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생각 긴여운

깨달음은 드러남이다.

배가번드 2023. 9. 2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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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무속인들 100명을 모아놓고 물어보는 방송프로가 있었습니다.

제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관심 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부터 내안에서 나를 지켜보는 어떤 존재가 있음을 느끼며 살았던 터라 무속인의 삶에 관심이 많았지요.

내안의 존재는 나를 통해서만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통해 말을 해주기에 그분들과 달랐지만 신령한 존재가 뭔가를 말해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한 겁니다.

그 방송을 통해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박수무당한분이 젊은 시절 노름을 좋아 했다고 합니다.

가끔씩 심심풀이로 노름을 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중독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신령한 존재가 노름하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판이 커지기 시작하니까 반대로 가르쳐주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노름으로 쫄딱 망하게 되었고 결국 무당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했는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로 신령한 존재가 왜 그분을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했더니 무당의 직분에 충실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두 번째로는 신령한 존재가 무당을 부자로 만들어주려 해도 한계가 있으며 정도이상의 영역에 도달하면 상위의 신령한 힘에 가로막힌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로는 무당자신의 운명에 재산이 없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신령한 존재가 주려고 해도 담을 그릇이 안 되면 소용이 없다는 거지요.

사실 이세가지 모두는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타고난 역할에 따라 신령한 힘이 크게 작용할 수도 혹은 작게 여겨질 수도 있는데 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보면 신령한 존재의 영역이 구분 지어지게 됩니다.

본인의 타고난 운명에 따라 필요한 정도만큼 신이 작용하게 됨으로 모두는 하나로 작용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신령한 힘이 제한을 받게 되는 것은 물질적인 일에 관여를 하기 때문이지요.

앞서 말한 대로 무당이 노름을 할 때 상대방의 내면에도 신령한 힘이 있을 것이며 그 역시 그러한 신령한 존재의 도움을 받을 겁니다.

본인이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령한 존재가 들어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국 신의 영역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며 누군가는 승리를 쟁취하게 되겠지요.

이러한 점은 주윤발이 나오는 도신이라는 영화에 잘 녹아들어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신의 영역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신의 영역을 제대로 묘사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 또한 물질적인 시각에서 조명한 것으로 정의가 승리한다는 점을 강조한 점에서는 어느 정도 좋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노름판에서 과연 누가 정의로울까 입니다.

내 쪽에서 보면 내가 정의로운 것이고 상대편에서 보면 상대방이 정의롭다 할 것인데 과연 어느 쪽이 진정으로 정의로울까요.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어서 주윤발이 정의롭게 보일뿐 실질적인 세상에서는 이기는 쪽이 정의로운 겁니다.

그래서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승리를 쟁취하고야 마는 것이 이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많은 이들이 무당을 찾아가 신점을 보고 굿을 하는 것이며 자신을 이롭게 만들어 달라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노름에 빠진 무당이 말했듯이 신령한 존재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과 인연공덕에 따른 방책을 말해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악한 사람이 오게 되면 오히려 반대되는 방법을 가르쳐주어 낭패를 당하게 만들 것이며 착한 사람이 찾아오면 그 정도에 맞게 방책을 말해 줄 거라는 말입니다.

결국 본인이 얼마나 많은 복덕을 지어놓았는가에 따라 신령한 존재가 대응을 하게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되지요.

물론 이 같은 일을 여러 단계의 영적인 일로 풀이하게 되면 영적수준이 낮은 쪽이 높은 쪽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되겠지만 태초에 인간을 지었던 창조주의 숨결인 성령의 입장에서 보면 높낮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는 겁니다.

단지 역할만이 있는 것이며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의 법칙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미 수차례 말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성령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저질러놓았던 많은 악행들이나 잘못된 일들이 업장으로 작용하여 성령이 드러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영혼이 잠들거나 죽어있다 말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무당에게 점사를 부탁하게 되면 성령은 그 수준에 맞는 신령한 존재의 입을 통해 그 사람의 인연공덕에 따른 일들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출7:3)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출7:4)

 

애굽의 바로왕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애굽을 이방인의 땅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뜻은 “검은 땅”입니다.

성령이신 빛이 없는(잠들어 있는, 죽어있는)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바로의 뜻이“큰집, 위대한 집” 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성령이신 하나님을 품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경을 읽어본 이들은 아시겠지만 바로왕은 무려 10가지의 재앙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적과 이적을 많이 보이셨지만 영적인 길을 가고자하는 마음을 거역하고 물질 세상에 머무는 선택을 하지요.

그렇지만 마지막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 앞에 드디어 항복을 하며 영적인 길을 허락하게 되었던 겁니다.

장자의 죽음이란 육적 자아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며 홍해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영적 부활을 뜻합니다.

열 번에 걸쳐 재앙과 기적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영적인 길을 가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할 것은 바로왕의 마음을 항시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바로왕의 입장에서는(하나님을 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마음을 먹는다 하겠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다는 뜻이지요.

이 말씀인즉 무당을 통해 신령한 존재가 말하는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당의 머리와 입을 움직여 말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이 신령한 존재를 시켜서 그렇게 말하게끔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이고 삼라만상을 하나님이 지었고 열국의 왕을 발아래 두는 것이 성령이라는 성경말씀이 진리의 말씀이 됩니다.

 

오는 이의 마음도 떠나는 이의 마음도 성령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믿는 자만 들으시오.