것이니 이해를 하고 들어주길 바라.
서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내려와 있을 무렵이었어.
그날 밤 역시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치는 중이었는데 이모님의 권유로 다니던 성당에서 배운 기도를 해보았더니 거짓말처럼 가위가 풀려 버리는 거야.
처음에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겠거니 했지만 나중에는 가위눌림의 조짐이 보인다 싶으면 잠을 자는 중에도 기도를 했는데 효과가 있더구나.
나중에는 잠을 자기 전 간단한 기도만 해도 가위눌림 현상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와 같은 일을 가위눌림을 당하는 다른 분에게도 말해주었더니 그분은 잘 통하지를 않는다고 하였어.
아들아!
이 같은 일이 왜 일어나는지 너는 짐작이 가니?
이것이 바로 믿음이 같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이야.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일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께 빌거나 염불을 하거나, 혹은 예수님께 기도를 해도 똑 같은 효과가 있음을 내가 장담할 수 있어.
이와 같은 가위눌림 현상을 한의에서는 기가 허해서 일어나는 일로 보는데 그 역시 옳은 말이라 생각되어지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기운이 강하면 그와 같은 에너지(영)의 침범이 일어나기가 어려운 법이거든.
내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가 신체가 건강해져서라기보다 내 믿음의 에너지가 강했기 때문이었어.
가위가 눌리면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전생이라는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었지.
그런데 이일만이 아니라 훗날에는 내 전생을 말해주는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는데 전생에 자신의 하인이었다는 분도 있었고 어떤 분은 자신이 장군이었을 때 자신의 부하였다고 하였고 또 누구는 자신이 왕이었을 때 자신의 신하라는 말도 하더구나.
또 누구는 전생에 유럽의 신부였다가 최근에는 티베트의 라마승이었다고도 하였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내 전생을 다르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왜 다들 저렇게 말을 할까 하며 궁금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나중에야 그러한 이유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이러한 일을 앞에서 너와 나눈 대화를 들여다보면 알 수가 있긴 하지만 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또다시 설명해 보기로 해.
언젠가 사람이 죽는 것이 컵 속에 담긴 물이 바다에 빠져드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날래나 모르겠구나.
바로 그와 같이 영혼이 대양에 녹아든 물과 같이 있다가 또다시 인간의 몸으로 탄생이 되는 순간 우주공간에 편재한 에너지의 교환에 따른 정보가 함께 흘러 들어온다는 거지.
육신을 가진 순간에는 제한을 가지고 있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난 순간 우주와 합일이 되었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거야.
이렇게 본다면 전생이라는 것이 어떤 한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면서 쌓아놓은 것만이 아니라 남들이 살아간 흔적조차 공유한다는 것이 아닌가 말이지.
어떠니?
실감이 가니?
도저히 실감이 가질 않는다고?
그렇다면 인도의 고대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크리슈나(스승) 와 아리쥬나(제자) 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꾸나.
스승의 진면목이 너무나 궁금한 아리쥬나가 스승인 크리슈나의 참모습을 보길 원하자 크리슈나가 자신의 배를 걷어 올려 스스로의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 있어.
거기에는 온갖 세상의 존재들이 모두 다 들어 있었지.
너와 나는 물론이고 천사와 악마, 천당과 지옥, 알파와 오메가, 위와 아래, 등 그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고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들어 있었던 거야.
바로 이러한 모습이 참된 각자의 모습이었어.
대우주가 우리 몸 안에 들어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러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니?
깨달은 스승이 천백억 화신을 나툰다는 말과도 통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고 깨달은 스승이 우주와 진정한 합일을 이루었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어때?
이제 이해가 되지?
사실 이 말이 네게는 너무나 어려운 말이어서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우리들이 육신 안에 갇혀진 존재가 아니라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인식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내 말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좀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깨달은 분들의 의식이라는 것이 육신에 제한된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것이라 보면 돼.
이 같은 말을 잘 설명해주는 말을 예수님이 하셨어.
“내 아버지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
이 말이 바로 그와 같은 일을 보다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는 거야.
제한된 존재로부터 해방되어진, 진정한 자유를 얻으신 예수님이 우주와의 합일을 이룬 것을 선포한 거지.
