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둘도 없이 하나밖에 없는 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나 홀로목사 인사드립니다.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높으신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지라 오직 한분뿐입니
다.
그런데 어떤 분은 제가 하나님을 칭송하면 극구 신이라고 고쳐 부르길 원합니다.
아마도 특정 종교가 연상되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나 홀로(holo)목사가 말씀드리는 하나님은 특정 종교에 속해져있지 않
으며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창조하신분입니다.
그러니 어찌 다른 이름이 필요하겠습니까?
오로지(only) 한분이신 하나님만이 거룩하시고 완전하시며 정의로우십니다.
이 세상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최고의 신은 이름을 달리한 하나님입니다.
이미 수차례 말했으므로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은 충분히 알고계시리라 믿고 9장의 마지막
시간을 열겠습니다.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막
9:14)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막9:15)
And straightway all the people, when they beheld him, were greatly amazed, and
running to him saluted him.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막9:16)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막
9:17)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
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막9:18)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
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막9:19)
해석에 앞서 여러분께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제대로 인식하기위해서는 반드시 마태복음을 봐야합니다.
전체내용을 보고난 후 마가복음을 봐야 왜 이렇게 기록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세한 설명은 본문을 보고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마17:14)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17:15)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마1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마17:17)
Then Jesus answered and said, O faithless and perverse generation, how long shall
I be with you? how long shall I suffer you? bring him hither to me.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마17:18)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
17:19)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
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마태복음을 살펴보니 마가복음과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9장 14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은 마태복음에는 없는 내용이지요.
그러면 마가는 왜 이렇게 마태복음에 없는 내용을 삽입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마가복음15절을 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서기관이나(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반대하는 이) 예수님제자들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all the people) 크게 놀라며(greatly amazed) 절을 했다고(saluted) 기록한 것은 마가가
예수님이 성령을 완전히 드러낸 분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지요.
마가가 이렇게 기록한 이유가 마태복음의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7절에 패역한 세대라고 한 것은 믿음이 없거나 잘못된 믿음을 말합니다.
(faithless and perverse)
그 당시 이스라엘사람들이나 제자들 모두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으로 믿지 않았
다는 말이며 믿더라도 잘못알거나 삐딱하게(의심하는 마음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겨자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거지요.
사실 이것은 성령에 대한 비유의 말씀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성령을 나타내는 말입
니다.
이런 정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마가인지라 좀 더 쉽게 풀어놓았습니다.
어떻게 풀어놓았는지 확인해 볼까요.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막9:20)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
다(막9:21)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
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9:2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
시니(막9:23)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9:24)
마태복음에 간단하게 설명해 놓은 것을 마가는 길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길게 늘여놓은 것은 좀 더 사실감 있게 묘사하기 위해서이며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
하기 위해서입니다.
22절을 보면 아이의 아비가 예수님더러 하실 수 있거든 도와 달라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셨지요.(23절)
이것만 보더라도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더욱 기막힌 내용이 이어집니다.
아이의 아비가 믿는다고 소리치며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하지요.
이 내용이야말로 신앙생활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내용에 담긴 뜻이 보이십니까?
이것은 단순하게 하나님을 믿으라는 권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 마음자세가 어
떠해야하는가를 말해주는 겁니다.
내가 믿는 것은 내 자유의지의 발동이니 아직 내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되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한 것은 믿음을 주고 안주는 이는 하
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과 육이 완전히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크게는 온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며 작게는 내 마음까지 다스리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니
나의 모든 행사를 주님께 맡긴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됩니다.
마태복음과 비교해보면 마가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할 수가 있으니 비교해가며 읽어보시기
바라며 다음구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막
9:25)
무리가 예수님께로 몰려온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 된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
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에게 명하여 쫒아내고 있지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뭔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에게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어찌된 일일까요?
역시 마가는 이곳에도 어김없이 깊은 뜻을 심어놓았는데 하나님(성령)의 권능의 힘으로 귀
신을 쫒아낸다는 말인 동시에 귀신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조금 어렵지요?
그렇다면 조금 풀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설명에 앞서 여러분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혹 귀신을 보신분이 있습니까?
몇몇은 있다고 하고 몇몇 분은 없다고 하는군요.
