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치고 이 은관님에 대해 모르는 분들은 없습니다.
오늘날 국악의 현대화에 앞장서신 분으로 국악계의 존경과 비난을 한꺼번에 받으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국악의 전통을 지켜나가려는 원로들로서는 이분의 혁신적인 국악의 현대화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다.
원로 중에 원로이신지라 대놓고 욕을 하지는 않았지만 방송에서 공공연하게 비난을 했었지요.
그렇지만 젊은 층에서는 상당한 지지를 받았으며 오늘날 퓨전국악을 있게 한 장본인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변화의 바람을 거역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통을 보존하려는 마음이 존중받는 거지요.
하지만 인간은 세상과 함께 끝없이 진화하는 사회적동물입니다.
우리의 언어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습니다.
국어학자들이 아무리 우리나라 언어를 고집하고 지키고 싶어도 시대의 흐름은 거역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국어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을 하나같이 유학 보낸다는 사실을 볼 때 본인들조차 변화의 바람을 거부할 수 없다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 같은 일은 어떤 분야에서도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진리를 표방하는 교회의 역사에서도 이 같은 일은 쉼 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일례로 찬송가 하나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다소곳이 부르던 찬송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갑니다.
작은 율동은 물론이고 심지어 댄스리듬에 디스코를 추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변화의 바람이 종교계에도 불고 있다는 말입니다.
알고 보면 이런 일의 시발점은 예수님이라 할 수 있지요.
예수님 생존당시만 하더라도 유대사회에서 예수님처럼 획기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전파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2천 년 전 종교혁명이 일어났던 겁니다.
예수생존당시만 하더라도 유대사회는 모세의 율법이 신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온 십계명이 율법의 중심이 되어 구전되어 내려오는 각가지 가르침들이 기원전1000년 무렵부터 책으로 만들어져 내려왔던 거지요.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보았던 여호와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킬 것을 명하는데 이때 일어난 일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3:2)
And the angel of the LORD appeared unto him in a flame of fire out of the midst of a bush: and he looked, and, behold, the bush burned with fire, and the bush was not consumed.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출3:3)
And Moses said, I will now turn aside, and see this great sight, why the bush is not burnt.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3:4)
And when the LORD saw that he turned aside to see, God called unto him out of the midst of the bush, and said, Moses, Moses. And he said, Here am I.
시내 산의 뜻은 “가시나무숲”으로 떨기나무숲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보았던 불꽃은 내면의 빛으로 깊은 묵상 속에서 성령이신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아직 문자를 인식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호렙 산과 시내 산이 둘로 보이고 하나님의 사자와 여호와가 둘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개돼지의 눈을 가리기위해서일뿐 하나입니다.
귀한 보물을 함부로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선지자들의 지혜의 산물인거지요.
이런 일은 반드시 내면의 불꽃인 성령을 만나야 알 수 있는 일이며 하나님의 허락 하에 영안이 열려야 가능합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께서 정확히 파악하였기에 그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했던 겁니다.
사실 모세와 예수와의 시대적 배경은 많이 다릅니다.
무려 1500년의 세월이 놓여 있고 모세의 시대에는 책이 없었으며 구전으로 내려오는 가르침만이 존재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사람들에게 이방의 마음(이집트의 뜻은 “검은 땅”으로 빛이 없는 상태의 마음을 가리킨다)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방법을 가르쳐야 했던 거지요.
원시사회나 다름없는 무질서한 상태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온갖 방편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로 다가서게 만들기 위해 각종제사법을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짐승을 잡아 피 흘림의 제사를 지냈던 것은 그 당시에 필요했던 방법이었음을 예수께서 간파하고 새로운 종교 패러다임을 만들고자 했던 거지요.
유월절에 담긴 깊은 뜻과 번제에 담긴 뜻이 유대사회에 알려진 바와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으나 제대로 알아듣는 이는 드물었기에 예수는 자신의 몸을 희생시켜가면서 진정한 피 흘림의 뜻을 전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담긴 피 흘림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는 이들은 드뭅니다.
마치 유행처럼 예수의 피가 죄 사함을 줄 수 있다 말하고 있으며 경쟁적으로 예수를 향한 우상숭배의 신앙심을 자랑인양 떠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이러한 점을 적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라 할 수 있지만 현실과 부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로서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예수님의 피가 과거 현재 미래 죄까지 모두 사해놓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사는 동안 어떤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살아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가 알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내재한 하나님에 대해 모른다는 확실한 증거이자 성령을 본 일이 없다는 것의 방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뜻하는 의미는 생명, 즉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며 시공간을 넘어선 영역에 도달함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소멸될 수 있다는 깊은 뜻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아직 생명의 불꽃을 본 일이 없는 이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으나 그들 또한 하나님의 유익한 도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다만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데 있어 더딘 점은 있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하다는 거지요.
그 발걸음을 더디게 만드는 이도 하나님인지라 내가 뭐라 할 것은 아니겠지만 빠른 걸음을 걷고자하는 이를 위해 한 말씀 올리는 겁니다.
모든 것은 믿음에 달린 일이며 일체는 유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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