이와 같은 일이 깨달은 분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해주셨는데 기적을 행하시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오늘 내가 한일은 너희들도 할 수 있다.
아니 너희들은 더욱 더 잘할 것이다”
만약 성경을 내가 잘못보지 않았다면 이 같은 구절이 반드시 있으리라 여겨져.
만약 목회자들 말대로 우리가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이고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해.
아들아!
이 자리는 성경의 잘못이나 목회자들을 성토하는 자리가 아닌 만큼 다시 전생을 통해 우리의 영혼문제를 살펴보는 자리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꾸나.
많은 이들이 내 전생을 각자가 느끼는 대로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이유와 맞닿아 있어.
모든 사람들이 깨달아 있지만 그것을 본인들이 모르고 있다는 말을 하는 이유와도 통하는 말이기도 한데 나도 모르는 사이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녹아들어 있다는 거야.
단지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거지.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이 육신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그로부터 자신이 벗어나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 거야.
왜냐 하는 것에 대한 답은 지난번 했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그래.
이 이야기는 너무나 중요하니 다시 한 번 말해주마.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연극무대로 보게 되면 지금 모든 이들이 각자가 맡은 배역에 따라 연극을 한다는 것이고 자신이 연극을 제대로 하기위해 자신의 본모습조차 망각해야 한다는 거지.
그것이 내 전생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그 이유는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져 있는 육신으로서의 연극무대 속에 나를 집어넣기 위해 나의 전생을 그러한 존재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야.
이러한 사실을 내가 알고 있고 상대방이 그렇게 느낀다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우주의 편재한 모든 것들 중 한 부분을 끄집어 내 보는 것인데 내가 인정해주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고 그분들의 말을 구태여 부인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부하임을 강조하여 자신 밑에 하수인으로 취급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싫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그로부터 멀어지면 돼.
그래서 내가 앞서 말을 했지만 제대로 깨달은 분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이러한 점으로도 알 수가 있는 거야.
만약 모든 것을 깨달은 분이라면 반드시 모든 사람들이 연극을 할뿐이란 것을 알아서 자신이 높다는 것을 내세우거나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을 가야 한다고 협박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
아들아!
내가 언제나 말을 하지만 스승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종교나 믿음을 선택한 자는 우리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해.
내가 믿고자, 따르고자, 배우고자 했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스승님이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해주는 것일 뿐 깨달은 분이 누구를 구속하는 법은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없어.
간혹 사람들은 말을 하지.
성경에는 진리가 없다고…
천만에 말씀이야.
성경뿐 아니라 불경에도 진리가 있고 코난 속에도 진리가 있으며 하물며 하찮은 돌멩이 속에도 진리가 존재함을 많은 각자들이 말을 하고 있어.
중요한 것은 성경이나 다른 것들이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진리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거야.
다시 말해서 네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열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지.
내가 너와의 대화를 통해 항시 하는 말이지만 우리 자신을 너무나 고귀한 존재로도 만들 수 있고 한없이 비천한 존재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거든.
나 역시 내 안의 스승님을 욕되게 하지 않고 나 자신이 고귀해지기 위해서라도 보다 좋은 전생을 골라야 했어.
우주에 가득한 모든 전생들 가운데 가장 고귀하다 할 수 있는 전생이 내게 오게 하기위해, 아니 그런 삶을 살았던 느낌을 내가 갖기 위해서 성인이라면 했음직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만 했다 이거야.
그래서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토록 발버둥을 쳤던 것이고…
누군가 내 모습 안에 있는 비천했던 과거를 보는 것은 그들의 눈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일 뿐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모든 것은 순간에 머물 뿐이고 오로지 현재만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가장 고귀한 삶속에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아들아!
이것은 말만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여!
내 안에 주를 모시기 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내 병이 모두 나으리이다.”
내 안에 모시기 당치않다는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나의 성전을 청소해야 하지 않을까?
육신은 성전이라 했고 그 말이 분명히 맞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성전을 청소할 생각들은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자신의 육신 안에 거하게 할 것인지 가끔씩은 궁금하기 짝이 없어.
아들아!