있다고 하는 분은 아직 귀신의 영향권 안에 있기 때문에 귀신을 보거나 감지할 수 있는 것
이고 없다는 분들 가운데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예 영적인 일에 대해 문외한이거나 아니면 영적인 등급이 높은 분들입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다들 영에 대해 조금은 아는지라 등급이 높다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분들은 진동이 높아서 귀신의 파장을 통과해버림으로 귀신이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
다.
바로 이점을 말하려 한 거지요.
그래서 일부러 마태복음에는 없는 내용을 삽입해서 기록해놓은 것입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에게 말해봐야 쓸데없다는 말이며 귀신이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다는 말을 함으로서 이 내용이 비유의 말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예수님처럼 성령을 드러낸 분의 인식에는 귀신은 안중에도 없음을 말한
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내용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막9:26)
The spirit shrieked, convulsed him violently and came out. The boy looked so much
like a corpse that many said, "He's dead." (NIV)
And the spirit cried, rent him sore and came out of him: and he was as one dead;
insomuch that many said, He is dead.h(KJV)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막9:27)
26절은 NIV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KJV를 보면 의미가 약간 달라집니다.
경련을 일으키게 한 대목을 KJV성경은 rent him sore 이라 기록했는데 이 뜻은 찢어발기
듯 아프다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귀신이 나가려면 몸이 찢기듯 아파야한다는 말이며 마치 죽는 것
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26절)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는 말은 영적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는 거지요.(27절)
예수님(성령)만이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뜻에서 마가는 이렇게 기록한 겁니
다.
달리 표현하면 귀신들린(간질환자)이가 온전해 지려면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보다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함께 보시죠.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
하였나이까(막9:28)
And when he was come into the house, his disciples asked him privately, Why
could not we cast him out?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종용히 물었다는 것은 비밀스럽게(privately) 물었다는 말입니다.(28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쫒아낼 수 없다했지요.(29절)
결국 14절부터 29절까지의 내용은 비유의 말이었다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 셈입니다.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마태복음에는 없는 내용이 많이 삽입된 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작용
에 대해 말하고자한 마가개인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나갈 수 없다는 뜻은 성령(하나님)의 힘만이 가능하다는 말이며
스스로가 기도를 통해 성령을 일깨워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전체적으로 비교해보면 믿음의 중요성과 성령의 힘이 작동하는 원리
에 대해 말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이 드러난 이가 귀신을 쫒아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
지나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만이 스스로의 내재한 성령을 깨어나게 만들 수 있으며 그러할 때
거듭나게 됩니다.
나 홀로목사는 이 같은 일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두 번의 경우가 있었는데 두 번다 기적이 일어났었지요.
여기에는 우리들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자신이 직접 기도할 수 없으므로 보호자가 대신 기도하거나 환자를 데리
고 치유해줄 사람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정말 성령을 깨운 사람을 찾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 치유될 수도 있으며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치유가 되는 것은 보호자(대부분은 부모)의 공덕(功德)이 많아서인 동시에 믿음 또한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유가 되지 않는 경우에는 시술자(施術者)가 능력이 없거나(성령이 깨어나지 못했
을 경우) 보호자나 환자가 공덕도 없고 믿음 또한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두 가지의 상호작용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거지요.
마태복음도 마가복음도 이러한 일을 비유로서 기록한 겁니다.
귀신과 영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짧은 시간에 다룰 것이 아니기에 좀 더 시간할애가 필요
합니다만 앞으로의 기회도 얼마든지 있으리라 여겨지는 만큼 다음으로 미루고 진도를 나가
겠습니다.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쌔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막9:30)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
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막9:31)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막9:32)
But they understood not that saying, and were afraid to ask him.
제자들과 예수님이 비밀회동을 한 내용입니다.
뭔가 외부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는 일이었지요.
이른바 십자가 부활사건인데 과연 예언을 한 것인지 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인지
좀 더 두고 보기로 하고 다음내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
엇이냐 하시되(막9:33)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9:34)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
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9:35)
Sitting down, Jesus called the Twelve and said, "If anyone wants to be first, he
must be the very last, and the servant of all."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막9:36)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9:37)
Whosoever shall receive one of such children in my name, receiveth me: and
whosoever shall receive me, receiveth not me, but him that sent me.
영적인 단체나 교회 등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이런 일이 왕왕 벌어지곤 합니다.
서로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신앙심(信仰心)이 좋다는 것을 내세우길 즐겨
하고 심지어 다투기까지 합니다.
특히 스승을 모시고 있는 단체라면 더욱더 그러하지요.
고금을 막론하고 이 같은 일은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이모두가 경쟁심과 수행에 대한 욕심이 과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가장 높아지려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고 낮아지라고 했지요.(35절)
이 말씀은 육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영을 가리킨 겁니다.
여기에서 가장 높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을 이름이니 곧 성령을 깨달아 드러낸 사
람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 성령이 있음을 알게 되면 누구와도 지나치게 경쟁하려들지 않을 것이며 누
구보다 더 잘났다고 내세우지도 않을 겁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예수님은 36절에서 어린아이를 세우고 안으셨던 거지요.
어린아이에게조차 성령이 담겨 있음을 알고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 내용을 마태복음에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는지요.
함께 보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18:1)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마18:2)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
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18:5)
마가복음과는 많이 다르지요?
같은 내용인데 상황과 배경을 달리해놓았으니 완전히 다른 것 같습니다.
마가는 이 내용을 완전히 소화한 다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복음서에 기록했지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한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해야한다는 말이며 사심이 없어야한다는 말입
니다.
이렇게 되려면 자신내면의 성령이 드러나야 합니다.
결국에는 성령이 드러나려면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덧없음을 인식해야만 한다는 거지
요.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작용할까요?
성경에서 해답을 찾겠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9:38)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막9:39)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9:40)
For he that is not against us is on our part.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이는 예수님 몸을 통해 나타나신 성령(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록 자신들과(육신) 함께 하지 않아도 무방함을 말씀하신거지요.
예수님 이름을 의탁하여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은 성령이 임하였다는 말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속해있지 않더라도 성령이 임할 수 있다는 말이며 예수님이(성령이
드러난 분, 깨달음을 얻은 사람) 하는 일에 반대만하지 않아도 같은 편이라는(on our part)
말입니다.
이 내용을 볼 때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비방하거나 비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
은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이유로 타종교나 단체에서 기독교도들을 욕하는 것도 정당치 못한 행위입니다.
무릇 하나님품안에 들지 않은 이가 없는데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욕을 하는 것은 하나님
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자녀라 할 수 없습니다.
다음내용을 보면 왜 나 홀로목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
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9:41)
For whosoever shall give you a cup of water to drink in my name, because ye
belong to Christ, verily I say unto you, he shall not lose his reward.
많은 목회자들이 이 내용을 두고 자신들을 대접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고 말하지
만 진정한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따르는 이들을 일러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성령이 완전히 드러난 분)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말이며 알아볼 수 있
다는 말입니다.
약간 다르게 조명해보면 모든 이들에게 성령이 있음을 알 경우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 겁
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배척하거나 공격의 화살을 날리는 행위는 하지 않겠지요.
이러니 어찌 상을 잃겠습니까.
하지만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어디든지 반대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요.
함께 보시죠.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
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막9:42)
And whosoever shall offend one of these little ones that believe in me, it is better
for him that a millstone were hanged about his neck, and he were cast into the
sea.(KJV)
"And if anyone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to sin, it would
be better for him to be thrown into the sea with a large millstone tied around his
neck.(NIV)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육신)을 믿는 크리스천들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을 믿는 사람 모두에게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엄하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어떤 행위를 하는 당사자의 내면에 성령이
있기 때문이지요.
일반적으로 육신만이 자신이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숨
결이자 자신의 진정한 영혼인 성령을 모릅니다.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함부로 남과 다투거나 상처 주는 등의 행위를 쉽게 합니다.
하지만 만약 상대방이 성령에 대해 알고 있고 성령을 드러낸 사람이라면 문제는 아주 심각
해집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을 공격하고 상처 준다는 것은 자신안의 성령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
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그렇게 가볍
게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KJV는 그나마 상처 주는 이가 낭패를 당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NIV는 죄를 유발시
키는 행위만으로도 낭패를 당한다했습니다.
깨달은 이를 화나게 만들어 죄짓게 만드는 것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니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처하는지 보시죠.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
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9:43)
And if thy hand offend the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thee to enter into life
maimed, than having two hands to go into hell, into the fire that never shall be
quenched:
(없 음)(막9:44)
Where their worm dieth not,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마태복음26편에서도 말한 적이 있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습니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구자로 살아가는 것(thee to enter into life
maimed)이라고 해야 옳은 겁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볼 때 영생이라 해석해도 무방하지만 이구절만 보자면 분명히 불구자로 살
아가는 것이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다고 해야 맞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몸이 필요 없으며 하나님나라는 육신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
이 들어가는 겁니다.