유유상종이라는 말 알지?
이 말은 친구들을 잘 사귀라는 뜻으로만 쓸 말이 아니라 에너지의 법칙을 너무나도 잘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거든.
부처와 하나님이 안 오는 것이 아니라 내재하고 있는 것을 못 보는 것이라는 말은 이와 같이 스스로가 성전을 깨끗이 하지 못해서이지 결코 없는 것이 아닌 거지.
결국 자신 안에 귀신이 있건 부처가 깃들어 있건 혹은 하나님이 거하도록 만든 이는 누구도 아닌 자신이야.
아들아!
이렇게 장황한 설명을 들어보면 결국 결말은 무엇이라 여겨지니?
전생이라는 것 역시도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지 않니?
전생에 네가 그토록 귀한 존재였다면 지금생도 거기에 따른 결과가 따를 것이고 미래 역시 거기에 따라 변할 것이 아닌가 말이야.
이렇게 놓고 본다면 과거나 미래를 바꾸는 일은 가능할 뿐 아니라 내가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그렇지 않니?
과거, 현재, 미래를 한순간에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거야.
너는 알고 있는가 모르겠구나.
지금 현재의 네 인식을 바꾸면 온 우주가 바뀐다는 사실을….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네가 알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지금 우리는 모두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 않니?
그렇지?
현실 속에서 느끼는 나의 전생이고 현실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이 나의 미래라면 지금 이 순간 모든 것들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이야.
그 어떤 것도 고정되어진 것은 없다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인데 과연 이러한 것을 네가 얼마나 적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순전히 네 고유의 권한이고 권리임을 지난번에 이미 말했지?
그렇다면 왜 나의 인생을 바꾸지 않는 거냐고?
아들아!
어떻게 너는 내 인생이 바뀌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는 거냐?
네가 보기에 내 삶이 온통 신의 축복으로 넘쳐 나고 있지 않니?
무슨 강아지 하품하는 소리를 하느냐고?
그래 아들아!
너라면 아마 그렇게 여기고도 남음이 있을 거야.
그렇지만 너는 이것을 알아야해.
지금껏 내가 말한 세상살이가 고난의 연속이었고 아직도 남아있는 삶의 여정들이 고난일색 이겠지만 그러한 일을 통해 일어난 나의 자각이나 인식변화를 본다면 그야말로 경이로운 신의 축복이 아닌가 하거든.
문제는 어떤 상황을 마주하느냐가 아니라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렸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것이 바로 이런 연유였어.
지금의 내 삶이 온통 축복에 가득차고 행복하다면 과거와 미래역시도 그러할 것이고 지금의 내가 고귀하고 찬란한 존재라면 과거나 미래역시 그러할 것이 아니겠니?
아들아!
어렵지?
자!
좀 더 가슴으로 느끼기 위해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접근해 보기로 해.
앞서 보았던 많은 내 삶의 여정을 예로 보듯이 번뇌는 보리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는 알게 되었지?
바로 그와 같은 말을 우리의 대화로 끌어들여보자 이거야.
지금의 내인식이 너무나 많이 바뀌어서 선과 악을 넘어서고 지옥과 천국에 대한 인식을 넘었다면 과거역시 바뀐 것이 아닌가 말이지.
그렇지 않니?
그리고 네가 지금 현재 가슴으로 기쁨을 노래하고 삼라만상이 너를 축복하는 환희를 느낄 수 있다면 그러한 네 현재를 만들어 주기위해 지금껏 겪어 나온 과거의 모든 것들이 너를 위해 준비되었지 않았는가 이 말이거든.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결국 현재의 네 인식이 바뀌는데 따라 과거나 미래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고 기적과 같은 지금의 순간들이 결국 과거나 미래에 늘 있어왔고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거지.
이것이 바로 깨달은 이들이 온 우주를 바뀌게 만드는 법이야.
많은 이들이 깨닫게 되면 온 우주를 바꾼다는 의미를 물리적인 힘으로 바꾸는 것으로 알고 있고 많은 수행자들은 깨달음을 표현하길 빛과 소리 속에 편안하고 아늑함을 말하길 좋아하지만 그러한 것은 천국에 머무는 것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으로 신과의 합일을 이룬 것은 아니라 생각해.
앞에서도 말을 했다시피 천국을 누리기 위해 조건이 필요하다면 그 조건이 사라졌을 경우는 또다시 어려운 지경을 겪어야 하는 법이거든.
이러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 평생을 수행만 해 오신 스님 한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도록 해.
이분은 그야말로 신통을 겸하신 분으로 앉아서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가는 분이었어.
언젠가 직접 이분과 만났을 때 가부좌를 하고 앉은 상태에서 여러 사람 앞에서 그러한 것을 시범을 보이더구나.
그 당시 대만에서 출가자들이 왔기에 모두들 모였었고 잠깐 동안 그러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풀려진 눈동자의 초점과 수차례 안면의 근육이 심하게 변화되는 모습에서 육신만 그 자리에 있고 영이 지옥과 천국을 다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
물론 그것이 영혼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눈으로 확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나의 느낌은 강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분의 경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과소평가 하지도 않아.
다만 내가 받아들이고 가고자 하는 수행의 경지는 지금 이 순간 천국을 맛볼 수 없다면 우주 어디에서도 천국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야.
다시 말해서 그분과 같이 천국과 지옥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혹은 그 어떤 지옥 같은 경우에라도 천국의 기쁨을 얻을 수 있고 지옥 속에도 천국을 가져올 수 있는 경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거지.
하지만 아들아!
이것 역시 내 개인의 생각일 뿐 누군가가 편안함에 묻혀서 만족하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천국이 맞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우리가 지금 느끼고 알고자 하는 것들은 전생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한 것인데 그러한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결국 이야기가 이렇게 발전을 하였어.
그러나 이러한 것들 모두가 우리의 인식정도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과 우리가 창조하고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이기에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거야.
지옥으로 떨어진 제바달다가 걱정이 되신 부처님께서 신통제일 목건련을 지옥으로 보내보니 유황불 위에 놓인 기름 가마 속에 앉아서 “어~ 시원하다”를 연발하더라는 말에 부처님께서 안심을 하였다는 말은 결코 허구가 아니야.
우리는 제바달다가 한일만 보고 잘 잘못을 판단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할을 생각하지는 않고 있으며 그들의 의식세계도 모르면서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길 좋아해.
결국 그 역시도 자신이 스스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한 일이긴 하겠지만 그러한 것을 두고 인식의 차이라고 말하는 거지.
사실은 등급이 따로 있거나 정해진 것은 아니야.
다만 자신이 이생에서 해야만 할, 아니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살고 싶고 경험하고자 하는 역할에 보다 충실하기 위해서 그런 척을 하는 것뿐이지.
그러나 아들아!
이러한 연극무대를 무의미하게 여기고 모든 연극을 더 이상 하지 않고자 하는 선택을 하는 영혼들도 있어.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도 각자의 경계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고 각자의 세계들이 펼쳐지고 있으니 참으로 인간들은 대우주를 담고 있는 존재가 틀림이 없는 것 같아.
아들아!
이와 같이 보면 결국 네 전생이나 현재, 미래는 물론이고 천국과 지옥 역시도 네 마음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과연 너는 얼마나 이 같은 사실에 가까이 와있는가 궁금하구나.
혹 아직도 네가 엄마 아빠를 잘못 만나서 고생하고 있음을 원망하고 있니?
아니면 풍족하지 못한 네 현실 때문에 이모 집에서 마음고생을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니?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네 마음을 바꾸기 바라.
나는 지금 찬란한 내 현실을 가지고 있고 기적의 순간들을 맞이하고 있다고 말이야.
비록 지금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곧 찬란한 기적의 순간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나는 지금 기적을 심고 있으며 그 씨앗이 조만간 내게 결실을 가져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크게 소리치기 바라.
그러한 선언이 네 인생을 언제나 풍족하게 만들어주며 더욱더 많은 수확을 가져다 줄 거라는 것을 내가 약속하마.
아들아!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오늘 우리의 대화를 살아가는 동안 실천하기 바라며 다음 시간에는 우리가 나눈 대화를 내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을 시켰나 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도록 해.
오늘도 변함없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