영혼도 귀신의 영향권아래 놓인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초에 입김으로 불어넣어준 성령
이 깨어나야 들어가는 거지요.
결국 이 내용은 성령을 알고 있고 드러난 분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지옥에 들어간다는 말이
됩니다.
44절의 내용은 한글 성경에는 없음으로 나와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기록되어있는데 지옥의
상황을 묘사해놓은 겁니다.
해충도 죽지 않고 불이 영원히 꺼지는 않는 곳이라 했으니 정확히 지옥을 나타내고 있습니
다.
이 같은 상황을 반드시 죽어서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해하는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주어지고 뜨거운 불에 들어앉아있는 것 마냥 마음이
편치 않다면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지요.
깨달음 얻은 이를 함부로 대하면 좋지 못한 결과가 주어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요.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9:45)
And if thy foot offend the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thee to enter halt into life,
than having two feet to be cast into hell, into the fire that never shall be quenched:
(없 음)(막9:46)
Where their worm dieth not,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이 내용 역시 걷지 못하고 사는 것이(thee to enter halt into life) 두발을 가지고 지옥 가
는 것 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으며 지옥의 상황은 영원히 불타는 곳이며 벌레조차 죽지 않는
곳이라 말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내용은 다음에 이어집니다.
함께 보시죠.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막9:47)
And if thine eye offend thee, pluck it out: it is better for thee to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with one eye, than having two eyes to be cast into hell fire: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8)
Where their worm dieth not, and the fire is not quenched.
48절을 읽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환희가 가슴에서 올라왔습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하나의 수행방법에 대해 말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손발이 죄짓거든 찍어버리라고 할 때는 분명히 병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죽어서 지옥에
처해지는 것보다 낫다고 한 거였는데 이번에는 한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의 육신으로 영생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영안(지혜안)
을 열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정말 기막힌 비유의 말을 해놓았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 홀로목사는 이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20년 동안 지혜안(영안) 여는 수행법을 해나왔기 때문입니다.
간혹 크리스천들 중에 이런 분들이 있는데 이분들 역시 두 눈을 하나로 모으는 방법을 알고
있지요.
기도할 때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성전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만나는 방법을 묵상을
통해 알게 된 겁니다.
언젠가 여기에 대한 방법을 말씀드린 것 같아 이곳에서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막9:49)
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NIV)
For every one shall be salted with fire, and every sacrifice shall be salted with
salt.(KJV)
사람마다불로서 소금 치듯 받게 된다고(NIV) 간단하게 기록했지만 (KJV)성경을 보면 그렇
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나 홀로목사의 영어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나름 번역해보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불로 소금 치듯 받지만 모든 제물은 소금으로 소금치듯할 것이다
For every one shall be salted with fire, and every sacrifice shall be salted with
salt.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옥 불에서 음식이 소금에 절여지듯 하지만 하나님께 바친바 된 희생양
(제물)의 사람들은 소금으로 소금 치듯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을 봐야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5:14)
어떻습니까?
이제는 나 홀로목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지요.
마가는 여기에 대해 좀 더 보충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9:50)
Salt is good: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ltness, wherewith will ye season it?
Have salt in yourselves, and have peace one with another.
여기에서의 소금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없다면(맛을 잃으면) 사람구실을 제대로 못한다는 말이지요.(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모든 이들 안에 성령이 있음을 알고(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하나님의 다 같은 자녀처럼 지
내라는 말씀입니다.(화목 하라)
정말 마가는 대단한분입니다.
그 스승의 그제자라는 말이 이분을 위해 생겨난 것 같군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후세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위해 남겨놓았다
는 것은 칭송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아울러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자신에게 득 되는 선택을 하
라는 겁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지만 해석에 있어서는 천차만별일터이니 어떤 해석이
여러분을 영생에 이르게 만들지 스스로 선택하라는 거지요.
언제나 말씀드리다시피 나 홀로목사의 성경해석이 유일하지는 않습니다.
더 좋은 해석이 있다면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이 여러분의 영생에 도움이 된다
면 얼마든지 좋습니다.
부디 내재(內在)한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지혜로운 선택을 허락하시기를 기도하며 마가복음
9장을 마무리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